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배 오른 편의 비밀”
- 김민웅
- 등록 2021.07.16 06:00:00
- 16면
- 다니엘의 환상, 네 마리 짐승
▲ 다니엘서
다니엘은 어느 날 기이한 짐승이 등장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동서남북 사방에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큰 바다에 불어 닥쳤다. 그러자 바다에서 모양이 서로 다르게 생긴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왔다. 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이 보였으나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살펴보고 있는 동안에 그 날개가 뽑혔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는 곰 세 번째는 표범 마지막에는 사납고 무서우며 힘이 아주 센 짐승으로 쇠로 된 큰 이빨을 가지고 있었으며 뿔이 열 개나 있는데 뿔 하나가 돋아나더니 그게 모든 것을 제압했다고 한다.
흔히들 구약 성서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서의 “다니엘 서”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막강한 힘을 가진 네 번째 짐승도 결국 멸망하고 만다. 짐승이 나타나는 환상은 신약의 “요한계시록”에도 나온다. 막대하기 짝이 없는 힘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다를 바 없다. 도대체 이게 무얼 뜻하는 걸까?
- 야만의 종식
▲ 마카비우스 전쟁
기원전 587년 이스라엘은 바빌론 제국에 함락당하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버린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기원전 540년,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페르시아 제국은 바빌론 제국을 무너뜨리더니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고 있던 이스라엘의 귀족계급과 사제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파격적 결정이었다. 이로써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재건에 몰두한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신앙을 회복하는 노력을 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성서’라는 문서가 하나하나 체계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상전은 엄연히 페르시아 제국이었고 거대한 제국의 식민지라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하수인이었으며 민중은 안팎으로 뜯겨 살고 있었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의 운명도 신흥 강대국 알렉산더 제국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기원전 330년, 젊은 제왕 알렉산더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헬레니즘의 세계를 만들어냈고 오랜 유대주의 전통으로 살아왔던 이스라엘도 이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제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168년, 마카비우스 봉기는 마침내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왔고 이는 이후 매우 중요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 참에 로마제국의 출현은 또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게 된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선봉에 선 정복전쟁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다니엘이 보았던 네 마리의 짐승은 바빌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의 전신인 메디아 제국, 그리고 이보다 더 강성해진 페르시아 제국이다. 요한계시록은 이후 등장하는 로마제국까지를 포함해서 제국의 계보를 짐승으로 드러낸다. 제국의 지배는 짐승, 즉 “야만”이라는 논리가 일관해 있다.
-의병투쟁과 하나님 나라 운동
▲ 의병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제국은 곧 문명의 최첨단이라고 생각되는 세계관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환상”의 방식으로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따라서 야만과의 쟁투가 되며 이들 제국의 하수인으로 민중을 핍박하는 자들과의 싸움 또한 “야만의 종식”이 된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운동은 모두 이 야만적 짐승의 세계와 맞서 격투를 벌이는 “의병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의병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단발령’은 조선의 유생들에게 문명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뜻했고 이에 결연히 일어나 의병투쟁을 하는 것은 따라서 문명의 복구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중앙의 지배관료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매판분자들이 되자 지방유생들은 민중과 결합해서 이에 항거한다. 일본제국주의 군대나 이들이 무장시킨 관군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힘을 가지고도 의병들은 “성패를 들어 의리를 따지지 않는다(불가이성패논의리야/不可以成敗論義理也)”라는 성리학적 믿음으로 무장한다. 평민들은 부패한 관료들의 약탈로 민란(民亂)의 수준으로 분노하고 있었으니 의병투쟁에 나서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의병투쟁과 동학 농민전쟁을 거쳐 1900년대에서 1904년에 이르는 활빈당(活貧黨)의 출현도 그 의미를 따져보면 대단히 중요한 본질을 일깨운다. ‘활빈(活貧)’은 가난한 자들을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본래는 “짐승을 죽여 사람을 살리는 것이 인(仁) (살축이활인 불역불인호/殺畜以活人 不亦不仁乎)” 이라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야만을 끊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의 도리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하수인이자 폭군인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는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이스라엘의 갈릴리에서 히스기야라는 인물의 지도 아래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의병이었다. 물론 야만적으로 진압당하고 학살이 이어진다. 예수는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등장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도 이와 같은 비극의 현실을 넘어 새로운 희망을 태어나게 하려 한다.
이를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부른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한 것은 “혁명의 현실성”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모든 야만이 사라지고 불의가 더는 힘을 쓰지 못하며 평화와 우애가 넘치는 세상에 대한 갈망이 이 운동에 압축된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탄압과 헤롯왕가의 토벌작전은 갈릴리를 죽음과 고난의 땅으로 만들어버린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참극의 역사를 겪어낸 민중이었고 그런 까닭에 자신들을 새로운 미래로 이끌어 줄 누군가를 뜨겁게 기다렸다.
이때 홀연 출몰한 예수는 이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고 민중들은 환호했다. 이제 이런 기세를 몰아나가면 조만간 승리가 목전에 이를 것이요, 세상은 억압받은 이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확신에 처 있게 되었다. “가난한 자들이 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리라”라는 예수의 선언은 엄청난 기대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온유한 자”는 개인적 성품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만한 권력자들과 대비되는 민중의 삶과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권력에 취해 그악을 부리며 모든 것을 제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자들과 다른 존재의 모습이다. 이들은 그래서 “의를 위해 헌신하다가 핍박을 받는 자들”이며 하나님 나라에 마침내 속한다고 선포된다.
-동이 트는 시각, 우리가 그물을 던져야 할 곳은?
▲ 배 오른 편으로 그물을 던저 보지 않으시겠소?
그러나 이들의 하나님 나라 의병운동은 그 두목이 되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일거에 파산 상태가 되어버린다. 모두 도망가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 지낸다. 예수의 시신(屍身)이 안치된 곳에 찾아가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도 마음이 아파 용기를 내고 무덤으로 갔는데 무덤을 막아놓은 돌은 어느새 치워져 있고 시신조차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부활한 예수가 이들에게 나타나지만 그녀를 비롯해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예수를 동산지기인가 하고 착각하기조차 한다. “인식의 패러다임”이 달라지지 않으면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이미 죽었고 패배했고 사라졌다고 생각했으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힘은 여전히 살아있고 새길을 열고 있음을 모르면 남는 것은 절망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요한복음은 이들 제자들 두려움으로 움츠러든 현실을 보여준다. 더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된 제자들은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한다.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었으니 그 일에는 그래도 그나마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겠소.”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함께 한다.
하지만, 밤을 새고 동이 터오는데 단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다. 꼼짝없이 빈 배로 돌아올 판이다. 이때 한 낯선 사나이가 이들에게 말을 건다. 나중에 스승 예수인 것을 알아보지만 그 순간은 누군지 몰라본다. 인식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았으니 눈뜨고도 눈먼 자였던 것이다.
그가 “고기를 좀 잡았는가?” 라고 묻는다. 괴로운 질문이다. 이어 이 사나이는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말한다. 가당치 않다. 그 이야기를 듣는 쪽은 프로 어부인데다가 밤새도록 뭘 해보지 않았겠는가? 오른편은 물론이고 전후좌우를 막론하고 할 바를 다해 본 바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들은 그말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니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된다. 마침 동이 터 빈손으로 돌아갈 판이었다. 동트는 시간은 모두에게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시각이 온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이때 아직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던 이 사나이의 말대로 하지 않고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우리를 뭘로 보고 이러는가? 라고 했다면, 그건 바로 눈앞에 있는 가능성을 저버리고 낙담해 돌아가는 자가 되고 마는 일이다. 온유한 자가 새로운 미래를 차지한다.
이 기적 같은 일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물고기는 움직인다. 아까 그 자리에 없다고 지금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기운과 우리의 의지가 만나는 현장, 그곳이 바로 “배 오른편”이다. 이 비밀을 함께 공유하는 이들이 세상을 뒤집는다. 이미 동이 터오고 있어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 그때가 바로 새로운 사건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들 제자들이 기력을 다해 그물을 끌어올려 뭍에 오르자 예수가 이미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과 빵을 제자들에게 먹이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했던 성만찬 공동체가 이로써 회복이 된 것이다. 의병의 재집결이다. “부활”은 진작에 패했다고 여겼던 봉기의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썼으나 짐승의 야만으로 이 시대를 지배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 등장한 짐승들 가운데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이들과의 싸움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밤을 새우고 이리저리 애를 써보았으나 어느새 날이 밝아와 어찌하는 수가 없구나 하고 낙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배 오른편이 남아 있다. 그 비밀을 함께 공유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날 때 승리할 수 있다.
짐승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넘겨줄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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