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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무대

외환위기 vs 금융위기] 조순 전 경제부총리 인터뷰

외환위기 vs 금융위기] 조순 전 경제부총리 인터뷰

“10년 전엔 IMF에 기대 버텼지만 이젠 우리 스스로 살길 찾아내야”
‘자유방임’ 경제 무너져… 미국 좇다 방향 잃은 셈
급조된 정책 쏟아내지 말고 먼저 방향부터 정하자

지난 10월 28일 만난 조순(趙淳·80) 전 경제부총리는 “1997년 외환위기는 아시아란 지역의 문제였지만 지금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유방임’이란 패러다임이 무너진 것”이라며 “이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안착되기까지 세계 경제는 활력을 되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조 전 경제부총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금융경제학자로 서울대 교수,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한나라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보나. “외환위기 때만큼 심하지는 않더라도 위기를 피할 길은 없다. 위기가 미국에서 출발했지만 미국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국도 작년 8월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가 불거졌을 때까지만 해도 현재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 같다. 베어스턴스는 구제를 하고 리먼브러더스는 구제를 안 하는 등 미국 정책에 일관성이 없는 걸 보면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글로벌화된 세계 경제 속에서 어느 나라도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그 과정에서 한국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약점이 드러났고 환율 폭등으로 이어졌다.”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한국 경제의 약점은 무엇인가. “외국인이 지적하는 걸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외신이 악의적으로 보도한다고 하는데, 문제를 지적할 따름이다. 그들은 평소 한국 경제뿐 아니라 한국인의 행동, 태도, 사고를 보면서 불안감을 가지게 된 것을 표현할 뿐이다.


외국인이 지적하는 한국 경제의 약점은 빚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은행도 개인도 빚잔치를 하고 있다. 또 외국에서 단기 차입을 너무 많이 했다. 중소기업도 취약하고 임금이나 물가가 너무 높아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다. 교육도 문제다. 외국인이 볼 때 아이들을 외국에 보내 영어를 가르치는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또 경제정책이나 개인생활이나 마찬가지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남을 좇아가면서 살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우리 경제가 갈 방향을 잡고 국민을 설득해서 같이 끌고 나가지 못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와 비교하면. “정부는 외환위기 때나 지금이나 국민에게 ‘안심하라’고 하고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말한다.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하니 신뢰가 가질 않는다. 총체적으로 안심할 수 있어야 펀더멘털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달라진 점이라면 기업의 재무구조가 과거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과 외환보유고가 2300억달러 넘게 있다는 것이다. 또 전반적으로 국민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됐다는 점도 변했다.


문제는 이번엔 우리가 기댈 곳이 없어졌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란 거다. 당시엔 IMF가 있었고 워싱턴 컨센서스(미국식 신자유주의적 경제 전략)를 따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스스로 살길을 고안해서 찾아야 한다.”


앞으로 닥칠 실물위기의 파고는 얼마나 클것으로 예상하나. “미국에서 이미 해고 바람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도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면 실업이 늘어날 것이다. 이를 재정과 금융으로 구제하기엔 한계가 있다. 실물 부문의 자생력이 회복돼야 해결 가능하다.


문제는 상당히 오랜 시간 실물의 위기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국 대공황 때를 예를 들어보면 1929년 주식시장 붕괴로 ‘자유방임’의 패러다임도 무너졌으나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반한 ‘뉴딜’ 정책이 시작된 것은 1933년이었다. 그리고 나서 미국 경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난을 겪으면서다.


현재 위기도 ‘자유방임’의 패러다임이 무너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해 적용되기까지 오랜 기간 침체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내년 하반기에는 잘될 것이라는 전망은 믿기 어렵다. 내년에는 지금과 같은 공포 의식이 사라질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올 것으로 보는가. “국가(state)가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국가가 돈을 써서 자유시장경제를 구제해줬기 때문에 어떻게 돈이 쓰이는지 감시하고 계획을 세우게 될 것이다. 과거 경제 정책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국민생활, 사회복지, 의료보험 등을 보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가 완전한 국가주의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글로벌 주의라는 기본 정신은 살아남을 것이다. 다만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글로벌리즘(세계주의)은 살아남기 어려워질 것이다. 아마도 글로벌리즘과 국가주의 중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올 것이다.”


한국 정부가 경제의 리더십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정부가 ‘뒷북’ 정책을 낸다고 비판하는데 정부도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한국은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좇아왔지만 이번 위기로 방향을 잃었다. 정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계속 혼란 속에 있다면 한국이 살아갈 방법이 없다.


지금 세계적인 시스템이 바뀌고 있으므로 우리의 지력과 능력을 가지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미국은 더 이상 가르쳐줄 게 없다. 정부는 국민 경제의 방향 설정을 우선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급하다고 급조된 정책을 쏟아내서는 소용이 없다. 아무리 급해도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딘가는 있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게 아니다. 정치의 도리는 ‘친민(親民)’에 있다고 했다. 지도자가 시장도 지방도 돌아다니면서 국민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부의 진심을 국민들이 가슴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국가흥망은 필부유책(匹夫有責)이라고 했다. 일반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윤과 돈에만 목매는 분위기가 사회에 만연해서는 해법이 안 나온다. 아이들을 미국, 호주 등에 보내서 영어를 배우는 데 돈을 쓰는 빗나간 열정이 사회를 잡고 있는 한 민초들이 스스로 나서서 나라를 살리기는 어렵다.


미국에서는 최근 근검절약의 분위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불황’의 긍정적인 역할은 사회의 응집력을 모아준다는 것이다. ‘불황’은 개인이 돈벌이에 매달려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려주고 사회의 어두운 곳에까지 신경을 쓰게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당부를 한다면. “경제학자 케인스가 1930년대에 쓴 ‘우리 손자대의 경제 문제’란 에세이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2030년)에 인류는 경제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것이므로 경제학자는 자기 분야가 제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경제보다 중요한 정신, 예술, 사회봉사 등을 연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 나온다. 케인스는 미국 대공황이 오기 몇 년 전인 1925년 ‘자유방임의 종말’이란 책에서 자유방임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케인스는 ‘달관’이었다.


앞으로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더 많은 게 좋다(More is better)’는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사회에서 보다 정신적인 걸 중요시하는 사회로 바뀔 것이다. 수치만 달성하면 ‘이제 다 됐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이번 금융위기로 한계를 드러냈다. 기업 경영이나 국가 경제 정책도 수치와 목표 달성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게 될 테니 그에 맞춰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 ▒


/ 방현철 기자 banghc@chosun.com

입력 : 2008.11.04 15:46 / 수정 : 2008.11.09 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