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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1942년 12월의 기억

통일뉴스 김동환 입력 2022.12.21 06:03 수정 2022.12.21 06:04

[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이즈음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1942년의 기억이다. 당시는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을 완성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던 때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시도가 우리 정체성의 근본인 말·글·얼을 없애는 작업이었다.

그 해 10월 1일,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관을 급습하여 이극로와 최현배를 비롯한 11명의 한글학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의 시작이다. 이후 총 29명이 구속되었다. 우리 정체성의 한 축인 언어가 뭉개지던 경험이다.

연이어 일제는 한민족의 정신마저 뽑아내려는 만행을 자행한다. 대종교의 임오교변(壬午敎變)이 그것이다. 임오교변이란 1942(임오년)년 12월 26일(음력 11월 19일), 만주 영안현 동경성에서 자행된 희대의 종교탄압이다. 일제가 우리 말·글·얼의 중심이었던 대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교주 윤세복(尹世復)을 비롯한 대종교 핵심 간부 20여명을 국내외에서 동시에 검거하여 박해를 가한 사건이다.

한 민족의 정체성의 핵심은 언어와 정신이다. 역으로 이 두 요소가 붕괴된다는 것은 민족이 사라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이런 점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한글 보급 운동과 단군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의 항일투쟁은 말과 혼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과 임오교변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만주에서 대종교를 이끌던 윤세복(尹世復)과 국내 조선어학회의 핵심이었던 이극로(李克魯) 간에 주고받은 ‘단군성가’와 ‘널리 펴는 말’이 두 사건의 빌미가 된 것만 보아도 확인된다. 국내 조선어학회사건과 대종교의 임오교변을 같은 대종교사건으로 이해하려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 근거를 둔다.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로만 보지 않았다. 박멸해야 할 한민족의 정체성이자 항일투쟁집단으로 규정하였다. 일제가 1910년 병탄 직후부터 대종교를 없애버리려 한 이유다. 1915년에는 종교통제령을 발포하여 국내의 대종교를 아예 불법화시켰다. 대종교가 만주 망명을 택한 결정적 배경이 된다.

만주에서도 항일투쟁의 본산 역할을 하며 1920년 9월에 청산리독립전쟁의 주역으로 나선 집단이 대종교다. 이에 일제의 대대적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른바 경신년대토벌(庚申年大討伐)이다. 대종교 내부의 기록에서는 기만명(幾萬名)의 교도가 희생되었고 수십 곳의 교당이 파괴되었다 한다.

일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만주에서의 대종교 말살을 도모해 갔다. 1925년 만주군벌(滿洲軍閥)을 겁박하여 맺은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이 그 단초다. 이 협정을 근거로 1926년 대종교만주포교금지령이 발포되었다. 부득이 대종교는 북만주 밀산현(密山縣)의 깊은 곳으로 은둔하게 된다. 그곳에서 와신상담하며 보낸 시간이 8년이다.

그 오랜 침묵을 깨고자 한 인물이 교주 윤세복(尹世復)이다. 그는 일제와 건곤일척의 정면 승부를 택했다. 1934년 대종교총본사를 다시 동경성으로 옮기고 합법적인 대종교 활동을 전개하려 한 것이다. 일제는 이를 기회로 대종교에 대한 감시와 조사를 집요하게 시도해갔다. 심지어는 교인을 가장한 밀정까지 교단 내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교계의 동향과 교내 간부들의 언행 하나하나를 정탐하였다.

이러한 상황의 끝에서 벌어진 사건이 임오교변이다. 대종교를 한민족 정체성의 근원이자 항일단체로 규정한 일제는, 1942년 12월 26일을 기해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대종교지도자 25명을 국내외에서 일시에 검거하였다.

당시 투옥된 간부 중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를 비롯한 10명이 고문으로 죽임을 당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들을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 칭한다. 그리고 교주 윤세복의 무기형을 비롯하여 일부 지도자들은 15년에서 7년까지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일제의 항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임오교변은 대종교의 남아있던 미력(微力)마저 무너뜨린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대종교의 인적 자원은 물론 국내외의 모든 거점이 붕괴되었다. 신간교적(新刊敎籍) 2만여 권, 구존서적(舊存書籍) 3천여 권, 천진(天眞, 단군영정)과 인신(印信), 그리고 각종 도서 및 주요 서물(書物) 6백여 종 등을 모두 빼앗긴 사태도 이 때 겪은 변고였다.

대종교의 존립 구조를 무너뜨린 일제는 과거의 흔적마저도 철저히 지워버렸다. 대종교가 해방을 맞아서도 침체일로로 치닫게 된 근본적 이유다. 더욱이 남북분단은 대종교지도자들을 갈라놓았고, 한국전쟁은 그마저도 모두 도태시켰다.

올해는 임오교변이 일어난 지 꼭 80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현상적 풍요 속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모습이 우리의 일상사 아닌가. 임오교변은 이목(耳目)으로도 듣보지 못한 생소한 사건의 조각일 뿐, 그것에 대한 의미 있는 인식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망각된 지 오래다.

뒤죽박죽된 세상에서 기억과 망각을 구분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쓸 데 없는 기억은 풍선에 바람 넣듯 채워 살면서도, 망각해선 안 될 일은 그저 핫바지 방귀 새 듯 날려버리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그러나 잊어야 할 일과 잊지 말아야 할 일의 형량(衡量)은, 사고하는 인간의 선천적 책무다. 우리 항일투쟁의 근거지가 붕괴되던 날, 우리 정체성의 뿌리가 뽑혀지던 날, 그 날 그 사건이 임오교변이다. 꼭 80년 전인 1942년 12월 26일의 기억이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