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2.08.31 00:01
업데이트 2022.08.31 10:21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배경은 러시아 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올해의 가장 큰 국제정치적 사건이다. 21세기에도 이러한 전면전 형태의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전 세계인이 충격을 받았다. 푸틴의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무고한 사상자를 내고, 국제 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린 후 전 세계 언론은 물론 정치계·학계·문화계 등 모든 분야 사람이 푸틴의 전쟁을 비난하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더해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러시아 군은 이번 전쟁으로 기존에 경쟁국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전쟁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 이번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는 지배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내 눈에는 공허해 보인다. 침략자는 국제적 비난을 받고 전쟁에서 결국 패배해야 한다는, 무의미한 도덕적 담론 같기 때문이다. 현실의 전쟁을 이렇게 도덕적 잣대로만 판단하면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이 어려워진다. 이 전쟁을 정확하게 보려면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접근을 해야 한다.
현실과 도덕적 당위 구분해야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 버려진 러시아 군 탱크. 서방 언론들이 러시아 군 실패의 증거로 삼는 현장이다. [연합뉴스]
지난 2월 전쟁 발발 후 지금까지 국제 여론은 침략자 푸틴과 러시아에 대한 비난에 이어 권선징악적 전쟁 분석, 즉 ‘악의 군대’인 러시아 군대는 선한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에 죄악을 행했으니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는 국제 사회는 승리할 것이라는, 도덕적 비난과 현실적 분석을 구분 짓지 못하는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침략자 푸틴과 러시아가 패배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성과 희망적 사고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방해한다. 이 전쟁의 전망과 관련해 올바른 전략과 정책 도출을 가로막는다. 하나하나 따져 보자.
첫째, 러시아의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오해가 크다. 우선 전제가 잘못됐다. 서방 세계에선 전쟁을 통한 인명이나 장비 피해를 최소화하고 국내·외 여론의 비판을 줄이려면 결정적 전투를 통해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걸 전쟁 목표로 삼을 거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같은 전쟁 목표는 20세기의 제1차, 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핵무기와 공군력이 가능해진 냉전 시대에나 지배적인 전쟁 수행 방식이다.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독일 전격전, 미국의 원자폭탄 몇 발 투하로 적국 일본의 의지를 섬멸시킨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 등이 이런 개념을 완성했다. 이런 현대식 전쟁 개념은 압도적인 전력 우세로 수 주에서 수개월 사이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를 원한다는 전제가 참일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르다. 물론 이러한 현대식 전쟁 개념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나라와 차별되는 전쟁 수행 문화 전통이 있다. 바로 전략사상가 알렉산더 스베친이 말하는 지연전(War of Attrition)의 전통이다. 과거 러시아가 나폴레옹 등 외부 침략을 받았을 때 광활한 영토와 자원, 혹독한 겨울과 우기 등을 무기로 구사했던 방식이다. 가령 적군의 이동 경로에 진흙탕 안으로 적을 묶어 두어, 군수와 병력·수송 등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기전으로 이어지는데 그 결과 국민과 군사 모두 지쳐서 여론과 전쟁 의지가 동시에 꺾인다. 바로 이때 러시아는 지친 적에게 결정적 반격을 가해 승리를 이룬다. 러시아가 러시아 영토 안에서 방어의 역할일 때 발전시킨 전쟁 수행 방식이다.
러시아 전통은 장기적 소모전
2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에서 포로가 된 독일 군. 독일 군은 러시아 군의 봉쇄 작전에 휘말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중앙포토]
전쟁을 장기화화 적의 의지와 사기, 여론을 악화시킨다는 개념은 반드시 러시아 영토 안에서 발생한 전쟁에서만 적용된 건 아니다. 러시아가 방어 입장이 아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6·25 전쟁 때도 그랬다. 스탈린은 소련과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안보적 이익을 위해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유럽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동시에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높아지도록 전쟁을 끌어(정전 협정 지연 등) 자국의 국익을 추구했다.
이렇듯 러시아와 서구는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는 전쟁의 조기 종결이 목표지만 러시아는 긴 호흡과 장기적 안목으로 전망하고, 실제로 전쟁이 장기화했을 때 이를 유리하게 활용하는 독특한 전쟁 수행 방식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번에도 러시아가 처음부터 장기전을 계획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장기전에 익숙한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침공에 따른 국제적 경제 제재 후 러시아의 타격은 별로 없다. 러시아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 동안 유럽 각국의 집권 세력은 겨울을 앞두고 폭등한 전기세 탓에 정권 교체 위기를 겪고 있다. 러시아는 이런 각국 상황을 충분히 예측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러시아가 전쟁을 빨리 끝내지 못했으니 실패하고 있다는 해석은 도덕적 담론과 뒤엉킨 현실 왜곡일 가능성이 크다.
전쟁의 수혜자 푸틴
둘째, 푸틴의 전쟁 목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치 지도자는 국익과 국민의 생명을 염두에 두지만, 사실 본인의 정치적 목표가 가장 중요하다. 프로이센의 군사평론가 클라우제비츠도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라고 했다. 크림반도 합병의 결과, 국제적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푸틴 정부는 역대 최고의 대선 득표율을 얻어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게 됐다. 제재가 러시아 독재를 강화한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올 초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에도 푸틴은 러시아판 유신독재가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해 기술적으로 종신 집권이 가능했다. 하지만 국민의 완전하고도 압도적 지지는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걸 충족시켰다.
이런 분석은 러시아의 실패라는 말과 사뭇 다르지 않은가. 크림반도 합병 이후 푸틴은 종신 집권이 가능한 개헌 의석을 확보했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엔 푸틴의 종신 집권을 공고히 하는 러시아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푸틴은 이번 전쟁의 승자인가, 아니면 패자인가.
냉철한 한국의 외교 전략 필요
러시아는 전쟁에서 패배해야만 하고, 경제 제재로 푸틴 정부가 몰락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주장은 잠시 접어두고 사실에 기반해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푸틴의 몰락을 예언한 도덕적 담론의 실패를 답습하는 대신 냉철하게 국익을 위한 전략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 외교당국, 관련 전문가들에게 당부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당사국들의 역사, 문화 등을 바탕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사태를 이해해야 한다. CNN,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월스리트 저널, BBC 등의 보도는 그들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영미권의 언론과 싱크탱크 리포트를 참고하되, 냉정하게 현실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 실패하지 않았고, 푸틴 또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국자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주길 기대한다.
국방대 안전보장대학원 교수. 영국 런던대에서 석사 학위, 미국 캔자스대에서 박사(국제정치사 전공) 학위를 받았다. 미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FMSO)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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