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동기슭을 오르다 | ||||||||
굳이 남산이 아니어도 천년 고도 경주 일원엔 웅장한 왕릉과 사지, 석굴암과 궁터 등 수많은 문화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유독 남산이 끌리는 이유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남산에서 시작, 남산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쪽 식혜골 초입 나정(蘿井)은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지이자 배실기암골 가는 길엔 신라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포석정이 자리하고 있다. 남산의 골마다 등성이마다 있는 마애불과 석불들은 어떠한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의 완벽한 솜씨는 차가운 돌덩이에 생기를 불어넣고 화려한 석불의 조형미는 찬란했던 신라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남산은 비단 신라인의 산만도 아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는 주봉인 금오산 용정사가 원류다. 김시습이 머물렀던 용정사는 현재 터만 남아 있다. 이런 까닭에 남산은 신라를 보여주는 노천 박물관이며 신라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다. 남산에 도착했다. 경주는 수차례 찾은 적이 있지만 남산은 처음이다. 사전 예비지식도 없었다. 그저 ‘절터, 마애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골마다 산재해 있는 곳’ 정도였다. 그래서 급선무가 남산유적관련 지도를 구하는 거였다. 수소문 끝에 삼릉(서남산)입구에서 한 민간연구소가 작성한 ‘경주남산구경하기’ 지도 한 장을 구했다. 유적답사를 위한 추천코스만도 7곳. 그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삼릉~용장사지 코스에는 한 눈에 봐도 불상, 마애불, 암자 등이 빼곡히 표시돼 있다. 궁리 끝에 시간을 절약하기위해 택한 코스가 동남산 쪽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 뒷길을 돌아 찾은 2차선 탑골길이 첫 남산답사의 출발지가 됐다. ◆부처골 할매부처 ‘남산불곡석불좌상’이란 팻말을 따라 든 동남산 기슭. 자연석 바위를 90cm 파내고 감실을 만든 뒤 여래좌상을 안치했다. 머리엔 깊게 돋을새김을 한 두건이 귀까지 덮여 있고 얼굴은 약간 숙인 모습이다. 여느 절간 대웅전에 있을법한 화려하고 장엄한 불상과는 사뭇 다르다. 불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합장한 보살상이 더 어울린다. 부드러운 어깨곡선에 가지런히 앞에 모은 손은 옷 속에 감춰져 있다. 할매부처란 애칭에 수긍이 간다. 장창골 애기부처와 함께 7세기경 조성된 것이다. 추정컨대 당시는 삼국의 통일전쟁이 극심하던 때다. 고통 받던 민초들이 불국정토를 염원하며 이 남산 한 골짜기에 그들의 자화상을 부처로 형상화 한 것은 아닌지…. 그 때문에 더 친근감이 간다. ◆옥룡암과 탑골마애조상군 금오산 자락 옥룡암 초입 계곡의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암자의 소박한 대웅전 오르는 계단 길 애기단풍나무도 붉디붉다. 탑골마애조상군은 옥룡암 옆 높이 10m, 둘레 30m의 바위 4개면에 석가상, 여래상, 비천상, 승려상, 인왕상, 능수버들, 대나무 등 34개의 그림이 만다라적인 회화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특히 북쪽 바위 면엔 각 9층과 7층 목탑이 새겨져 있다. 아래엔 입을 벌린 수사자와 입을 다문 암사자가 탑을 떠받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신라시대 목탑은 남아있지 않다. 황룡사 9층목탑도 몽고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 때문에 탑골마애조상군에 새겨진 목탑은 신라 목탑 연구의 유일한 자료다. 뿜어져 나오는 솔향기가 싱그러운 마애조상군 뒤편 부처입상엔 청이끼가 내려 앉아 묵직한 바위만큼이나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보리사와 미륵골 석불좌상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진 보리사 범종각 단청은 깨끗하고 단아했다. 증축한 덕분인지 보리사는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겨난다. 절집 마당 한 켠. 미륵골 석불좌상은 현재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이며 불상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불국사 다보탑을 깍은 장인의 솜씨와 비견될 정도로 정교하다. 만져보면 분명 돌이거니와 그 섬세한 표현력은 온갖 필설을 거부할 것 같다. 연꽃 팔각좌대 위에서 반쯤 눈을 감고 선정에 든 듯한 얼굴에는 자비가 넘치고 등 뒤 배 모양을 닮은 광배엔 작은 불상과 불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광배 뒤엔 모든 질병을 구제하는 약사여래불이 선각돼 있다. 보리사 아래 주차장 옆 숲에 난 자드락길을 들면 또 하나의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찾는 없는 골짜기에 홀로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깊은 선정에라도 든 걸까. 이끼 무성한 바위를 등지고 천년 서라벌의 찬란했던 한 때를 꿈처럼 간직하고 있다. ◆주인 없는 석조감실과 헌강왕릉 탑골길 중간 즈음에 있는 화랑교육원 안에는 높이 2.5m의 초라한 석조감실이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지대석 삼아 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 석조감실은 좌불이 없다. 화랑의 집 앞 뜰에 보일 듯 말 듯 그냥 자리하고 있다. 지도에 표시가 없다면 그냥 지나쳤을 석조감실은 화랑 교육원을 두 번이나 헤매고 나서야 찾을 수 있었다. 화랑 교육원 옆 헌강왕릉(49대?875~886)은 원형 봉토분에 아래로 4단으로 쌓은 둘레 기단을 하고 있다. 입구에 도열한 소나무들의 형태가 특히 인상적이다. 기이한 기하학적인 선을 그리듯 가지를 뻗은 소나무들이 처용무를 처음 시작하게 됐고 거리마다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통일신라시대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왕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 ◆왕의 목숨을 구한 까마귀와 서출지 궁 밖 나들이를 하던 소지왕(479~500)에게 쥐가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말한다. 이에 왕은 까마귀를 따라 서출지에 이르러, 한 노인에게서 “궁 안 거문고 갑을 쏘시오. 쏘면 두 사람이 죽지만 쏘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소”라는 말을 듣는다. 왕이 궁에 가서 거문고 갑에 화살을 쏘자 갑 속에 있던 궁주와 승려가 죽음을 당한다. 만약 쏘지 않았다면 죽게 되는 한 사람은 바로 왕 자신이 될 뻔 했다. 통일전 옆 자그마한 서출지는 이 때부터 정월 보름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 풍속의 근원지가 된다. ◆남산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 보다 서출지에서 남산 전망대인 금오정(金鰲亭)을 가려면 남산의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더듬어 가야 한다. 천년 고도의 언덕답게 남산은 그리 녹록하진 않았다. 땅 거죽으로 드러난 소나무 뿌리 하나하나에 옛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나고 보이는 바위마다 청이끼가 푸르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까칠하고 거친 느낌보다는 부드러운 옥을 닮아 있다. 길은 호젓하다. 40여분 등산에 등줄기에서 땀이 배어나올 무렵 금오정이 나타났다. 너른 바위 봉우리에 세워진 남산의 전망대 아래로 너른 경주 벌판이 한 눈에 든다. 발 아래로 늦은 단풍이 봉우리를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금오정에서 사자봉가는 산길은 남산관광일주도로로 변해 있었다. 비포장이지만 지프차가 다닐 넓이다.
사자봉 팔각정터는 8개의 기둥 밑둥과 초석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동남산 진면목이 드러난다. 가까운 산등성이가 눈앞에서 한 번 일렁거리자 그 뒤를 이어 많은 남산의 등성이과 골짜기들이 덩달아 출렁거린다. 팔각정터에서 직각으로 내려가면 지바위골이다. 그 아래에 남산부석이 자리한다. 남산부석은 작은 바위 위에 커다란 바위가 얹혀 있는 꼴로 동남산 등반의 표석역할을 한다. 이어 큰지바위에 다다르자 눈을 지그시 감은 마애불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 옆 바위엔 음각이 희미한 채 미소를 머금고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해 대고 있는 마애불이 돌아 앉아 있다. 그 앞엔 낙엽이 공양불단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 큰지바위에 새긴 마애불 아래 자연석을 기단삼아 단출하게 빚어진 3층 석탑도 있다. 남산은 등성이마다 석탑이요 골마다 부처라던데. 서방정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의 삶과 희망이 남산에 오롯하다. ▨경주남산문화유적답사안내=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설, 추석 연휴 제외). 오전 09:30~15:00(6시간). 선착순 50명. 접수:경주남산연구소. 인터넷 접수 www.kjnamsan.org. 문의:054)742-1942 ▩남산=금오산(468m)과 고위산(494.6m)을 주봉으로 도당산과 양산을 통틀어 남산이라고 한다. 동서 4km, 남북 8km에 걸쳐져 있으며 40여 산등성이와 골짜기마다 수많은 불교유적과 전설, 설화가 깃들여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절터가 120여개가 넘으며 57개의 석불과 64개 석탑이 있다.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
- 2007년 11월 22일 - |
'아름다운 여행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해의 아름다운 섬 지심도 (0) | 2007.12.15 |
---|---|
세종로 ‘한국의 샹젤리제’로 바뀐다 (0) | 2007.12.14 |
진도 그 섬에 가다 (0) | 2007.12.12 |
해돋이-해넘이 볼만한 곳 4곳 (0) | 2007.11.29 |
메밀꽃의 고장 봉평 (0) | 2007.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