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시상식 윤여정 보며 떠올린 보릿자루 대통령들
국제 무대 선 윤씨의
당당함, 자연스러움
국익을 위해
가장 윤여정 같아야 할
직업은 대통령
현실은 그 반대
입력 2021.04.29 00:00 | 수정 2021.04.29 00:00
필자는 영화를 몰라 미나리와 윤여정씨의 연기에 대해 얘기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윤씨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보여준 그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자신감, 당당함, 자연스러움, 여유 있고 관용적인 태도, 좌중을 리드하는 능력과 적절한 조크는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인이 이만큼 무대를 휘어잡고 이끈 경우가 있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겠다. 박태환이 수영에서,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윤성빈이 스켈레톤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일었다.
배우 윤여정(왼쪽)과 영화 ‘미나리’ 제작자 브래드 피트. 윤여정은 25일(현지시작) 열린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미스터 브래드 피트, 우리 영화 찍을 때는 어디 계셨나요?”라는 농담으로 또 한번 세계를 웃겼다. /AFP 연합뉴스
백인과 선진국 전유물로 여겨진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도 ‘우리가 이만큼 컸구나’ 하는 벅찬 느낌이 있었지만, 윤여정씨의 수상식 매너를 보면서는 우리도 이제 촌티를 벗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을 느꼈다. 윤씨가 산전수전 겪은 원숙한 배우이고 미국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의 경제 기적 이후 50년 세월이 축적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윤씨는 어렵고 화려한 영어를 쓰지도 않았다. 간단하면서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 그러나 작은 울림이 있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런 말과 태도는 한국의 일상 생활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 윤씨가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니 ‘내년 시상식 진행은 윤여정에게’ ‘딱딱한 시상식장에 뜻밖의 선물’이라는 미국 사회 반응이 나왔다. 국제 무대라는 것이 어디 별세계가 아니다. 기초적인 외국어 능력과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기질, 자신감만 있으면 얼마든지 리드할 수 있다.
우리 젊은이들은 이미 이런 소양을 다 갖추고 있다. 기업의 CEO나 간부급 상당수도 여기에 도달해 있다. 정작 정치인들이 가장 뒤떨어져 있다. 윤여정씨의 반의 반이라도 할 수 있는 정치인을 꼽으라면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한두 명 떠오를까 말까 하다. 그 정치인들 중에서도 특히 뒤진 사람들이 대통령이다. 한국은 외교로 먹고살아야 하는 나라인데,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 국제 무대와 아주 등진 것 같은 사람들이다. 시상식장 윤씨를 보면서 국제 무대에 선 우리 대통령들 모습이 떠오른 것은 나라를 위해 가장 윤여정 같아야 할 사람이 가장 ‘비(非)윤여정’적인 현실 때문이다.
2019년 6월 28일 오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 환영식에서 각국 정상들이 기념 촬영을 준비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이상하게도 한국에선 내향적, 내성적인 사람들이 대통령이 된다. 그 대표가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은둔형 외톨이 같았다. 누구에게 들으니 문 대통령은 최근 대부분 혼밥을 한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과거 청와대 비서실 시절 회의 때 무슨 의견을 내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친구들과 술자리에서도 말없이 혼자 있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내향적 인물이다. 내향적 성격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한다. 그러니 외국인과는 어떻겠나. 문 대통령은 취임 전 해외여행 경험 자체도 적었던 것 같다. 노무현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대통령이 되기까지 15년 가까운 기간에 언론 보도상으로 출국은 3번(뉴질랜드, 히말라야 2회)뿐이다. 노무현도 대통령이 되고 미국에 처음 가봤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외국에서 열리는 다자 정상회담을 앞두고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외국 정상들과 어울릴 수 없으니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TV 장면을 보면 문 대통령은 어색한 모습으로 빨리 행사가 끝나기만 기다리는 사람 같다. 거기에서 무슨 속 깊은 진짜 얘기가 오가겠나. 외교와 무역에 생존을 건 나라의 대통령이 이래도 되나.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함성득 한국대통령학연구소 이사장은 주간조선에서 “정신분석학 대가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으로 나뉜다고 했다”며 “열린 사회에선 지도층에 외향적인 사람이 많이 나오지만 실체보다 체면을 중시하고 위선이 많은 사회에선 내향적인 사람이 지도층에 많이 올라간다”고 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체면과 위선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명분과 겉치레를 중시한다. 외향적인 인물은 구악으로 비치며 대통령으로 적절치 않다는 정서가 있다. 현실 정치에 대한 혐오나 대통령을 선비나 지사(志士)처럼 여기는 경향도 내향적 인물 선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향적 인물은 개방적이어서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객관적인 여건이나 사실관계에 주목하는 반면, 내향적 인물은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생각하며 자신만의 세계에서 산다. 체질적으로 외교는 물론이고 정치와도 도저히 맞지 않는 이런 내향적 인물들이 어쩌다 대통령이 돼 국익이 걸린 국제 무대에 마지못해 나가는 일은 이제 끝나야 한다. 다자 정상회의에서 우리 대통령이 외국 정상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며 자리를 리드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우리나라의 규모는 그 정도가 됐다. 그런 자질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국민이 선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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