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7번 바뀐 백마고지 전투 소개
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분단된 조국에서 발생된 전쟁을 통하여 한 치의 땅이라도 양보하지 아니하고 지켜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도록 목숨 바치어 지켜온 순국 용사들에 대한 감사함과 그 정신을 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우리들 모두가 새롭게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오늘의 국제무대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이 자국의 이익에 연연하여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고 영토전쟁보다 더 혹독한 경제전쟁 속에서 우리는 힘들게 버티어가고 있는데도 그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이 세면 지역갈등 계층갈등의 심화로 사회 통합과 거리가 먼 분열과 다툼의 연속현상이 우리 현실이 기에 한탄스럽다.
한국 전쟁 휴정 협정을 앞두고 당시에 주인이 7번 바뀐 백마고지 전투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의 사익에 연연하지 말고 먼저 나라를 사랑하여 내 자신을 희생 할 줄 아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
조국의 수호를 위하여 위대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미담사례로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겨진 그 당시 백마고지 전투를 젊은 세대에게 소개한다.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전투는1 9 5 2년 1 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1 9 5 2년도의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백마고지( 3 9 5고지) 전투는 1 9 5 2년 1 0월 6일부터 1 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제3 8군의 공격을 받고 1 0일 동안 혈전을 수행한끝에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 전투는6·2 5전쟁에서 국군의 전투능력과 투지를 유감없이 발휘한 결전 방어의 대표적인 전투로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열했다.
제9사단이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계속해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었다. 또 중부지역의 작전을 위해 필수적인주요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중부지역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한국군지휘관의 전투지휘능력과 한국군부대의 전투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게기가 되었다.
백마고지의 전략적 중요성
백마고지 전투는 1 9 5 2년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비교적 쉽게 타결될 것으로 판단했던 포로 협상이 타결점을 찾지 못하면서 다시 피를 흘리는 군사작전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비교적 전선이 안정적 지형 확보를 위한 고지쟁탈전이 또 다시 불을 뿜었다.
백마고지는 행정구역상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의 야산으로 철원읍 서북방 1 2㎞ 지점, 효성산(△5 9 6 ) 남쪽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해발 3 9 5 m의 고지였다. 이 일대는 6·2 5전쟁 전까지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1 9 5 1년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쯤부터 이 일대에서 군사적 접촉이 계속되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평범한 야산이 일약 관심을 모으는 핵심지역으로 부각됐다. 이 지역이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서남쪽 철원 꼭지점의 견부(肩部)를 구성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이 이 지역을 점령한다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 하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중부지역에 배치된 아군부대의 병참선인 3번 도로를 비롯한 많은 통로를 사용할 수 없었다.
1 9 5 1년 백마고지 확보 배경
3 9 5고지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은 1 9 5 1년 1 0월
1 7일 미 제3사단과 교대, 이 지역에 배치된 이후부터 방어태세를 재정비하고, 예상되는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던 차 1 9 5 1년 1 1월 초 휴전회담에서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게 되자, 이 일대를 아군에게 내주고 효성산 일대로 물러난 중공군 제4 2군(군단)이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1 9 5 1년의 전투는 판문점에서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회담기간 중인 1 1월 3일,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방어중인 국군 제2 9연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공격은 아군도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 중인 제2 9연대가 비교적 쉽게 격퇴했다. 중공군은 1 1월 5일 오후 9시를 기해 증강된 대대 규모로 또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제2 9연대 제1대대는 끝내 3 9 5고지 일대의 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 백마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사단에서는 제2 8연대의 2개 대대로 역습을 감행해 하루 만에 고지를 탈환, 전초전을 아군의 승리로 매듭지었다. 이후 이 일대의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돼 1 9 5 2년 전반기까지는 특별한 접촉이 없었다. 그동안 국군 제9사단은 제7대 사단장 박병권 준장이 도미 유학차 이임하고, 춘천전투의 영웅인 김종오 소장이 제8대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연대장들도 모두 교체돼 이 지역의 방어를 위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정면의 중공군도 부대를 교체했는데, 새로 투입된 부대는 6·2 5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마오쩌둥으로부터 만세군(萬歲軍)이라는 영웅 칭호를 얻은 제3 8군이었다. 이들은 투입되자마자 공세준비에 착수함으로써 조만간 새로운 공격이 있을 것임을 암시했다.
백마고지 전투 경과 및 결과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 9 5 2년 1 0월 6일 시작됐다. 이날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 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부터 국군 제9사단은 1 0월 1 5일까지 3개 사단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인해전술을 감행하는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폭이 2㎞밖에 안 되고 길이가3㎞ 남짓 되는 독립고지인 백마고지에 무려 9개 연대가 서로 얼 키고 설키는 대접전이 전개되었다.
제9사단은 1 0일간의 전투에서 3 9 5고지를 사이에 두고 1 2차례나 쟁탈전을 반복했다. 고지의 주인이 바뀐 것도 7차례나 됐지만 끝까지 고지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백마 3군신의 탄생
이 전투에서 제3 0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제1소대장 강승우 소위·오규봉 하사·안영권 하사 등은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공격정면에 지형 상 포병 및 공군 화력으로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적 특화점에 수류탄 다발을 안고 육탄 돌입하여 파괴함으로써 국군이 백마고지를 탈취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까지 백마고지 3군신(軍神)으로 불리고 있는 용사들이다.
백마고지와 백마부대의 유래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은 8 , 2 3 4명이 사살되고 추정살상 6 , 0 9 8명 과 포로 5 7명 등 1 4 , 0 0 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제9사단도 3 , 4 1 6명의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작전기간 중 피아간에 중공군이 5 5 , 0 0 0발, 아군이 2 1 9 , 9 5 4발의 포탄을 발사함으로써 총 2 7 4 , 9 5 4발이라는 막대한 양의 포격이 이 작은 고지에 집중됐다. 유엔군의 항공기도 7 5 4회나 출격해 폭격을 가함으로써 고지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극심한 폭격과 포격으로 고지의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 9 5고지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고, 사단을 백마(白馬)부대라고 부르게 됐다.
출처: www.imhc.mil.kr (국방부군사 편찬 연구소)
'시대의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민족은 이스라엘 '단 지파' 민족이다 (0) | 2015.10.22 |
---|---|
현충일 즈음하여 (0) | 2015.06.06 |
귀천하신 아버님의 백수(白壽)연을 차리다. (0) | 2015.04.28 |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자기모순 (0) | 2014.11.19 |
北대표단 “정치범 수용소 증거 있나”… (0) | 2014.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