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다, 키코가 폭탄인 줄…
은행 "환율 금방 내릴 것" 장점만 강조하며 실적 경쟁
기업 "대출 만기 연장해주겠다" "수수료 없다"에 솔깃
당국 "은행과 기업 간 사적 거래, 관여할 사안 아니다"
현재까지 4조~5조원(추정)의 피해를 중소기업들에 안겨준 키코(KIKO) 사태는 금융 무지(無知)의 결과라고 A씨는 단정했다. 환율이 오르면 피해가 무한정 늘어나게 돼 있는 키코는 월스트리트 금융공학이 개발한 복잡한 구조의 투기성 파생상품이다. 하지만 이처럼 위험한 '폭탄'인지를 누구도 모르고, 마치 안전한 상품인 것처럼 유통됐다는 것이다.
키코를 판 시중 은행 직원들도, 키코 가입 기업들도 한결같이 "이럴 줄 몰랐다"고 뒤늦게 가슴을 쳤다. 은행을 감독하는 금융 당국조차 "키코는 사전 승인을 받고 허용되는 금융 상품이 아니다"면서 키코의 위험성을 몰랐다는 사실을 간접 시인했다.
◆모르고 판 은행
외국계 B은행 본점의 파생상품 담당자는 "만약의 경우, 손실이 무한대로 커질 수 있다는 키코의 상품 구조를 은행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상품 판매 때 이를 기업들에게 설명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은행마다, 지점마다 실적 경쟁이 불붙으면서 키코의 위험은 쏙 가린 채 장점만을 앞세운 과장 마케팅이 이뤄졌다. C사 간부는 "거래 은행 지점장이나 직원들은 '다른 기업들은 키코에 가입해 환차손을 입지 않고 회사에 도움을 주는데, 이런 정보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핀잔까지 주면서 키코 가입을 권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와서 환율이 급등해 엄청난 손실이 나서 은행에 항의하자 해당 은행에서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말했다.
- ▲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키코 피해대책 관련 공청회에서 중소기업인들이‘키코 아웃’을 쓴 종이카드를 들고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르고 가입한 기업
키코에 가입한 수출 중소기업들도 파생상품에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수료가 없다"는 은행원의 판촉에 솔깃해, 수수료를 부담하고 환 헤지를 해야 하는 선물환 거래 대신 키코에 가입했다는 수출 기업들도 여럿 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으로 조목조목 따지지도 않고 은행에서 권하는 대로 덜컥 가입한 것이다.
첨단 파생상품인데도, 영업은 완전 재래식으로 이뤄졌다. D 중소기업은 은행에서 담보 없이 100억원의 신용대출을 받았다. 이 은행 지점장으로부터 "환 헤지에 도움되는 상품이 나왔는데, 신용 대출을 해준 대가로 우리 좀 도와달라"는 말에 키코에 가입했다가 낭패를 봤다. 계약 조건이나 상품 구조를 꼼꼼히 따지지 않았고 "믿을 만한 은행이 내놓는 상품이니 괜찮겠지"하는 마음으로 가입했다고 털어놓았다.
은행이 키코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대출금 만기를 연장해준다고 제안하는 바람에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가입한 기업도 있었다. 지난 2일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피해자 대책회의에서 한 참석자는 "은행들이 무슨 억하심정에 알짜 고객인 우량 수출 중소기업들을 이렇게 박살 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모르고 방치한 정부
통상 예금·펀드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되는 금융상품은 금융감독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키코 역시 사실상 다수의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은행 창구에서 일반 상품처럼 판매가 이뤄졌고, 기업들은 안전한 환 헤지 상품인줄 알고 가입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키코는 금융당국의 스크린(점검) 절차나 승인 없이 은행들이 외국 모델을 가져다 복사해 판매한 것으로 밝혀졌다. 키코는 은행과 기업들이 1대1로 계약을 맺는 사적(私的) 거래 상품이고, 장외 파생상품이어서 사전 승인 혹은 사후 보고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정부 내에서 키코 문제는 지난 4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은행들을 비판하면서 처음 제기했다. 강 장관은 국회 발언에서 "키코는 숨겨져 있던 문제였고 누구도 몰랐다"고도 했다.
하지만 환율 급등으로 키코 사태가 심각해진 이후에도, 금융위원회는 "감독 대상도 아니고, 은행과 기업 간 사적 거래여서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니다"고 방임해오다 중소기업들의 흑자 도산 사태가 우려되자 뒤늦게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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