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녕 군 연 혁
1. 선사 및 가야시대
장마면 유리의 지석묘(고인돌)와 창녕읍, 계성면, 영산면 등지 고분군
가야시대 - 불사국(不斯國), 비화가야(非火伽倻)
신라에 병합 - 비자화군(比自火郡),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子伐)
2. 신라 시대
신라진흥왕 16년(555) - 하주(下州)의 치소(治所) 정(停) 동왕 26년(565) 폐지
경덕왕 16년(757) - 화왕군(火王郡), 영산현 - 서화현(西火縣) - 상약현(尙藥縣) 밀양군의 현(縣)으로 되었다. 경덕왕 16년 - 계성현 화왕군(火王郡)의 영현(領縣)
3. 고려 시대
태조 23년(940) 3월 창녕현(昌寧縣), 현종 - 밀성군, 明宗 2年(1172년) - 감무(監務)설치 영산 - 밀성군에 소속, 원종 15년(1274) 감무설치, 계성 - 현종 9년(1018)에 밀성군, 공민왕 15년(1366) - 영산현, 공양왕 2년(1390) - 밀성군
4. 조선 시대
태조 3년(1394) - 창녕과 영산에 현감을 둠. 인조 9년(1631) - 창녕현은 지도(至道)의 역변(逆變)으로 인하여 현이 혁파. 영산현에 합속 인조 15년(1637)에 복현(復縣). 고종 32년(1895) 5월 - 8도제를 폐지. 23부제의 실시 대구부(大邱府)에 합속 1896년 8월 4일 13도제(道制)가 실시 창녕·영산군 경상남도에 합속
5.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
1914년 4월 1일 부(府), 군(郡), 면(面) 폐지 분합 - 영산군 길곡면 사촌(射村)·금곡리 일부(지금의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일대) 함안군에 편입, 창녕군과 합병
고종 34년(1897) - 행정의 말단조직인 방(坊)이 면(面)으로 개칭. 1910년 9월 면제(面制) 시행
1914년 2개 군의 합병으로 창녕, 고암, 성산, 대합, 이방, 대지, 유어, 창락, 영산, 계성, 남곡, 부곡, 길곡, 도천, 장마면 등 15개 면으로 개편
1931년 3월 1일 남곡면을 남지면으로 개명, 1955년 7월 1일 창락면이 창녕면에 편입. 14개 면
1960년 1월 1일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 1963년 1월 1일 남지면이 읍으로 승격 본군은 2읍 12면, 1971년 2월 13일 창녕군조례 제 175호로 남지읍 고곡출장소를 설치
1998년 9월 10일 행정조직 개편으로 고곡출장소가 폐지. 139개 법정리 286개의 행정리
삼한시대에 창녕에는‘불사국’이 있었다. |
|
[창녕신문 2007-06-28 오전 11:33:00] |
|
|
|
|
|
창녕지방은 비봉리유적지가 말해 주고 있드시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이 인류가 정착하여 살아온 지역으로 밝혀졌으며, 군내에 산재해 있는 많은 고인돌들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이미 부족사회를 이룰만치 문명이 발달하였었다. 고인돌이 많이 분포된 지역이 삼한사회가 계승된 지역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이어 삼한시대에 창녕지방에 고대국가의 형성단계인 불사국이 있었음은 필연적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녕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김영철 소장은 최근에 '창녕의 옛 지명에 대한 고찰(上)' 이란 논고(비사벌 매가진 2007. 1.31일자)에서 “불사국은 창녕의 옛지명이 될수 없다”고 새로운 주장을 하여 창녕역사를 또 다시 혼란에 빠뜨릴까 우려된다. 김영철 소장은 그 이유를 단순히 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창녕으로 비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명(國名)이나 지명(地名)을 비정하는데는 음사상 유사성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유물이나 유적 그리고 역사적 환경과 지리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 지역만이 비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천관우 사학자). 즉 창녕지역은 비봉리 유적지에서 밝혀졌드시 8000년전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생활했을 정도로 인류가 오래전부터 정착하여 살아 온 지역이라는 점, 청동기시대부터 고대국가의 전단계인 부족사회를 형성했음을 말해주는 고인돌들이 군내에 산재해 있다는 점, 특히 장마 유리고인돌은 국내에서도 가장 큰 고인돌(300톤)로 이같은 웅장한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강력한 부족사회가 형성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점, 낙동강을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가야문명 발생지인 김해, 고령, 함안, 등지 못지않게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생산력이 높았다는 점(권학수 충북대) 등을 충분히 검토하여 결정하는 것임을 이미 역사학자들이 밝힌바 있다. 이를테면 “경상도에 존재하였던 변진 24국을 두고 현재 경상남북도에 있는 43개 군에 대해 역사적인 여러 요소들을 고증한 결과 창녕이 아니고는 다른 지역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비정한 것이다”라고 천관우(사학자)는 밝혔다. 또한 김영철 소장은 ‘비사벌’만이 창녕의 유일한 옛지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명이나 국명이란 역사적 산물로 시대상황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한 지명만이 유일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명을 두고 보더라도 고조선시대에는 단군조선 또는 위만조선이란 국명이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있었고, 이어 고려, 조선, 그리고 현재는 대한민국인 것이다. 이를 두고 어느 한 가지 국명만이 유일한 우리나라 옛 국명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창녕도 삼한시대에는 불사국으로 가야시대에는 비화국, 비자발(본)로 불리다가 진흥왕때 가야국이 멸망하면서 국명(國名)을 잃고 지명(地名)인 비자화, 비사벌로 불리었고 그 이후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경덕왕때 화왕군으로 변천하여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창녕으로 불리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하산(夏山) 또는 창산(昌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가 창녕을 나타내는 국명 또는 지명이므로 시대와 경우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창녕의 역사와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창녕의 불사국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선석열 (부산대)교수는‘창녕의 불사국은 진한계이므로 논란이 되었으나 비화가야가 되었고 변한계의 감로국은 신라영역이 되었다. 변한과 진한이 잡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창녕지역의 불사국은 엄연히 존재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백승옥 (부산대)교수도“창녕지방에서 보이는 고고학적인 증거와 창녕지역의 불사국을 삼한시대 창녕지역에 있었던 소국으로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형기(사학자)박사도 “창녕지역에 형성된 소국을 불사국으로 비정한다.” 고 하였으며 ‘국사대사전’에서도 불사국은 지금의 창녕이라고 기록되여있다. 이와같이 삼한시대에 불사국이 창녕에 있었던 나라 이름이라는데는 역사학자들간에 이견이 없으며, 창녕군내에서도 향토역사의 선구자인 노대석교육장이 발행한 빛벌문화(1954 및 1970)에서는“창녕은 불사국의 소재지로서 지리적으로나 문헌상으로나 유물 유적상으로 보아 부족국가 시대의 유력한 세력 중심지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였고 창녕군지명사(김형곤, 허규일, 김현우 공저)에서도 “불사국은 역사학자들의 위치비정을 보면 창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설이 없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노두환 문화원장 재직시 발행한 내고장전통가꾸기(1981년)와 창녕군지(1984년도)에서도 “창녕이 불사국이라는데에 역사학자들간에 이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창녕군청의 견해를 보면 “<우리고장의 문화 유적> <관광창녕>의 책자에서도 창녕현은 불사국 또는 비화가야로 존립해 오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했으며 군수가 도지사에게 보고한 <군정보고서>에도 비화가야로 기록하고 있다” 라고 전 창녕읍장 성낙원씨는‘창녕 고대지명을 공론화해야 한다’라는 논고에서 밝혔었다. 이와같이 김영철 소장은 역사학자들의 견해와 이미 정립한 창녕역사를 부정하고 군청의 문화시책에도 반하는 주장을 하여 군민을 혼란속으로 가중시키고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납득하기 어려운 자구해석만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역사학계가 인정할 수 있는 학술적 근거를 밝혀야 할 것이며, 아울러 김영철소장은 창녕역사를 애써 부정함으로써 창녕에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지도 함께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창녕에 있었던 불사국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삼국지> 한조 동이전에 의하면 대국이 4-5천가 소국이 6-7백가라고 했으니 불사국은 변진 24국중 두 번째로 나오는 점으로 보아 대국에 속했을 것으로 4-5천가(家)의 국가로 생각된다. 4-5천가라 하면 1가에 5명씩 잡아보면 2-3만명 규모가 될 것이다. 이런 규모를 가지고 어떻게 국가라 할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는 인구가 적었던 점과 국가란 다른 지역이나 국가로부터 주권을 간섭받는지 유무에 있다 할 것이므로 당시의 창녕지방에 있었던 불사국은 다른 어떤 외부세력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며 존속하였다면 국가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모나코는 인구 3만명으로 바티칸은 인구 1000명으로 나우루는 인구 1만명으로도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일 것이다. 삼한시대의 유적지로는 창녕읍 송현동 솔터, 영산면 태자봉 솔터, 계성면 솔터 등은 소도가 있었던 지역으로 삼한시대부터 그 유풍이 전해져 오는 곳이다. 삼한시대 종교로는 천군이라 부르는 제사장이 각 국읍마다 1명씩 있어서 소도라 부르는 제사지역을 관할하는데 소도는 신성한 지역으로서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고 범죄인이 이곳으로 도피하면 그를 돌려 보내지도 않았고 또 그를 잡아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이홍식 고려대). 이들 삼한시대 유적들 중에서 송현동 솔터 유적지는 2001년경 도로개설시에 지역주민과 문화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로에 편입시켜버려 수천년 내려오던 창녕의 정기가 서린 신성한 유적지를 파괴한 것은 역사인식이 부족한 행정상의 과오라 할 것이다. 파란만장한 역사속에 자주적으로 고대국가를 이룩했던 굳굳한 창녕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상징물로써 송현동 솔터는 마땅이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창녕신문 글이철환논설위원
창녕의 가야역사는 삼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2006 오전 11:09:00] |
|
|
|
|
|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창녕 역사> 기행은 어느듯 가야시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면 가야시대 역사기행에 들어가기 앞서 지금까지 살펴 본 바를 간략히 되돌아 보기로 하겠다. 그동안 우리는 계성고분군 발굴시 발굴단장을 담당했던 정중환(동아대)교수의 서정적인 표현을 빌려 최초에 인류가 창녕지방에 찾아든 과정을 살펴보았다.“저 먼 몽만지방과 화북지방에서 구석기시대를 지낸 ‘우랄 알타이’계통의 퉁구스족들이 혹은 대륙의 풍운에 어쩔 수 없이, 혹은 수초를 따라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동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혹은 요동반도를 횡단하고 혹은 북만주의 한파를 헤치면서 혹은 압록강을 건너고 혹은 장백산을 넘어서 천연의 낙토 한반도에 행복의 보금자리를 찾아 흘러들어왔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흘러 들어온 우리의 선조들은 살기 좋은 창녕지방에도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당시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가 바로 창녕 비봉리 유적지인 것이다. 이 유적지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8000년전에는 도토리를 식량으로 하였고 돌로 화살촉을 만들어 사냥을 하였으며 나무 쪽배를 만들어 타고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등을 체취하여 생활했었다. 그리고 짚으로 삼태기를 짜서 사용할 정도였으며 각종 토기를 만들어 그릇으로 사용하였었다. 이렇게 우리의 선조들은 움집 귀틀집을 지어서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견디면서 기나긴 석기시대를 보냈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는 군내에 산재해 있는 많은 고인돌들로 보아 창녕지역은 한반도 어느 지역 못지 않게 문명이 일찍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청동기시대 유적지인 장마 유리 고인돌은 그 웅장함에 있어 국내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이런 거대한 고인돌을 북두칠성형으로 7개나 산 구릉위에 축조하려면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이는 부족국가적인 체제를 갖출 만큼 인구가 많이 살지 아니하고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다. 삼한시대에 들어와서는 철기문화의 보급으로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벼농사가 시행되고 농업 생산성이 높아져 인구가 더욱 증가 되면서 불사국이라는 고대국가를 만들게 되었다. 삼한시대의 유적지로는 창녕읍 송현동 솔터, 영산 태자봉 솔터, 계성면 솔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창녕지역은 일찍부터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고대국가를 건설할 만큼 살기 좋은 자연환경을 갖추었었다. 그러면 창녕의 가야 역사는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노중국(계명대)교수는 “변한(삼한)역사와 가야역사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라 연속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변한역사 속에서 가야사가 태동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김정학(서울대)교수도 “ 가야의 시동기인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경까지는 청동기문화와 초기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부족국가시대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병도 박사는 6가야 연맹설에 입각하여 “김해의 가락국은 기원전 2세기 이전에 부족국가로 성립했고 그후 어느 때부터인지 변진의 일부 소국 가운데서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가 연합한 6가야연맹이 먼저 생겼다.”라고 하였고, 이기동(경북대)교수는 “변한 12국이 존재했던 성읍국가 단계부터”라고 하였다. 백승옥(부산대)교수는 “삼한소국과 가야제국은 연속선상에 있고 삼한 소국의 형성과 성장 발전의 결과가 곧 가야제국이기 때문에 외형적 명칭의 변화만으로 분류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까지로 한다.”고 하였다. 김태식(홍익대)교수는 “문헌사료로만 볼 때 가야는 서기 42년에 건국하여 562년까지 존속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다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하여 생각할 때 가야역사의 시작은 기원전 1세기 초까지 올려다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영식(인제대)교수는 “가야 제국은 기원 전후부터 약 600년 동안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함께 나란히 독립성을 유지하였다.”라고 하였다. 윤효석(한성대)교수도 “가야의 시동기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경으로 부족국가시대이고 가야의 성립시기는 대략 기원 후 1세기경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국내의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가야역사의 연원은 삼한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김태식교수는 가야역사를 700년이라고 하였고 이영식교수는 600년이라고도 하였다. 가야 역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이라 할 수 있는 <가락국기>에서는 서기 42년에 수로왕이 금관가야를 설립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가락국기>데로 라도 500년이 넘는다, 하지만 <가락국기>는 가야역사가 시작되고 1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후인 고려시대에 기록한 역사서로 그 시기를 신빙하기가 어렵다 할 것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학자들이 추정한 것이 보다 옳을 것이다. 우리 창녕지역도 일찍이 삼한시대에 불사국을 건설한 지역으로 불사국과 창녕의 가야국은 단절의 역사가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불사국은 청동기시대에 고인돌을 축조했던 부족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사국을 부정하는 것은 가야 역사를 부정하기 위함일 것이다. 삼한시대 불사국 이후 신라 진흥왕의 군대가 침공해와 창녕의 가야국을 점령하기 전까지 700년간이 창녕의 가야 역사시대 이다. 이 시기야 말로 자주적으로 굳굳하게 고대국가를 건설하였던 창녕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고 자랑스러운 시기인 것이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를 우리는 묻어두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할 것이다.
가야와 신라는 역사 원류가 다르다.
[창녕신문 2007-07-24 오후 2:12:00] |
|
앞에서 창녕의 가야역사는 삼한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삼한시대는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라 할 것이다. 당시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삼국지>에 보면 변진 24국의 국명들이 나온다. 그들 나라중 불사국은 창녕지역에 있었던 나라이고 사로국은 경주지방에 있었던 삼한시대의 신라이다. 그러면 삼한시대부터 창녕역사와 신라역사가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인류 문명의 발상은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이를테면 중국문명은 황하강유역에서부터 이루어졌으며 인도문명은 간지스강과 인더스강 유역에서, 에집트문명은 나일강유역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고대의 문명의 발상, 발전은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은은 동서양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역사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압록강 유역에서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에서 고조선이, 한강유역에서 백제가, 낙동강유역에서 가야가, 그리고 형산강유역에서 신라가 태동하여 발전하여 나간 것이다.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창녕 비봉리 유적지도 낙동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야국들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 양안에 자리잡고 발전해 갔다면 신라은 형상강유역인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경북 동북부지방으로 발전해 나갔다. 김태식(홍익대)교수는 “이집트 문화를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가야문화를 낙동강의 선물이라고도 한다.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가야소국들이 낙동강 수로 및 그 연변의 분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사회에서는 주로 뱃길을 이용하여 서로 인접 지역간에 왕래와 교역을 하였다. 강을 통해 해안에서 생산되는 생선과 소금 등을 싣고 내륙으로 올라와 곡물 등과 물물교환하는 일은 최근까지도 이어졌었다. 당시의 낙동강 수로는 오늘날의 경부고속도로처럼 각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망 역할을 하였다. 2000년전 당시의 낙동강을 상상해 보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김해평야가 모두 바다였었다는 점이나, 김해 칠산은 19세기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바다속의 섬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그리고 2000년동안 상류의 토사가 흘러내려 오늘날 처럼 강바닥이 높아졌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당시의 낙동강은 지금보다 훨씬 수심이 깊었을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까지 만해도 왜군들의 함선들이 낙동강을 따라 진격해 올라갔으며(조승희 사학자), 일본이 내조하여 상경하는 교통왕래도 처음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조령을 넘어 충주에 이르고 다시 한강을 내려가서 한성에 이르는 길을 이용하였었다(이홍식 고려대)는 사실을 볼 때 당시의 낙동강 수심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특히 낙동강은 배를 이용한 수상운송이 발달하여 고려시대와 이조시대를 통하여 정부에 공납하는 세미(稅米)의 운송로 역할을 하였다. 우리 창녕지방도 앞에서 살펴보았드시 낙동강을 따라 배들의 교통로인 임해진(길곡), 웃개(남지), 마수원(유어), 현창(이방)나루들이 발달하였으며 유어면 진창은 정부의 세미를 저장 운반하는 장소이 었었고, 유어면 선소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조선소가 있어 배를 만들던 곳으로 정부의 관리들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형기 (사학자)박사는 “창녕지방은 낙동강이 19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수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과 그 지류인 남강과 황강이 군계와 접하고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였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한편 “경주지역은 대부분이 구릉지대로 형상강을 따라 형성된 비교적 평야지대에 자리잡은 경주세력의 입지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경주를 비롯한 동부지역은 동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형상강을 제외하면 별다른 하천이 생성되지 못해 충적지대가 발달하지 못하여 대부분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들 동부지역의 대부분은 태백산맥의 끝자락으로 소백산맥 지역 보다는 산의 발달이 덜하고 해발 고도도 낮은 편이다”라고 권학수(충북대)교수는 말하였다. 형산강은 경주 인내산에서 발원하여 경주분지를 지나 안강에서 기계천과 합류하여 포항 영일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길이 60여 km에 불과한 작은 강이다. 형산강유역에는 경주평야와 안강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충적평야로 경북의 유수한 곡창지대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길이 500여 km인 낙동강과는 강의 크기나 유역평야의 규모면에서 낙동강의 한 지류에 불과할 정도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형상강유역인 경주와 낙동강유역인 창녕사이에는 두줄기의 태산준령이 가로놓여 있다. 하나는 청도 운문산과 언양 가지산, 밀양 천황봉, 양산 간헐산으로 이어지는 영남 알프스라고 불리우는 산맥과 또 한줄기는 대구 최정산, 현풍 비슬산, 창녕 화왕산, 영산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태산 준령이 그것이다.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여 배를 이용한 수상교통에 의존하였던 당시로서는 이와같이 두 겹의 태산준령으로 가로 막힌 두 지방 사이에 왕래가 이루어 지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서로 격리된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초기신라)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창녕지역의 가야국과는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삼한시대 이래로 수백년간을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발전해 갔으므로 창녕의 가야역사와 경주의 신라역사와는 출발부터 원류가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녕문화원이 가야역사를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하는 것 조차 탄압하는 것은 그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글 이철환-논설위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