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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론

학자 최진석 “586, 신념 갇혀 공부 안 해…생각하는 능력 끊겨”

[중앙일보] 입력 2021.04.13 05:00

 

기자

김태호 기자

 

“(유공자 배우자와 자녀에게) 학자금을 주고 주택대출을 지원하는 건 민주화운동의 공(功)을 개인적으로 상속시키는 것”
 
도가(道家) 철학자 최진석(62) 서강대 명예교수는 ‘민주유공자예우법’을 이렇게 비판했다. 민주유공자예우법은 ‘유신반대투쟁이나 6월 항쟁 참가자도 5·18처럼 민주유공자로 인정하자’는 취지의 법안인데, 법안을 낸 의원 다수가 혜택 대상이 돼 논란을 빚었다. ‘운동권 셀프특혜’ 비판이 터져나오자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최 교수 고향은 전남 함평이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5·18도 겪었다. 그런 그가 ‘민주화 운동을 좀 내버려 두자’는 목소리를 계속 낸다. 지난해 말에도 최 교수는 ‘5·18역사왜곡처벌법’을 저격하는 시를 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도가 철학 핵심인 ‘무위’(無爲·봐야 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라)를 실천하는 걸까, 아니면 스타 철학자의 양심을 건 지독한 현실 비판일까. 지난 8일 그를 만났다. 
 

지난 8일 최진석(62)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수경PD

‘5·18역사왜곡처벌법’이나 ‘민주유공자예우법’ 문제는 뭘까.

노자는 도덕경에서 ‘공성이불거(功成以不居)’라고 했다. “어떤 공을 세우고 나서 그것을 차고 앉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생이불유(生而不有)’라고 했다. “네가 만들어 놓은 그것을 네 소유로 하지 말라”는 뜻이다. 둘 다 ‘성공의 기억에 갇혀있지 말라’는 말이다. 법안을 보면 5·18을 비롯해 ‘민주화’라는 국가적 유산을 개인적 유산으로 상속시키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민주화 정신을 훼손하고 그 가치를 떨어트리는 일이다.

 

법으로 만드는 게 어떤 욕심인가. 

‘자기 뜻대로 사회를 끌고 가겠다’라거나 ‘국민을 하나의 생각으로 묶겠다’는 욕심을 표현한 거다. 과거 역사교과서 논란 당시 ‘역사 해석을 국가가 독점하면 안 된다’며 국정교과서를 반대한 사람들이 ‘5·18왜곡처벌법’을 만들자고 주장하면 앞뒤가 안 맞는다. 다른 해석 자체를 막는 건 자기모순이다.

 

이런 법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국가보안법과 닮았다는 얘기가 있다.     

특정 이념에 갇힌 양극단의 공통점은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생각(사유)이 끊겼다는 점에 서로 닮아간다. 극단주의자들은 한번 주입된 신념을 확고한 지위로 믿고, 그 진리를 누가 더 과격하게 수행하느냐에 골몰한다. 그래서 이런 정치행위자들은 진영에 갇힌다. 이렇게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정해진 이념(신념)을 반복·확대·재생산만 하면 되니까. ‘생각’은 거추장스럽다.

 

“염치와 부끄러움의 문제”라는 지적도 있는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염치와 부끄러움이다. 이걸 모르는 것 역시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서다. 생각이 없으면 과거 행동과 말을 돌아보지 않는다. ‘586’ 집권 세력의 말 바꾸기, 거짓말도 결국 과거 신념에 갇혀서 생긴 문제다. 권력을 얻고 새로 공부를 안 하니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졌다.  

 

중앙DB

과거에 갇힌 권력이 문제일까.

질문하고 새로운 답을 얻는 ‘미래’가 중요한데,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과거에 갇혔다. 살면서 남의 생각만 받아들여서 이렇게 됐다. 다르게 표현해보면, 우리는 대답하는 삶을 살았다. 이미 (답이) 있는 ‘과거’를 다루는 게 습관이 됐다. 그렇게 과거를 한 점의 오차 없이 따지고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고 훈련해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생각으로는 해결될 ‘과거’는 없다. 과거 문제를 이렇게 풀려는 건, 현재 생각을 과거에 덧씌우려는 시도일 가능성이 크다.  

 

국민 다수가 ‘적폐청산’ 위해 문 대통령 뽑았다. 과거 돌아 볼 명분 있지 않나.  

아이러니하게 정치(政治)에서 가장 위험한 건 ‘바르게 한다(正)’는 말이다. 공자는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듣기엔 정의롭고 아름답지만 ‘바르게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정치는) 선·악으로 나뉜다. 심지어 국민도 악으로 규정한다. 얼마 전 그만 둔 대통령 비서실장이 다른 주장을 편 사람을 두고 “살인자”라고 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 ‘비정상의 정상화’ 이런 말도 아름답지만, 분열·폭력, 일방통행식 정치를 만든다. 언론·검찰 장악하는 게 적폐면 장악을 안 하면 되는데, 적폐청산한다면서 또 다른 장악을 시도한다.  

 

정권 바뀔 때마다 도돌이표다.  

박근혜 정부 때 일어난 문제가 문재인 정부에서 그대로 반복됐다. ‘이게 나라냐’ 했는데 ‘이건 나라냐’라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현재 비판 세력(야당)과 비판받는 세력(여당)의 수준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586 집권세력을 비판하는 집단은 부끄러움과 염치를 아는 훈련이 됐나. 사고수준이 월등히 높나. 민주와 자유의 감수성이 집권세력보다 높을까. 우리한테 필요한 건 상승과 도약인데 20년 가까이 좌우 왕복운동만 하다 세월을 보냈다.  

 

어쨌든 재보선에서 서울·부산은 야당을 선택했다.

(야당이) 서울·부산시장 선거에서 이겼다. 이 승리를 이끈 집단이 대한민국을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상으로 이끌 저력이 있을까. 그 저력이 없어서 권력을 뺏겼는데, 뺏긴 시간 동안 제대로 학습이 됐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한계가 많고 그걸 반성하지 않고 유지한다. 불행이다.

 

2011년 8월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패배해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연합뉴스

 

많은 사람이 이런 진영싸움에 신물 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진보와 보수는 없다. 이념과 이론으로 나누는 게 무의미해졌다. 낡은 진보와 낡은 보수만 있다. 각자 할 일을 상대방이 한다. 인권 문제는 주로 진보가 다뤘는데, 북한 인권문제는 보수가 다룬다. 진보는 젠더 문제를 일으킨다. 국가에 로열티(충성)가 철저해야 할 보수는 어떤가. 국방과 조세 문제에서 철저할까. 전혀 아니다. 보편적 가치들을 이렇게 정치 공학 안에서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진보와 보수 모두 품위를 잃었다.

 

도약을 위해 뭘 해야 할까.

건국·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진 직선적 발전은 김대중 전 대통령 때 끝났다고 본다. 이후 약 20년은 통치자 생각 따라 국가 자산을 이리저리 재배치했을 뿐이다. 그 사이 건국·산업화·민주화 세력은 권력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민주화 다음 아젠다를 못 정해서 벌어진 일이다. 민주화 세력이 도태되고, 새로 나타난 누군가가 다음 아젠다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이들이 운동권 시절 관념으로 새 세상을 움켜쥐고 있다.  

 

현실적인 대안은.

기존 정당이 아닌 제3세력의 등장. 이게 현실적으로 물론 어렵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권 교체 같은 정치 공학적인 문제에만 갇혀 생각할 순 없다. 그러면 우린 계속 박근혜와 문재인 대통령을 번갈아가며 선택할 수밖에 없다. 현실성이 없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안 할 일이 아니다.  

 

남은 임기 1년, 문 대통령은 변할까

살면서 최고 권력자가 잘못을 고친 걸 본 적이 없다. 남은 1년 동안 지금과 다른 행보를 하거나 잘못을 수정해 갈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김태호 기자 kim.taeho@joongang.co.kr
영상=정수경·조은재PD



[출처: 중앙일보] 철학자 최진석 “586, 신념 갇혀 공부 안 해…생각하는 능력 끊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