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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냉전 종식 주인공 고르바초프 별세…‘철의 장막’ 걷어내고 국제질서 바꾼 6년 9개월

입력 2022-08-31 08:30업데이트 2022-08-31 09:17
 
미하일 고르바초프(왼쪽)가 1985년 11월 제네바 회의에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AP뉴시스
냉전을 종식한 옛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사망했다고 타스통신 등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향년 91세.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임상병원은 “고르바초프가 심각하고 오래된 질병으로 오늘 밤 사망했다”고 이날 밝혔다. 그는 올해 초에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외곽의 전원주택에서 여생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르바초프는 54세 때인 1985년 일곱 번째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됐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냉전 종식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집권 8개월 만인 같은 해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화해의 악수를 나눠 냉전 종식의 초석을 마련했다. 1987년 12월 레이건 당시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맺어 사거리 500~5500km의 중·단거리 핵미사일을 없애고 개발 및 배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역사적인 핵군축 합의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88년 5월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소련군을 철수하기 시작해 다음해 2월까지 철군을 완료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몰타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동서냉전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런 화해 분위기는 1990년 독일 통일과 동구권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9년 민주화 시위가 공산주의 동유럽 국가들을 휩쓸었을 때 그는 무력 사용을 자제해 1956년 헝가리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를 보냈던 이전의 크렘린 지도자들과는 달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90년 한국과 수교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난이 악화돼 군부의 쿠데타 시도 등으로 정국이 혼란을 겪으며 소련이 1991년 12월 해체돼 고르바초프도 권력을 상실했다. 서방에선 냉전을 종식시킨 지도자로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고국에선 환영받지 못하는 인사가 됐다. 1993년 러시아는 개혁 부작용으로 초인플레이션과 불황에 시달렸고 1998년엔 통화의 평가절하와 채무불이행, 은행 파산 등으로 시장 경제 몰락 직전까지 갔다.

고르바초프는 퇴임 이후에도 세계를 돌며 강연과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본인의 이름을 딴 고르파초프 재단 총재를 맡아 환경문제와 국제현안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1996년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계 복귀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진 못했다.
● 농부의 아들에서 최연소 당서기장으로
“소련은 서방의 라이벌인 한편 파트너인데 서방은 적절한 존중을 해주지 않았다. 20년 전 서방은 내게 찬사를 보냈지만 (소련의 개혁이 가져올)세계 전체의 이익이 각국의 국익에 파묻혀 버렸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5년 소련 당서기장에 선출된 후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한계에 부딪힌 원인을 이렇게 판단했다. 개혁 조치 후 20년이 지난 2005년 주간 글로벌뷰포인트의 특별 인터뷰에서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시한 것이다. 이어 그는 소련이 역사상 뒤안길로 사라진 뒤 세계무대를 독주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강대국 콤플렉스’에 빠진 미국은 ‘세계는 하나의 중심에 의해 다스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국에는 낡은 사고를 끝낼 또 다른 페레스트로이카가 필요하다.”

농부의 아들에서 최연소 당서기가 된 입지적 인물, 각종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철의 장막’을 걷어낸 평화주의자, 본인 손으로 미소 냉전을 끝냈지만 도래할 신(新)냉전은 예견하지 못한 이상주의자, 서방에서는 호평 받지만 자국에서는 외면 받는 은퇴한 정치인….

고르바초프는 미소 냉전을 끝내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든 주역이다. 그가 당서기, 소련 대통령 등 권력정점에 있었던 기간이 6년 9개월(1985년 3월~1991년 12월) 남짓에 불과하면 그는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세계적 변화를 불러온 지도자 중 하나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 2일 러시아(당시 소련) 북부 스타브로폴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스로 콤바인을 운전하며 집안일을 돕는 성실한 소년이었다. 18세 때에는 많은 노동 성과와 바른 품행으로 ‘노동적기훈장’을 받기도 했다.

19세 때인 1950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고, 재학 중 1952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5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로 일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고르바초프는 1962년부터 스타브로폴의 온천을 방문한 소련 공산당 간부들을 접대하고 안내 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당 핵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197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 돼 중앙당 간부진에 들어갔고, 1974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로 취임했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돼 권력의 핵심에 진출했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제6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1982~1984년 재임)이 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안드로포프가 급사하자 서기장은 콘스탄틴 체르넨코에게 돌아갔으나 그도 집권 이듬해인 1985년 3월 사망하자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서기장이 되며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역대 최연소(54세) 당서기장이 탄생한 것이다.
● 개혁, 개방을 외치다
고르바초프가 당서기가 될 때만해도 그에 대한 서방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3년 사이 두 명의 서기장이 연달아 숨져 ‘어부지리’로 권좌에 오른 50대 중반에 서기장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내 대표적인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는 취임사에서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외쳤다. 당 내부의 구태의연함과 부패, 노동생산력의 약화와 과학기술력의 저하 등 여러 산적한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각종 정보공개로 인한 사회 투명성 제고, 언론 자유 확보, 자율적 시장경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던 소련의 몰락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이듬해인 1986년 4월에는 “사회생활 모든 부분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모순 된 당과 사회 구조에 대한 전면적 개혁이 필요하며 이는 정보 공개와 민간 자율성을 증대하는 개방만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 조치 이후 농장 책임자, 기업 대표자 등은 당의 지침에 따르지 않고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됐으며 1987년에는 무역의 국가 독점이 해제됐다. 암거래상들의 활동을 합법화했고 대신 세금을 내게 했다. 인위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슷한 수준해서 맞췄던 것에서 벗어나 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달리했다. 공산주의 국가에 신자유적 경제가 도입된 것이다.
● 미소 냉전의 종언, 노벨평화상 수상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자’ ‘공산당 최후의 로맨티스트’ 등으로 불리는 고르바초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미소 냉전 시대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취임 첫해 말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갖은 재임 중 총 4차례 미소 정상 회담을 통해 서방과 동구권의 군비 경쟁에 제동을 걸었다. 198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고,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을 묵인했다. 또한 1990년 7월 독일과의 정상회담에서 통일 독일의 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에 동의하면서 독일이 하나로 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소련은 서방 세계와도 수교에 나서며 빗장을 열었으며,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때는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폐쇄적이었던 소련을 개방시키고, 국제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그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사설에서 “폴란드 헝가리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에 이르기까지 지난해 자유 열풍이 몰아칠 때 소련 안에서는 이 같은 자유의 물결을 분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런 의견을 물리치고 자유를 허용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캄보이다 사태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한소(韓蘇)수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기울인 평화노력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만 하다”고 평가했다.
●변화의 희생양이 되다
2004년 12월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AP뉴시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극심한 혼란도 가져왔다. 능력주의 원칙의 적용은 극심한 임금격차와 대량해고를 가져왔다. 생산량은 늘었으나 유통망이 정비가 안돼 상품은 제때 진열되지 못해 서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개혁의 속도나 범위에 불만을 품는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급진파도 나타나 그를 위협했다. 고르바초프가 풀어준 언론 자유는 이제 그를 비판하는 날선 화살이 돼 되돌아왔다. 급기야 보수파가 1991년 8월 크림 반도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는 고르바초프를 급습해 연금시키고, 구(舊) 소련 체제의 복원을 선포했다.

하지만 달콤한 자유를 한번 맛봤던 소련 민중들은 붉은 광장으로 몰려들었고, 보수의 구테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고르바초프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는데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해 12월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그의 정적이었던 옐친은 소련을 공식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이 이를 대신한다고 발표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등 몇 차례 정치일선 복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99년 평생의 반려자이던 라이사 여사가 타계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르바초프 재단을 만든 뒤 환경문제와 국제현안에 강의와 집필을 통해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폐쇄적인 국정 운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본인이 추구했던 개혁·개방 정책이 과거로 회귀하는 양상에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개혁을 가장해 공공의 재산을 편취하고 부패에 물듦으로써 국민을 배신하고 있다”며 “1990년 이후 러시아의 역대 선거는 소련 시절에 비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85세 생일을 앞두고 2016년 러시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는 러시아와 서방 간의 긴장 관계가 신(新)냉전으로 악화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신냉전은 사실상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누군가가 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라며 “우리(러시아)도 저들도(서방)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건설적 정책을 통해 평화로 나가는 방법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고르바초프는 “벌써 55년째 정치 속에 있으며 정치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후인 2016년 12월 13일 AP통신 등과 인터뷰에서는 “(트럼프가)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것이 좋을 수 있다”며 “러시아와 미국은 한 자리에 앉아 (관계 개선을 위한) 합의에 이를 때까지 대화해야 한다”며 미러 관계 개선을 촉구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한반도 통일을 얘기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 열린 첫 한소 정상회담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6월 4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소수교에 합의했고, 그해 9월 30일 유엔본부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서명하며 한소수교가 이뤄졌다. 1884년 체결된 조러수호통상조약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1904년 파기됐고, 이후 86년 만에 다시 관계가 정상화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탈냉전, 노태우의 북방정책이 호응한 결과였다.

고르바초프는 수교 10주년을 맞아 2000년 본보와 가진 서면인터뷰에서 “(한국과의 수교는)국제관계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우리의 신사고와 새 대외정책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한 간의 적대관계 청산과 평화적인 대화, 민주적 통일은 한국인의 이해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그는 당시 수교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공개하기도 했다.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 만남의 의미와 목적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노 대통령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서 직설적으로 (수교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국제 정세와 동북아 정세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양국 관계가 발전할 준비가 돼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본심을 이해하게 됐죠.”

‘제17회 인촌 기념강좌’ 연사로 초청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세계정세와 한반도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2001/11/19 동아일보DB
고르바초프는 2001년 11월 방한해 고려중앙학원 고려대학교 동아일보사 공동 주최 및 고려대 정책대학원 주관으로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인촌기념강좌에 참석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통일 논의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규칙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남북간의 이해관계가 고려돼야 하며 대화가 선결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통일은 많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다. 남북간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인 문제도 작용한다. 통일은 정쟁이나 당쟁의 대상이 되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러시아는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지렛대를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면서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2016년 5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주포럼의 특별대담자로 참석해 ‘신냉전 위협과 공동 번영의 길’을 주제로 대담과 기조연설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건강을 이유로 막판에 불참의사를 밝혔다. 고르바초프는 당뇨 등 질환을 앓아왔으며 2016년 11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입원 수술을 받기도 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