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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김용삼 칼럼] 전 국민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망국의 역사 직시해야

[김용삼 칼럼] 전 국민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망국의 역사 직시해야

  •  김용삼
  •  최초승인 2021.08.10 07:57:29
  •  최종수정 2021.08.10 15:42

이 땅의 민초(民草)들의 절대다수는 일제 통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며 생존을 영위했다. 카스트 제도나 다름없는 양반-상놈의 신분구조에서 해방되고, 악랄하기 그지없었던 대한제국의 패악통치에서 벗어난 기쁨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산 것이 친일이고 천벌을 받아야 할 죄라면, 이 땅에 살았던 민초들 중 죄인 아닌 자 누구인가?

사흘 후면 광복절이다. 8·15에 담긴 의미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1948년의 건국 두 거대 사건이 오버랩되어 있다. 따라서 이날을 기해 사회 곳곳에서 온갖 반일(反日) 퍼포먼스가 넘쳐날 것이고, 일제 만행을 부르짖는 보도들이 줄을 이을 것이다. 포퓰리즘에 푹푹 절은 정치인들은 반일 감정을 자극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언론을 도배질할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선봉에 서 있는 동국대의 황태연 교수 같은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3년 12월 1일 대한민국의 독립을 만천하에 천명한 최초의 국제문서 '카이로선언'을 쟁취함으로써 마침내 갑진년(1904) 2월 6일 왜적의 재침으로 시작된 갑진왜란(러일전쟁의 황태연 식 표현)으로부터 하루도 그칠 날 없이 계속된 ‘40년 장기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한다(황태연 외 지음, 『일제종족주의』, 넥센미디어, 2019, 21쪽). 그 결과가 조국광복이었다는 것이다.

카이로선언을 임시정부가 쟁취한 게 맞나? 40년 장기 항일전쟁은 또 무슨 소리? 독립군과 광복군의 육탄·적혈? 우리의 무장 항일독립군과 광복군이 40년간 일제와 하루도 빠짐없이 사투를 벌여 독립을 쟁취한 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부합하는가?

마치 한 편의 장엄한 역사소설을 읽는 것 같다. 그런데 사료가 전하는 일제 망국과 관련한 이야기는 황태연 교수 같은 반일 종족주의자들과의 주장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 일제 통치에 순응한 이 땅의 백성들

그동안 우리는 대한제국이 합병당했을 때 양반 관리·유생·선비와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폭동 반란으로 격렬 저항한 것으로 믿어 왔다. 참으로 미안하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런 일은 전체 백성들 중 지극히 일부의 일이었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일본 천황에게 통째로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대다수 백성들이 보인 모습에 대해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병합』의 저자 이데 마사이치(井手正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어떤 말썽이나 곤란한 상황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 맥을 빠지게 할 정도로 극히 평정한 상태에서 무사히 종료되었다. 병합 발표 후에도 그 어떤 분요(紛擾)를 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예상한 것 이상으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였다.”(이데 마사이치(井手正一) 지음·신동규 옮김,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병합-「조선사정」과 「조선사진첩」』, 동아대학교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 2020, 32~33쪽).

이데 마사이치의 증언에 의하면 거의 모든 대한제국 백성들은 한일병합을 환영했다. 상민들은 양반과 관리들에게 생명·재산 등 모든 자유를 박탈당해 왔는데, 병합으로 인해 양반-상놈의 속박에서 벗어나 법률상·사회상 양반과 동등한 인격자가 되었기에 그 기쁨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병합이 다른 나라처럼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거나, 의회에서 독단적인 결정을 통한 강행이 아니라, 군주의 임의적 판단에 의한 평화적 합병이었음이 특기할 만한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한제국처럼 조약을 통해 한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넘긴 사례는 인류 역사상 지극히 드문 사례였다는 것이다(이데 마사이치 지음·신동규 옮김, 앞의 책 37~38쪽).

대표적인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감이 너무 크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의 주도로 설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송병준은 조선 내에 친일단체를 설립하라는 일본의 비밀지령을 받고 1904년 8월 18일 유신회를 먼저 조직한 다음 8월 22일 일진회로 개명했다고 한다. 일진회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11월 6일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국민신보」를 통해 친일여론 조성에 앞장섰고 고종의 양위 책동, 의병토벌 등 매국 행각에 앞장서 친일 악명을 얻게 되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일진회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실컷 이용해 먹은 후 토사구팽(兎死狗烹)을 한 것이다. 매국행위에 앞장섰던 이용구는 일본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뼈를 묻었다.

#. 문명개화에 눈을 뜬 동학교주 손병희

하지만 일진회는 이것이 활동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묘한 이중성을 띤 단체다. 일진회의 또 다른 얼굴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1894년 12월 우금치 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은 3만 6,000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채 패퇴 소멸했다. 한동안 존재조차 미미했던 동학은 1897년 최시형이 도통을 손병희에게 전수한다. 다음해 최시형이 체포·처형되자 3대 교주 손병희는 동생 손병흠과 함께 평안도·황해도 개항장 부근, 국경 근처에서 상업과 무역을 하며 비밀리에 교세 확장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구 문명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

윤정란은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저서에서 서북지역은 중국과의 무역 등으로 조선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고 지적한다. 서북지역은 척박한 농토, 정치적 차별 등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부터 상업에 관심을 둔 결과 서북을 대표하는 기업이 대동상회이고, 진남포에서 등장한 근대적 기업인이 화신그룹을 일궈낸 박흥식이다.

동학 실패 후 손병희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과의 협력을 선언했다.

손병희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한 덕에 동학은 1900년 무렵 북부 지역에서 교세가 급성장했다. 손병희는 관헌의 추적으로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상헌’이라는 가명으로 일본 정계 실력자들에게 접근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이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실패는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의 부재 탓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손병희는 이광수를 비롯한 64명의 조선 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들을 조선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한 원대한 구상이었다. 춘원 이광수가 문명개화의 세례를 받은 것은 손병희 덕분이다.

손병희는 구시대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조선 백성과 지도자들의 의식개혁을 통해 자주독립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그는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러일전쟁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국내의 지도층 인사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러시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손병희는 일본이 승리할 것이며, 승자인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조선의 미래를 위해 유리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위한 응원세력으로 일본을 꼽았다. 일본과 동맹을 맺고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아시아 연대론에 공감했다. 그는 1903년 일본에 협력할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국내의 동학 지도부에게 알렸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손병희는 일본 정부에 전쟁기금으로 1만 원을 쾌척했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원 정도의 거액이었다. 그리고 동학 지도자 40명을 도쿄로 불러 “이번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도우라”고 명했다.

#. 단발흑의로 문명개화에 앞장서다

교주의 연설을 듣고 귀국한 동학 지도자들은 1904년 4월 이용구를 중심으로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진보회(進步會)로 이름을 바꾸었다. 진보회는 일본에서 깨달음을 얻은 손병희의 문명개화노선의 결과였다.

동학은 진보회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당시 정부는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공표했으나 위정척사 세력을 중심으로 한 양반과 백성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진보회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하루아침에 회원들이 상투를 자르고, 검은색 옷을 입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개혁과 진보, 국정쇄신을 외쳤다. 이후 동학은 진보회, 단발흑의(斷髮黑衣)로 상징되었다.

유생들이 위정척사를 외치며 단발령에 저항할 때 진보회가 단발을 지지한 이유는 단발을 하지 않은 비위생적 모습을 야만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명의 기준을 서양과, 서양을 배워 문명화한 일본에 두었기에 그들 도움을 받아 조선이 문명 전보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러일전쟁 무렵 진보회는 단발흑의 회원이 10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정식 회비를 내는 회원은 14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회비를 내는 회원 수가 14만이었으니 회비를 내지 않는 회원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진보회는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러일전쟁 중 전략물자 수송을 우해 3,000명의 수송 인부와 50명의 정찰 인원을 자발적으로 동원했다. 또 황해도·평안도 일대 회원 26만 명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경의선 철도건설과 군수품 운반을 도왔다.

일진회의 활동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분석한 김종준의 저서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친일활동" 표지.

1904년 8월, 구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유신회(維新會)라는 단체가 출범했다. 이 조직은 송병준을 통해 일본인들과 연결되었다. 이들은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일본군 지원을 받아 활동했다. 일진회는 진보회가 자기들과 비슷한 성격의 단체라는 점을 감안, 진보회와 합병을 제의했다.

#. 독립협회를 계승한 일진회

손병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4년 12월, 하나의 단체로 통합되었다. 일진회에는 해산당한 독립협회가 참여하여 중앙조직을 담당했고, 동학교단은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동원하여 하부구조를 형성했다. 일진회는 자신들이 독립협회를 계승했음을 선언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손병희가 실질적으로 일진회 창립에 관여했으며, 통합 전에 이미 서울의 일진회가 각 지방 일진회의 상부기관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즉 송병준이나 그에게 매수당한 이용구가 아니라, 손병희로 대표되는 동학 세력이 일진회 성립의 주도세력이었다는 주장이다.

손병희는 일진회를 통해 일본과 손잡고 러시아에 맞서려 했다.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 손병희의 행보를 친일 매국적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다수의 개화 지식인들은 일본이 선전한 ‘문명화’ 논리를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진회는 문명화론에 입각하여 민권 우선의 애국론을 강조했다. 일진회 강령은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국가기초를 공고히 한다, 둘째,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셋째, 정부 개선정치를 실시하도록 한다, 넷째, 군정(軍政) 재정을 바로잡고 고친다 라고 되어 있었다.

이 강령에 기초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실천하도록 압박했다. 일진회는 인민에 대한 학대 금지, 무명잡세 폐지 등 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정부의 악정(惡政)에 저항했고, 힘없는 백성들이 이유 없이 수탈당하면 해결사로 나서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줬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진회 활동을 지지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도 일진회 목적이 선량하여 폭정에 고생하는 양민의 동정을 일으켜 다수의 농상민(農商民)이 회원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진회는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상공업 활동에 적극 나섰다. 동양주의에 입각하여 경의선 부설공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각종 회사 설립에 앞장섰으며, 농공은행 설립에도 일조했다.

#. 손병희는 문명개화, 이용구는 친일로 갈라서

이용구는 1905년 11월, 일진회 명의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고, 12월 일진회 회장에 올랐다. 1906년 9월 손병희가 일진회 지회 해산을 명하자, 이에 대항하여 동학교도들을 일진회 산하로 끌어들이려다 출교 처분을 당했다. 그는 시천교를 설립하여 교조에 올랐다. 손병희는 1906년 천도교를 세워 일진회와 결별했다. 이로써 손병희는 일진회의 친일 행위와는 절연했다.

손병희와 함께 문명개화운동에 앞장섰던 이용구는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에 감명받아 친일의 길을 걸으면서 손병희와 갈라섰다.

이용구가 친일의 길로 나간 이유는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다. 1893년 출간된 『대동합방론』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과는 반대로 아시아인의 연대를 강조했다. 덕분에 책이 출판된 후 한·중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은 러시아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한다.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진하고 있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동아시아는 러시아의 먹이로 전락할 것이다. 위기에 대응하려면 동아시아의 황인종이 단결하여 연대세력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다루이 도키치는 세 단계를 제시했다. 1단계는 일본과 한국이 ‘대동(大東)’이란 합방국을 세운다. 2단계는 대동국이 중국과 동맹관계를 수립한다. 3단계는 대동국과 중국을 연합하여 남양제도를 포함한 대아시아연방을 실현한다. 이용구는 이 책에 감명받아 아들 이름을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라 지었다.

불행하게도 다루이 도키치의 합방론은 겉은 선린의식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내면에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라는 비수가 숨어 있었다. 1910년 한국병합 강행 두 달 전 재출간된 『대동합방론』 서문에서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과 한국의 연합이 성취되어도 한국인은 합성국의 국가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보호 아래 두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밝혔다.

다루이 도키치의 눈에 비친 한국은 문화는 미개하고 정치는 부패했으며 기후는 불순하고 국민은 독립심이 결여된 나라다. 이처럼 빈약한 나라라면 합병을 하지 않는 것이 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루이 도키치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인들이 한국병합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러시아 등 대륙과의 통상을 편리하게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첫째 이익이다.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체구가 장대하고 완력이 강하다. 이들을 일본식 군사제도로 훈련하고, 우리 무기로 무장시키면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두 번째 이익이다”라고 답한다.

일본에게 한국이란 대륙 진출의 통로,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방파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일본인들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한 이용구는 친일로 돌진하면서 손병희와는 완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1909년 12월 일진회는 한국 정부를 폐지하고 일본 정부가 직접 정치할 것, 통감부 폐지 등을 주장하는 ‘일진회 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용구의 소원대로 한일합방이 성사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용구에게 은사금 10만 엔을 내렸다.

#. 한국인들이 선택한 길

구한말 나라가 기울어갈 때 이 땅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홉스적 자연 상태였다. 한반도에는 근대 문명을 지향했지만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은 개화파, 민족적 저항은 했지만 봉건적 성격에 머물렀던 위정척사파가 존재했다. 그 시절, 관리들에게 죽어라고 수탈 당하던 이 땅의 불쌍한 백성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무능·부패하고 미래에 대해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한 채 외세에 빌붙어 권력 유지에 급급한 대한제국 황제의 극악무도한 봉건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비록 이민족이지만 법에 의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문명개화한 일본의 근대화 된 통치를 받을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독자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는 것이 더 자신의 삶에 유리했다고 보시는가? 앞에서 소개했듯이 이 땅의 민초(民草)들의 절대다수는 일제 통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며 생존을 영위했다. 카스트 제도나 다름없는 양반-상놈의 신분구조에서 해방되고, 악랄하기 그지없었던 대한제국의 패악통치에서 벗어난 기쁨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산 것이 친일이고 천벌을 받아야 할 죄라면, 이 땅에 살았던 민초들 중 죄인 아닌 자 누구인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a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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