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대통령의 ‘탈원전 오스트리치즘’
박중현 논설위원 입력 2021-06-10 03:00수정 2021-06-10 09:08
국내외서 도전받는 탈원전
‘현실 외면’ 오래갈 순 없어
박중현 논설위원
지난달 말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대표 간담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탈원전 정책 폐기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이라고 대통령이 자평한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원전 협력을 약속한 만큼 정책기조가 바뀔 가능성이 생겼다고 본 것이다. 대통령의 답은 짧고 드라이했다. “현황을 파악해보도록 하겠다.”
“할 말 없는 상황이 됐다”고 대통령이 직접 실패를 인정한 부동산정책을 빼고 큰 문제가 드러난 정책에 대해서도 현 정부는 사과하거나 물러선 적이 거의 없다. 대표적인 게 탈원전이다. 고리 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대통령이 ‘탈핵 시대’를 선포한 게 취임 다음 달인 2017년 6월이다. 당시 탈원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1368명이 사망했다”고 한 대통령의 발언은 완전한 착오여서 일본 정부의 항의를 받았다.
첫 단추부터 엉성하게 끼워진 탈원전 정책은 4년 내내 이어져 왔다. 7000억 원 들여 보수한 원전을 멈춰 세우고, 공사 중이던 원전사업을 중단시키고, 건설이 끝난 원전은 허가를 내주지 않는 일이 계속됐다.
하지만 4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반(反)원전주의자라도 탈원전이 정말 맞는 길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수많은 변수가 발생했다.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에 막대한 돈이 투입됐지만 한국 기후조건의 한계로 효율과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친환경 에너지 확대가 산림과 자연경관을 훼손하는 역설적 상황도 벌어졌다.
가장 큰 변화는 해외에서 시작됐다. 세계적 기후변화 대응의 목표가 ‘탈(脫)탄소’로 집중되면서 탄소배출이 없는 원전의 가치가 재조명된 것이다. 대다수 선진국들이 원전 건설 재개, 확대를 검토하고 있고, 큰 사고를 겪은 일본마저 원전 재가동에 시동을 걸고 있다. “탄소배출 없는 에너지원은 원전뿐”이라고 믿는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은 안전성이 높고, 폐기물을 현저히 줄이는 차세대소형원전(SMR)을 미국 내에 건설하는 계획을 내놨다. 여권에서도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SMR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양국이 원전사업 공동 참여를 포함해 해외 원전 시장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포함되는 일이 발생했다. 탄소중립 달성에 원전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본 조 바이든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1979년 스리마일 원전사고 이후 원전 건설을 중단한 미국으로선 세계 원전시장을 주도하는 러시아,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이란 파트너가 필요했던 것이다. 탈원전을 신념으로 삼아온 이들은 충격을 받았겠지만 에너지 전문가들은 드디어 정부의 탈원전 옹고집을 깰 기회가 왔다며 반겼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최근 열린 ‘P4G 서울 정상회의’는 현 정부가 자연스럽게 탈원전 정책을 수정할 최적의 기회였다. 하지만 대통령 발언이나 선언문에서 ‘원전’이란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탈원전 기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제는 거론조차 하기 싫은 모양이다.
위험을 만난 타조가 땅에 머리를 묻는다는 속설에서 나온 ‘오스트리치즘(ostrichism·현실 외면)’이란 말만큼 원전을 대하는 현 정부의 태도를 잘 나타내는 표현도 없을 것 같다.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사건에서 드러나듯 무리한 탈원전은 머잖아 철저히 재평가될 것이다. 눈 감고, 귀 막는 시간을 늘린다 해도 진실을 마주할 시점만 조금 늦춰질 뿐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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