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라운지] 박테리아로 만든 ‘마이크로 로봇’
항암제 싣고 암 조직에 직접 전달
단순히 약 전달을 넘어 체내에서
항암 단백질 만들어 암세포 제거
1890년대 미국의 종양학자 윌리엄 콜리는 암 환자를 치료하던 중 패혈증으로 사망한 환자가 누워 있었던 병상에 암 환자를 눕혔더니 암 크기가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을 발견했다. 박테리아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단서를 찾은 콜리는 죽은 박테리아로 만든 혼합물인 ‘콜리 독소’(Coley’s Toxin)를 환자들에게 투여했다. 치밀한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임상 치료였기에 환자가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면역항암 연구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박테리아, 즉 세균은 공기나 흙에도 존재하지만 몸속에서 살기도 하는 생명체로 독자 생존이 가능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동력이 있다. 다른 세포에 기생해야만 하는 단백질인 바이러스와는 다르다. 생활폐기물 등을 분해해 자연을 정화하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독소를 분비해 식중독, 파상풍, 폐렴 등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매일 아침 장건강을 위해 챙겨먹는 프로바이오틱스도 일종의 박테리아인데, 이처럼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박테리아의 크기는 수 마이크로미터에 불과하다.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몸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인간의 체내에 침투하는 마이크로 로봇으로 만들고자 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분야는 암 치료다. 산소가 부족한 암 조직 주변에서도 증식이 가능한 혐기성 박테리아의 특성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연구를 통해 발견한 다양한 항암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는 DNA를 삽입하게 되면, 박테리아는 단순한 약물 전달자가 아니라 항암 단백질을 생산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체내에 주입된 박테리아가 암세포에 도달하면, 초음파 또는 특정 화학물질과 같은 외부적 자극을 통해 항암 단백질을 생산한다. 목표물까지 신속하게 이동해 항암 단백질을 생산, 암세포를 제거한다.
이런 연구는 기존 치료법의 문제, 즉 항암제가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 세포를 파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항암제를 실은 박테리아가 암 조직까지 이동해 증식한다면 정상 세포가 파괴될 염려는 없다.
한편, 3세대 암 치료법인 면역항암의 과정에서 박테리아는 직접 암 세포를 공격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체내에서 암세포와 싸우는 면역세포를 돕기도 한다. 면역항암은 환자 스스로의 면역 강화를 통한 치료라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다. 교활한 암세포가 정상 세포인 척 자신을 숨길 경우에도 면역세포로 하여금 암세포를 인식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치료법이다. 암 조직에 도달한 박테리아는 면역 항암이 가능하도록 면역세포를 불러 모으고, 면역 반응물질도 분비해 효과를 극대화한다. 최근 박테리아에 항암제를 탑재해 암 조직까지 효과적으로 전달한 후 항암 및 면역 기폭 물질을 분비하는 치료 방법이 동물 실험에 성공한 바 있다.
암세포가 자리 잡은 순간부터 사람의 몸속은 치열한 전쟁터가 된다. 면역세포만으로 물리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 적은 너무 강하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빠르게 전선으로 이동, 효과적인 무기를 사용해 적을 제압하고, 면역세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다재다능한 박테리아 로봇이 곧 등장할 테니까.
연구의 단서는 일상을 다르게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화장실의 물때에 불과한 존재일 수도 있는 박테리아를 암의 진단, 치료, 예방에 널리 활용하는 연구가 이미 동물 실험 단계에 진입했다. 가까운 미래에는 사전에서 ‘박테리아’를 검색하면, ‘암 치료에 사용되는 미생물’이라는 새로운 정의가 소개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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