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 최초승인 2023.02.07 07:29:39
- 최종수정 2023.02.07 07:29
#. 도덕 국가 대한민국
오구라 기조(小倉紀蔵) 교토대 교수는 8년간 한국에서 유학을 하며 우리 사회의 내면을 깊이 관찰하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한국인의 행동 원리』라는 저작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인의 기질을 “끝없는 도덕성의 추구”라고 진단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권의 권력투쟁은 도덕 쟁탈전, 즉 누가 더 도덕적이냐를 확인하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오구라 교수는 사생결단식으로 벌이는 도덕성 싸움의 근원이 주자성리학이라고 밝혀냈다. 주자성리학은 김상헌의 척화론, 송시열의 소중화론을 거쳐 도덕(理)과 물질(氣)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후 도덕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가치로 추앙하는 화서학파(이항로-유인석-최익현)로 전승되어 한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서학파는 철저한 도덕론(主理論), 중국 중심, 유교문화 시각에서 중화의 전통 가치를 수호하고, 그러한 사회구조를 파괴하려는 서양적인 모든 수단을 배척했다. 이런 논리구조는 다음과 같은 등식이 도식화된다.
◆도덕(理)=선(善)=중화
◆물질(氣)=악(惡)=청(오랑캐)·서양·일본
오구라 교수가 바라본 한국은 오직 완전무결한 도덕만이 대접받는 사회다. 도덕 지상 만능주의자들은 재야에 은거한 척하면서 모든 촉수는 중앙 권력을 향해 열어놓고 있다. 그들은 틈만 나면 권력과 돈과 여자를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본능을 표출하는 야수들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권력과 부와 색욕을 티끌 보듯 하고, 초야에 파묻혀 형이상학적 학문에 침잠한 척 꾸며댄다. 반골(反骨) 선비정신이 그들이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위장 가면이다.
도덕 지상 만능의 명분론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주자학적 민족주의론은 의병 운동가, 일제하에서 항일 무장 투쟁가, 해방 후 재야 민주화 인사, NL(민족민주)·PD(민중민주)계 586 운동권으로 전승되어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애오라지 자기 삶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고결한지를 끊임없이 입증·표현해야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들의 권력투쟁은 도덕을 앞세워 권력을 쟁취한 세력이 얼마나 도덕적이지 않은가를 폭로하는 진흙탕 속의 개싸움이다. 상대의 도덕과 위선을 싸잡아 비난하면 할수록 ‘훌륭한 정치인’으로 예우받는다.
#. 무당 신탁에 의존하여 국가 운영
영화 ‘남한산성’이 기억난다. 김훈 작가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농성 장면을 소설로 쓴 것을 황동혁 감독이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무대는 병자호란 침략을 당해 고립무원 상태가 된 남한산성.
오랑캐와는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으므로 죽을 때까지 싸우자고 목청껏 외치는 척화론자 김상헌과, 수치스럽더라도 백성부터 구하여 종묘사직을 보전하자는 주화론자 최명길.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뇌만 거듭하는(사실은 우유부단한) 인조…. 군량이 떨어져 굶어 죽느니 성문 열고 나가 싸우자는 의견에 등 떠밀려 인조는 출정을 명한다.
인조는 군대 지휘권을 행사하는 도 체찰사에 영의정 김류를 임명한다. 하필 출정하는 날 심란하게 바람이 불어댄다.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이 정도 풍속에서는 화약이 바람에 날려 화승총을 장전할 수도, 불을 붙여 총탄을 발사하기도 어렵다는 사실 파악쯤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 체찰사는 머뭇거리는 병사들을 베어 죽이고 출정의 북을 울린다. 이유는 “오늘이 바로 무당에게 승리를 신탁받은 길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출정군은 오랑캐 기마대의 내습에 대응하려 했으나 세찬 바람 덕에 화승총이 무용지물이 되어 박살이 났다. 산성에서 대오를 지어 내려갔던 병사들 대다수는 오랑캐의 칼과 창에 맞아 어육 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왕조의 명운을 걸고 전투를 벌이는 때와 장소를 전술 전략적 관점이 아니라 무당 신탁에 의존한 왕조. 그런 존재들이 어떤 가혹한 운명에 처했는지는 역사가 이미 오래전에 모범 답안을 보여준 바 있다.
#. 제정(祭政)일치 시대에서 제정 분리 시대로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연약한 존재로 내던져진 인간이 대자연의 조화로부터 살아남고, 사나운 짐승 무리와 맞서는 과정에서 의지할 것이라곤 신(神)과 무기뿐이었다. 생존 투쟁 과정에서 하늘의 뜻을 신탁받는 존재가 그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되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른바 제정일치 시대다.
한민족의 지도자로 회자되는 단군은 무당 또는 제사장을 뜻하는 몽골어 텡그리(tengri)와 일맥상통한다. 한울님의 아들 환웅이 곰(웅녀)과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 단군왕검이라고 한다. 단군왕검은 당골(제사장)+왕검(임금, 위정자), 즉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 겸 정치인을 뜻한다.
이후 인류가 과학과 기술에 눈을 뜨면서 신탁보다는 과학기술로 무장한 군대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으로 유익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후 신탁을 받는 제사장과 군대 지휘권자의 분화 과정을 밟는 것은 필연적 수순이었다. 신탁에 의존하여 제사장을 섬기는 족속은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과학기술과 군대에 의존하는 족속은 문명의 세례를 받아 승승장구하게 된다.
제정 분리가 일상화된 지 수천 년이 흐른 현대 사회에서 아직도 국가 대사의 길흉화복을 신탁에 의존하려 든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 미신 천국, 대한민국
한국에서 엘리트로 꼽히는 인재의 인생은 대략 다음과 같이 도식화된다. 우선 누구나 들으면 아는 명문대를 졸업한 후 외국 명문대에 유학 하여 유창한 영어 실력을 쌓는다. 이 와중에 행정·사법고시에 패스하여 법조인이 되거나 공무원의 길을 걷는다. 고시 출신 중에서도 선택된 자만 갈 수 있는 예산부처에서 경력을 쌓고 청와대 근무 후 차관·장관까지 승승장구한다. 이 정도면 누가 뭐래도 우리 사회에서 남 부럽지 않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꼽힌다.
필자가 잘 아는 모 인사가 한국인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질주해 온 인재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지방선거를 몇 달 앞둔 어느 날 고향의 광역 지자체장 출마를 선언한다. 느닷없는 출마 선언에 그의 고고한 삶을 지켜봐 왔던 주변 인사들이 격하게 만류했다.
“선거가 얼마나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아는가. 이건 운칠기삼, 아무리 오랜 세월 진흙탕에서 뒹굴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야. 왜 그대가 십자가를 지려 하는가.”
수많은 인재들이 블랙홀 같은 정치판에 빨려들어 몸과 마음 상하고 재산 축내는 일을 지켜 봐 왔던지라 필자도 당연히 그의 출마를 뜯어말렸다. 눈에 뭐가 씌었는지,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대체 왜?" 하는 친구들의 책망에 대한 그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용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역술인을 찾아가 점을 봤는데, 올해가 나에게 대운이 들어오는 해라네.”
그가 출사표를 던진 이유가 오로지 무당의 신탁 덕분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그 길로 낙향하여 아파트를 얻더니 곧바로 애향심에 불타는 투사로 변신했다. 평소 고향에 대한 관심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 친구가 “내 고향 발전을 위해 이 한목숨 바치겠노라”면서 시장판에 가서 순대도 소금에 찍어 먹고, 매운 떡볶이도 우물우물 해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역술인의 신탁을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로 믿고 용감무쌍하게 돌진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대운이란 게 아무에게나 찾아드는 게 아닌지, 아니면 그의 운빨이 좀 약했던 탓인지 그만 공천 과정에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격투기 선수가 옥타곤에 오르지도 못하고 KO패를 당한 꼴이 됐으니 자존심 드높았던 그의 인생에서 최악의 오점을 남긴 한 판 승부로 기록됐다.
아직까지 칩거 중인 그가 출마의 뜻을 접고 즐거운 인생을 살 것인지, 아니면 보다 더 용한 역술인을 찾아 또 한 번 신탁을 의뢰할 것인지는 오리무중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역술인에 의지하는 정치 지망생이 이 인사 한 사람뿐이겠는가. 정계의 유력 인사 누구누구는 전속 역술인을 두어 국가 대사는 물론이요, 이사 가는 날짜와 방향에 이르기까지 점괘에 의존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역술인·관상가·무당·지관의 점괘가 한국 정치를 좌우한다는 사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 부모 뼈다귀를 명당 길지에 묻어야 대운이 트이나?
구한말 흥선군 이하응은 대표적인 파락호로 손꼽혔다. 희대의 난봉꾼을 자처하던 그가 “이곳에 묘를 쓰면 2대에 걸쳐 왕이 날 명당”이란 풍수장이의 말에 꽂혀버렸다. 그곳에는 이미 가야사란 절이 들어서 있었다. 권력의 화신 흥선군은 가야사 터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다. 주지에게 자기 전 재산의 절반인 1만 냥을 갖다 안겼다는 설, 충청감사에게 중국 명품 벼루를 주고 내쫓았다는 설, 심지어 가야사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는 설이 난무했다.
“사람은 죽어도 땅은 영원한 법. 땅을 차지한 자 세상을 차지할 것이다.”
명당을 차지하기 위한 흥선군의 혈투를 다룬 영화 ‘명당’에 나오는 대사다. 과정은 좀 지저분했지만, 1866년 예산 가야사 터에 부친 남연군 묘를 이장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시쳇말로 흥선군 집안에 대운이 활짝 트였다. 그는 왕실과 결탁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그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고종이다) 수렴청정이란 미명 하에 권력을 휘어잡았다.
대원군에 이어 풍수 빨을 가장 확실하게 체험한 대표적 성공사례는 김대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대선에 나섰다가 세 차례 고배를 든 김대중은 네 번째 도전을 앞두고 자타가 공인하는 유명 지관을 모셨다. 그는 지관이 점지한 경기도 용인 야산에 부모 뼈다귀를 묻었다. 그곳이 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오는 천선하강형(天仙下降形) 명당 길지라나 뭐라나. 또 그 지관의 신탁에 따라 33년간 살았던 정든 동교동 집을 떠나 경기도 일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용하다고 소문 난 지관의 신탁 예언이 제대로 먹혔는지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치권은 풍수 광풍에 휩싸였다. 이회창 씨도 부모 뼈다귀를 ‘제왕이 태어날 지세’로 소문 난 예산으로 옮겼고, 김종필 씨, 한화갑 씨 등이 뒤를 이었다.
#. 당신들은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전직 국회의원과 전직 국방부 대변인이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를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모 역술인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여 세상이 떠들썩하다. 필자는 이런 의혹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예지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논란에 앞서 한 가지 밝히고 싶은 사실이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때려 부숴야 한다고 선동한 자들은 풍수가·역술인·무당이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오는 민족정기가 삼각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혈맥을 끊어 국운을 질식시키기 위해 일제가 풍수 침략 차원에서 총독부 청사를 지었다나 어쨌다나. 미신 신봉자들의 혹세무민을 근거로 김영삼 대통령은 수천억 예산을 들여 멀쩡한 건물 때려 부수고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새로 지었다.
또, 국가 차원에서 일제가 풍수 침략 목적에서 명산대찰에 박았다는 쇠말뚝 제거사업을 벌였다. 이것을 제거해야 민족정기가 되살아난다고 발악한 자들도 풍수가·역술인·무당이었다. 국수적 광풍에 떠밀려 김영삼 정부가 용감하게 6개월여 군부대 지뢰탐지기까지 동원하여 18개의 쇠말뚝을 제거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제가 박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한국인들이 때려 박은 것이었다. 군부대 안테나 지지용, 산판용, 혹은 뱃줄을 묶어놓기 위한 용도로 말이다.
어쩌다 이 나라 지성의 첨단을 달리는 파워 엘리트 집단이 역술인·관상가·지관·무당의 운빨에 의존하는 미신 천국이 되어버린 것일까? 오구라 기조 교수의 진단처럼 도덕성 투쟁에 앞장서 왔던 한국인들이 이제는 주제를 바꿔 제정일치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나라 정치인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 수준과 동일하다는 것이 인류사의 잠언이다. 자기들은 더 열심히 미신에 걸신들려 혹세무민하면서 대통령과 영부인의 역술 풍수 의존을 손가락질한다. 그렇다면 묻는다. 과연 당신들은 대통령에게 돌을 던질 만큼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들인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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