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김일성의 귀국과 평양시 민중 대회
1945년 9월 초, 하바롭스크 주둔 소련 극동군 제2방면군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과 군사위원 시킨 상장은 제88보병여단(88여단) 제1대대장 진지첸 대위를 호출했다. 진지첸은 김일성의 중국 발음 ‘진즈어청’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이름이었다. 진지첸은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8월 말 푸르카예프 대장에게 ‘붉은 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88여단은 1942년 대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스탈린의 지시로 창설된 다민족 혼성 부대였다. 부대원의 상당수는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수년간 만주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만주국 군대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으로 부대가 궤멸 상태에 빠지자, 소련으로 투항한 중국인과 조선인 빨치산 출신이었다.
“대위 진지첸 명을 받고 왔습니다.” 푸르카예프 사령관은 진지첸에게 자리를 권한 후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은 조선인인가?” “예.” “당원인가?” “예, 그렇습니다.”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북한에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세계 혁명 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킨 상장은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소”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다양한 경로로 북한 지도자 후보를 찾았다. 김일성 외에도 조만식, 박헌영 등이 후보로 검토되었고 허가이, 유성철 등 소련 국적 고려인도 검토 대상에 올랐다. 소련 극동군은 김일성 대위를 최종 후보로 모스크바에 추천했고, 스탈린이 이를 승인해 김일성은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88여단 정치부 교관 아다모프 중좌는 훗날 진지첸 대위가 북한 지도자로 선택된 것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지 그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자료로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코바렌코 소좌는 9월 초 스탈린이 김일성을 직접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했다고 증언했다. 코바렌코의 증언에 따르면, 군용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간 김일성은 스탈린의 별장에서 스탈린과 4시간 동안 면담했다. 김일성과의 대화에 만족한 스탈린은 즉석에서 “이 사람이 좋다. 앞으로 열심히 해서 북조선을 잘 이끌어가라.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했다.
9월 18일 밤, 김일성과 88여단 조선인(소련 국적 고려인 포함) 80여 명은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소련군 수송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출항해 이튿날 오전 원산항에 입항했다. 푸가초프호는 1943년 미국 오리건에서 건조돼 미국 무기대여법에 근거해 소련에 양도된 3000톤급 트롤선이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선박” 푸가초프호는 ‘개선호’로 이름을 바꿔 지금도 원산항에 보존돼 있다.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원산에 도착한 김일성은 평양시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와 동행한 88여단 조선인들도 대부분 지방 위수사령부의 부책임자로 중용돼 훗날 ‘만주파’ ‘88여단파’ ‘빨치산파’ 등으로 불리며 북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김일성은 9월 22일 열차 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정사령관 치스차코프 상장이 원산까지 마중을 나왔으며, 그 과정에서 열차 충돌 사고가 일어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원산으로 오기로 한 치스차코프가 약속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 오지 않자, 김일성을 태운 열차가 출발했다. 그때 치스차코프를 태운 열차가 맞은편에서 달려와 두 열차 사이에 경미한 충돌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열차는 원산에서 전시되다가 현재는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장군이 대위를 마중 나가는 일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며 북한 역사에 기록된 이 일화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평양에 도착한 김일성은 소련 군복에 대위 계급장을 달고 평양 주둔 제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을 방문했다. 88여단 대대장이라고 관등성명을 밝힌 김일성은 북조선에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귀국했다며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다. “우리 빨치산부대도 일본과의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주십시오.” 하지만 레베데프는 “조선을 해방시킨 것은 제25군과 태평양함대뿐이다. 88여단 빨치산부대의 단 한 명도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았고, 총 한번 쏘지 않았다. 절대로 역사를 바꿀 수 없다”며 김일성의 요구를 일축했다.
‘김동환’ 혹은 ‘김영환’이라는 가명으로 비밀리에 조직을 정비해 나가던 김일성은 10월 14일 평양 기림리 공설 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평양시 민중 대회’에서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주최로 해방을 경축하고 신조선 건설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마련한 군중대회였지만, ‘민족의 영웅 김일성 장군’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김일성 장군 개선 환영 군중대회’로 알려졌다. 모란봉 일대를 가득 메운 군중 숫자는 기록에 따라 6만에서 40만에 달했다. 당시 평양 인구가 34만명이었다. 레베데프와 조만식의 연설이 끝나고, 소련군이 마련해 준 양복을 입은 김일성이 단상에 올랐다.
군중대회를 앞두고 레베데프는 김일성에게 “북한 주민들 사이에 소련을 싫어하는 분위기가 감지되니 소련 훈장을 달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김일성은 기어이 소련 훈장을 달고 연단 위에 올랐다. 레베데프는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려는 소영웅 심리의 발현”이라 보았다. 소련기와 태극기 앞에 치스차코프, 레베데프, 로마넨코 장군이 서 있고 그 앞에 소련 훈장을 단 김일성이 연설하는 이날 사진은 북한 정권이 안정된 이후에는 훈장을 지운 채 김일성 혼자 연설하는 사진으로 편집돼 사용된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작성해서 번역해 준 원고를 꺼내 들고 “우리의 해방과 자유를 위하여 싸운 소련 군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며 연설을 시작했다. 공산주의 색채를 거의 드러내지 않은 “새로운 민주 조선 건설에 힘을 모으자”는 주제의 무난하고 짧은 연설이었다. 김일성은 훗날 “환호성을 듣는 순간 나의 심신에서는 스무 해 동안 쌓이고 쌓인 피곤이 한꺼번에 다 달아나 버렸다”며 대회 분위기에 만족감을 표했다. 그러나 당일 대회장에는 환호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만식의 측근으로 김일성과 개인적으로 여러 차례 만났던 극작가 오영진은 그날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대신에 확실히 30대로밖에 안 보이는 청년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선다. (…) 머리는 중국인 요리점의 웨이터처럼 버쩍 치켜 깎고 앞머리털은 한 치 정도 흡사히도 라이트급의 권투 선수를 방불케 한다. 가짜다! 넓은 장내에 모인 군중 사이에는 순식간에 불신과 실망과 불만과 분노의 감정이 전류처럼 전파되었다.” 당시 군중 속에서 “가짜 김일성” 소동이 있었음은 레베데프의 회고에서도 확인된다. 김일성은 첫 만남에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의 마음은 사로잡았지만, 북한 인민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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