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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론

[양상훈 칼럼] ‘범 내려온다’더니 고양이가

[양상훈 칼럼] ‘범 내려온다’더니 고양이가

신에게는 아직… 범 내려온다… 말은 자신만만… 결과는 최악
고양이 온다더니 호랑이가 왔다는 그런 나라가 됐으면

양상훈 주필

입력 2021.08.19 00:00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양궁에서 세계 최고의 위상을 다시 한번 빛냈다. 수영과 육상 높이뛰기에서 새로운 희망도 발견했다. 여자 배구의 분투도 국민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국가 성적 전체로는 ‘최악’이란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좋지 않았다. 금메달과 전체 메달 숫자가 1984년 LA올림픽 때로 퇴보했다. 올림픽에서 메달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경쟁이 본령인 스포츠에서 메달이 우선인 것은 분명하다. 2012년 런던올림픽 때의 절반에 불과한 메달 수를 보며 떠오른 장면은 한국 선수단이 도쿄 올림픽 선수촌에 내걸었던 현수막이었다.

한국 선수단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당신이 흘린 땀을 기억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었다. 올림픽 정신에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도쿄에선 ‘신(臣)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전쟁 각오를 패러디한 플래카드를 걸었다. 이에 대한 일부의 찬반 논란을 떠나서 필자는 그 플래카드를 보고 ‘우리 선수단이 이번 올림픽에서 경쟁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임진왜란 때 사즉생의 결의까지 내보인 만큼 개최국 일본과의 경쟁도 해볼 만한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이순신 플래카드가 논란을 낳자 바꾼 플래카드는 ‘범 내려온다’였다. 압도적인 한국 팀이 곧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올림픽 경기가 진행되면서 이 플래카드들은 우리가 내용과 실력은 없이 그저 말만 앞세운 또 하나의 사례로 추가되고 말았다.

지난 7월 17일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선수촌 대한민국 선수단 숙소에 '범 내려온다'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펼쳐져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작은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백신 도입, 소득 주도 성장, 일자리 정부, 공정과 정의, 온갖 비전 선포, 국민 통합, 북한 비핵화 등 화려한 말을 앞세웠지만 결과는 허망한 것이 너무 많은 요즘, 스포츠까지 그런 풍토에 물들었느냐고 개탄하게 된다.

선수촌에 이런 식의 플래카드를 내건 선수단은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했다고 한다. 그것도 일본인들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최소한 거기에 걸맞은 경쟁력이라도 보여줬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일본에 비해 금메달은 4분의 1 이하, 전체 메달 수는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일본은 역대 최다 메달이고, 한국은 거의 40년 만에 최소 메달이었다. 종목 편중도 극심해 양궁을 빼면 금메달이 두 개뿐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오늘 네덜란드 깬다’고 하다가 0대5로 참패했던 기억까지 났다.

스포츠를 포함해 모든 종류의 경쟁은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결과에 대해 쉽게 낙관하지 않는다. 경기력이 높은 선수일수록 그런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어떤 자신감으로 ‘신에게는 아직…’ 각오를 밝히고 ‘범 내려온다’고 자신만만했는지 그 경위를 알아봤다. 체육회 실무진이 낸 아이디어가 그대로 통과됐다고 한다. 이렇게 전투적인 플래카드를 걸겠다는데 ‘좀 신중하자’고 제동을 건 사람 한 명이 없었다. 우리의 실력 수준에 비춰 이런 문구는 과도하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던 듯하다. 말은 말일 뿐인데 허세 좀 부리면 어떠냐는 것이다. 내뱉는 말과 실제 결과의 차이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미국인은 총으로 싸우고, 일본인은 칼로 싸우고, 한국인은 말로 싸운다고 한다. 우리가 말로 싸운 역사는 참으로 길다. 조선 초기 이후 국가가 대외 확장과 무력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거의 300년 이상 말로써 모진 싸움을 이어 왔다. 4색 당쟁이란 것이 전부 지독한 말싸움이다. 그래서 발달한 것은 ‘욕설’뿐이란 얘기가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 6·25 남침 직전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백두산에서 먹는다’는 유행어도 있었다. 그렇게 말로 먼저 싸워 이겼던 그 전쟁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중국·일본의 정보기관이 ‘한국인은 첩보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화를 해보면 정보원인 게 드러나고 자신을 감추는게 아니라 은근히 과시하는 사람까지 있다는 것이다.

양상훈 주필

말이 아닌 칼로 싸워 온 일본인은 말을 조심해서 한다. 자기 실력을 낮춰 말해야 실제 싸움에서 유리하다는 생각이 있다. 일본은 스텔스 전투기의 기술 실증기 비행 시험까지 마쳤지만 이를 내놓고 자랑한 적이 없다. 작년 타이게이급이라는 혁신적인 잠수함을 진수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일본 잠수함은 디젤 추진으로는 세계 최대급이지만 어떻게든 작게 보이려고 한다. 어떻게든 크게 보이려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 보유 잠수함 수도 일본은 항상 실제보다 줄여서 발표한다. 그런 나라의 수도에 가서 했던 우리의 말싸움에 일본인들은 겁을 먹었을까. 말로 먼저 시작했던 이번 올림픽의 끝도 말이었다. 여자 배구 스타 선수의 입에서 ‘대통령님께 감사’ 한마디를 끌어내려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보니 혀를 차게 된다.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고, 지킬 수 있든 없든 말부터 내뱉고 보는 풍토는 이제는 달라졌으면 한다. ‘범 내려온다더니 고양이가 왔네’라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나타난 건 호랑이였다’고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