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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동서남북] 튀르키예가 6·25 때 대규모 파병한 진짜 이유

소련 西進에 위기감 극대화
NATO ‘안보 우산’ 편입되려
대규모 파병, 血戰도 불사
자유·평화 누릴 자격 熟考할 때

입력 2023.02.21 03:00
 
2010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압둘라 귤 전 튀르키예(터키) 대통령이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아흐레 앞둔 2010년 6월 16일 유엔군 튀르키예 참전용사들과 함께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튀르키예군 전몰장병 묘비를 찾아 참배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 장병 462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조선일보 DB

지난 6일 대지진으로 튀르키예에서만 4만명 넘게 숨졌다. 현장에 급파된 대한민국 긴급구조대가 건물 잔해에서 꺼져가던 생명을 구하고, 민간과 기업의 구호물품 행렬이 잇따르는 인류애 현장을 보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 3·4위전의 우정, 6·25 전쟁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함께 지킨 혈맹(血盟)의 가치를 떠올리게 된다.

튀르키예와 한국의 거리는 8000㎞에 육박한다. 1957년 수교했으니 1950년 6·25 전쟁 당시엔 ‘형제의 나라’를 이야기할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튀르키예는 왜 멀고도 낯선 한국 땅에 연인원 2만명 이상을 파병하고, 1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치열한 전투를 불사했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튀르키예의 참전은 ‘위기에 처한 국가에 대한 도움’이나 ‘유엔 회원국으로서 의무 수행’ 같은 이상적·박애주의적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련 위협에 맞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라는 동맹의 ‘안보 우산’에 편입되기 위해 유리한 조건을 선점하려는, 철저히 현실주의적인 계산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동유럽에선 소련의 서진(西進) 정책으로 각국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미국이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경제·군사적 원조를 약속했지만, 자국 영토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튀르키예는 불안하기만 했다. NATO 가입을 추진했지만 유럽 각국과 지역적 거리, 이슬람 국가라는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마침 발발한 6·25 전쟁은 튀르키예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한국 파병이 NATO 가입에 교량 역할을 할 것”이라는 당시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의 발언처럼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라는 인식을 미국에 심어줄 절호의 무대였다. 튀르키예는 개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18일 비밀리에 내각회의를 소집해 대규모 파병을 결정했다. 석 달 뒤인 10월 17일 튀르키예군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중공군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산발적인 전투를 이어가던 중공군은 평안남도 청천강 인근에서 벌어진 군우리 전투에서 대대적 공세로 돌아섰다. 파병 후 처음 치른 이 전투에서 튀르키예군은 장병 200여 명이 전사하고 중화기와 차량 70%를 잃었지만, 적 공세를 지연시켜 다른 유엔군 피해를 막았다. 당시 장렬히 전사한 무스타파 첼릭, 무하렘 코시쿤 등 스물두세 살 젊은 병사들의 유해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10여 개 묘석의 청동판에 새겨진 전사(戰死) 날짜가 1950년 11월 29일로 같다. 전열을 가다듬은 튀르키예군은 이듬해 1월 용인 김량장, 151고지 전투 등에서 총검 백병전을 불사하는 강인한 전투력으로 중공군을 잇달아 격퇴했다. 결국 동맹을 향한 ‘진정성’을 인정받은 튀르키예는 1952년 2월 18일 NATO에 가입했다. 창설국 12곳을 제외하고 NATO가 그리스와 함께 처음 받아들인 나라였다.

신현실주의(Neo-realism) 이론을 주창한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는 “외교정책에서 가장 우선시할 것은 생존과 국가 안보”라며 이를 위한 대표적 수단으로 ‘동맹’을 꼽았다. 튀르키예가 위기에 처한 신생 대한민국을 구하겠다는 명분으로 참전했지만, 배경에는 국익 극대화를 위한 냉정한 현실론에 기반한 전략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렇지만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피 흘리며 싸운 튀르키예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국익 극대화를 앞세운 각국의 편 가르기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다.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말만 앞세우는 ‘사이비 동맹’으로 험난한 이 시대를 헤쳐갈 수 있을까. ‘자유와 평화를 누릴 자격’에 대해 숙고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