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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투기의 유혹…상속 받아도, 농사짓다 관둬도 농지 소유가능

예외조항에 구멍뚫린 농지법
합법적인 `가짜 농민`만 양산

"여주 한 마을 부재지주가 91%"
기획부동산 투기대상으로 전락

서류만 갖추면 농지매입 허용
실질 심사로 투기꾼 걸러내야

    • 전경운, 송민근 기자
    • 입력 : 2021.03.15 17:33:
    • ◆ 투기 유발하는 농지법 ◆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을 지낸 A씨가 2017년 퇴임 후 세종시 스마트국가산업단지 발표 전 인근 땅을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행복청장 재임 당시 직무상 얻은 정보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A씨가 매입한 용지를 포함한 세종시 봉암리 일대. [사진제공 = 연합뉴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가짜 농민 행세를 벌여 가며 농지를 취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농사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 원칙에도 불구하고 각종 예외 조항을 활용하면 사실상 아무나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농지법이 있다. 경자유전은 농사짓는 사람만 농지를 보유하게 하는 원칙이지만, 농지법을 곰곰이 뜯어 보면 사실상 거의 경작을 하지 않고도 대규모 농지 소유가 가능하다. 허술한 농지법이 농사를 위해 소유돼야 할 농지를 투기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15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농지법 6조 1항에는 `농지는 자기의 농업 경영에 이용하거나 이용할 자가 아니면 소유하지 못한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2항에는 비농업인의 농지 보유가 가능한 16가지 예외 조항이 나열돼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LH 직원들이 투기에 활용한 주말농장 및 체험영농 목적의 1000㎡ 규모 농지 보유 허용 조항이다. 이외에도 △상속받아 농지를 소유하는 경우 최대 1만㎡ △8년 이상 농사짓던 사람이 농사를 그만둔 경우 최대 1만㎡ △경사율이 15% 이상인 농지인 경우 최대 1500㎡ 등 다양하다. 예외 조항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차명 매입 등 방법은 많다.

예외에 속하는 대표적 사례가 작년에 논란이 컸던 박선호 전 국토부 차관의 과천 신도시 땅이다. 박 전 차관은 경기 과천시 과천동에 1259.5㎡ 규모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 강남 접근성이 높아 신규 택지 후보지 중에서도 `알짜`로 꼽힌다.

하지만 박 전 차관 토지는 농지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박 전 차관은 해당 용지를 1990년 4월에 증여받았는데, 1996년 농지 보유 등 조건을 명확히 하는 농지법 개정을 하면서 정부가 1996년 1월 1일 이후 취득한 농지에 대해서만 법을 적용하고 이전에 취득한 토지는 소급 적용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박 전 차관은 농사를 짓지 않았어도 합법적으로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구멍 뚫린 농지법에 의한 도를 넘는 비농업인의 농지 소유 실태는 정부 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가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경기와 경남 등 농지 8128필지를 조사한 결과, 비영농 부재지주의 농지가 전체 조사 면적 1064㏊ 중 324㏊(30.5%)에 달했다. 특히 상속 농지는 부재지주 소유 비율이 48.6%로, 상속받은 농지의 절반은 인근에 거주하며 경작하지 않는 사례였다. 농어촌특위 관계자는 "경기도 여주의 한 마을은 부재지주 비율이 91.1%에 달했다"며 "이 사례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농지를 자경하는 경우는 36.2%에 그쳤다"고 말했다.

농지가 외지인과 기획부동산의 투자 대상이 돼 농사를 짓지 않고 휴경이 장기화되는 농지가 늘어나면서 한국의 농업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은 큰 문제다. 외국은 농업산업 고도화로 대규모 경작지에 첨단 농기계를 투입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는데 한국은 농지가 투기판이 된 것이다. 실제 한국 농지 가격은 프랑스의 약 20배에 달하지만 농업 생산성은 미국 등 주요국은 물론 제조업 등 다른 산업보다 떨어진다.

전문가들은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농지법 전문가인 사동천 홍익대 법학과 교수는 "지금은 서류만 구비하면 농지 매입을 허용해 주는데, 도 단위나 전국 단위의 공신력 있는 농지거래위원회를 신설해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며 "실질적 심사를 한다면 투기꾼을 충분히 걸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농지 매매 차익도 있지만 공익직불금을 노리고 들어온 사람도 많은데, 직불금이 땅 주인이 아닌 실제 경작자에게 돌아가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 교수는 차명 투기에 대한 방지책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사 교수는 "명의 제공자가 원래 명의자에게 보유 재산을 반환하지 않아도 되는 `불법원인급여`를 농지법에도 적용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는 상속 등 불가피한 소유의 경우에도 농지를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도록 처분 규정을 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자유전 원칙이 확립되면 농업인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농촌 소멸 등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개선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석두 GS&J인스티튜트 연구위원은 "투기 세력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개발 이익뿐만 아니라 양도 차익 자체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경운 기자 / 송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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