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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효자동 이발사 억울한 최후... 청와대 백과사전

효자동 이발사 억울한 최후...그곳 빼앗은 차지철 '섬뜩한 최후' [청와대 백과사전]

중앙일보

입력 2022.05.16 23:00

업데이트 2022.05.17 09:20

▶청와대 백과사전 1- 걸어서 한바퀴(시설물과 등산로)▶청와대 백과사전 2- 알고 걷는 재미(자연유산 문화유산)

▶청와대 백과사전3-서울 타임캡슐 인근 동네 한바퀴

▶청와대 백과사전 4-인근 변천사와 풍수 이야기

(내용이 넘쳐 3편에서는 청와대 인근 동네만 다룹니다. 역사와 풍수 얘기는 4편으로 넘깁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자하문로 큰길가에 있는 ‘토방’은 조그마한 한식당이다. 경복궁역에서 걸어 10분 정도다. 점심에는 식사를 내고 저녁에는 삼합이나 보리굴비 같은 술안주를 낸다. 5월 들어 갑자기 바빠졌다. “주로 단골손님들이 예약하고 오시는데 어느 날부터 지나가던 사람들이 불쑥불쑥 문을 열고 들어와요. 처음 보는 분들이라 뭔 일 있나 했지요.” 곧 주인장은 개방한 청와대를 구경하러 온 이들임을 알았다. 일대가 다 그렇다고 했다.

청와대 인근 동네가 북적이고 있다. 이 일대는 주중 저녁에는 직장인들이 회식하러, 주말에는 젊은이들이 놀러 나오는 동네다. 이제는 요일을 가리지 않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밥집이건 찻집이건 손님이 넘친다. 중년여성들이 특히 많아졌다. (청와대는 말이 전면 개방이지 아직 핵심시설물 내부는 공개하지 않는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관람객들이 몰려 시설물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경내는 1시간 30분이면 돌아볼 수 있다. 잔뜩 기대하고 나왔다가 살짝 허탈한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2% 갈증을 해소하려면 청와대 주변 동네 산책이 그만이다.
청와대 정문을 나와 동쪽으로 가면 삼청·팔판·소격·화·사간·송현·안국동이 나온다. 서쪽에는 청운·옥인·신교·궁정·효자·창성·통의·체부·적선·누상·통인·누하·필운·무악·사직동이 있다. 땅덩이에 비해 동네가 꽤 많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됐다는 얘기다. 그 구석구석마다 사연이 박혀있다. 일대는 서울 역사를 농축한 타임캡슐이라 할만하다.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는 경복궁과 관청들이 가까워 조선 왕족과 사대부들 집과 별장이 많았다. 풍경 또한 뛰어나 많은 문장가와 화가들이 이를 작품으로 남겼다. 2009년 12월 문화재청은 백악산 일대 360만㎡를 명승 제67호로 지정했다.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자리 잡은 나지막한 동네들 사연을 대충이라도 훑어본다. 작정하면 하루면 돌아볼 수 있다. 다리는 팍팍하겠지만 알고 다니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위의 행정구역도를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청와대 서쪽 동네 한바퀴]

가운데 길로 따라 올라가면 자하문이다. 왼쪽이 무궁화동산, 오른쪽이 칠궁이다. 사진 가운데 서 있는 키큰 나무는 회화나무인데 연세 사백살이 훨씬 넘었다.

가노라 삼각산아-궁정동(宮井洞)
청와대 서쪽 칠궁 근처다. 육상궁의 ‘궁’과 온정동(溫井洞)의 ‘정’을 더한 이름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봉안한 궁이다. 온정동은 효자·궁정동 사이인데 겨울에도 더운 김이 나는 우물이 있었단다. 궁정동에는 나이 많은 나무들이 많다. 칠궁 안엔 약 310세 먹은 주목, 약 250세 드신 느티나무가 있다. 일반인이 드나들 수 없던 곳에 있어서인지 보호수로 지정하지 않았다. 칠궁 바깥에는 중국 굴피나무(약 456세) 등 보호수 세 그루가 있다.
영빈관 서쪽에 무궁화동산이 있다. 그 안에 김상헌 집터가 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을 거부한 척화파의 대표다. 인조 때, 청이 명을 치기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자 반대하는 상소 올렸다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그가 서울을 떠나며 읊은 시조다.
무궁화동산에 옛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속 건물인 안가가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안가를 모두 부수고 지금의 공원을 만들었다.

영화 속의 효자동 이발소는 실제로 있었다. 이야기야 물론 허구가 물씬 들어갔지만. [중앙포토]

차지철이 빼앗아간 집, 효자동(孝子洞)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서울 큰길에는 전차가 다니고 노선도 많았다. 청와대 앞 분수대 근처에 효자역이 있었다. 남대문 서울역을 거쳐 원효로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지호출판사 장인용 전 대표는 통인동에서 태어났다. 효자동과 청운동에서 오래 살았으니 토박이를 넘어 골수 서촌사람이라 할만하다. 어린 시절 이 일대에서 놀던 기억이 또렷하다.

“4.19 때 효자동에 살았는데 유탄 떨어진다고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이불을 씌워줬어요. 그때는 어려서 뭔지도 몰랐어요. 그저 신나서 이불 안에서 활개 치며 놀았지요.
지금 청와대 들어가는 길 입구가 전차 종점이었어요. 어릴 때 못을 납작하게 만들려고 철길 위에 올려놓은 게 반 부대는 될 거예요. 칼 만들어서 놀려고 그랬지요. 버스는 칠궁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자하문 쪽으로 올라갔고요. 자하문 옆에 백악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었어요. 백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스카이웨이는 1.21사태 이후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길이지요. 지금의 무궁화동산 자리에 영화 ‘효자동 이발사’(임찬상 감독. 송강호 문소리 주연)에 나오는 이발소가 있었어요. 조그만 이층 건물인데 저도 거기서 머리를 깎았어요. 바로 옆에 붙어있는 삼표연탄집 주인이 이발소 건물을 사려고 했는데 이발사 아저씨가 죽어도 안 판다고 버텼죠. 그러다가 경호실장 차지철이 강제로 뺏어서 안가를 만들었고 거기서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었어요. 연탄가게 주인은 집을 바치고 가스와 철강 사업을 허가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희 외가 식구들도 차지철한테 당했어요. 평창동에 경호원아파트를 짓겠다고 땅을 징발하는 바람에 살던 집에서 쫓겨났거든요.
전차 종점 뒤 청와대 쪽으로 골목길이 있었고(지금의 경호처 자리 일부일 거예요) 거기에도 양옥집 7~8 채가 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 집들도 물론 차지철에게 몽땅 빼앗겼지요.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전에는 5월 5일이면 청와대를 어린이에게 개방했어요. 놀러 가면 연필하고 공책을 나누어줬어요. 그 때까지는 인왕산이나 북악산을 마음대로 다녔고요. 그때 창성동 별관은 국민대학교였어요.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은 청와대 앞길을 높여서 그랬는지 반 지하로 있었어요. 중국 주나라 성읍을 보면 왕궁의 북문 밖은 저자거리지요. 정도전은 유가이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신무문 밖 터가 협소하고 백악산이 버티고 있어 뜻을 못 이뤘겠지요. 그러니 유가식으로 보면 청와대는 시장터예요.”

일제강점기. 서울 전차 노선도. [경성진기주식회사 육십년 연혁사]

이 동네서 자란 조영현 대표(전남 장흥 풀로만목장)의 기억도 같다.
“경복궁 서쪽 담장길 그러니까 효자로를 파면 전차길이 나올 거예요. 당시에 공사를 하면서 철길을 걷어내지 않고 그냥 덮었어요.”

국민대가 서촌에 있었어? 창성동(昌成洞)

청와대사랑채 남쪽, 경복궁 서쪽 담장을 끼고 있는 동네다. 이 동네에 있던 국민대학교는 1971년에 정릉으로 이사 갔다. 인근에 왕궁에 어류·고기·소금·땔감을 대주는 관청인 사재감(司宰監址)이 있었다. 지금의 자하문로 일부는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흐르던 자리다. 냇물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 금천(禁川 대궐 안 냇물)이 됐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근처에 서금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금천 서쪽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테다. 창성동에 있던 진명여고는 1989년에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갔다.

2014년 통인시장을 찾은 존 케리 미 국무장관. [로이터]

선거 때면 정치인들이 눈도장 찍는 곳, 통인동(通仁洞)
조선시대에는 궁이나 관청을 출입하는 이들이 많이 살았다. 동네의 중심은 통인시장이다. 200m 길이의 시장 좌우에 80여개 가게가 늘어서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서촌 주변에 있는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 공설시장에서 출발했다. 선거 때나 명절 때가 되면 정치인들이 눈도장 찍으러 가는 단골장소다. 2014년에는 미국 국무장관 존 케리와 성 김 주한 미국대사가 다녀갔다. 무한도전 유재석과 광희, 스타킹 강호동이 먹방을 펼치기도 했다. 기름떡볶이집은 시장 명소가 됐다.
체부동 금천교 시장에도 1970년대부터 무쇠뚜껑을 놓고 기름떡볶이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6.25가 터지기 전, 주인장 김정연 할머니는 개성에서 잠시 서울에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했다. 북에 두고 온 딸 셋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2015년에 돌아가셨다. 전세금 7000만원을 비롯한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떠났다. 통인시장 입구에 있는 효자아파트는 청와대 직원들과 연예인들이 살던 고급 주택이었단다.
이 동네에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던 사저가 있었다. 여기서 태어났으니 세종도 서촌사람이다.

지난 3월 인수위 근처 통의동 김치찌개집에서 점심을 먹는 당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일행. [뉴스1]

천연기념물이 쓰러졌다, 통의동(通義洞)
윤석열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금융감독원연수원과 금융연수원에 차렸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전자는 통의동에 있고 후자는 삼청동에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인수위도 이곳을 사용했다. 청와대와 정부기관들이 주변에 몰려있고 여유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수위 사무실을 나서면 바로 먹자골목이다.
이 동네 있는 대림미술관 뒤에 백송 한 그루가 있었다. 이 땅에서 가장 크고 나이 들어 1962년에 천연기념물 4호가 됐다. 나무 덕분에 일대는 한때 백송동이란 행정동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 태풍에 넘어지면서 둥치만 남긴 채 고사했다. 천연기념물 자격도 해지됐다. 주민들이 주변에 후계목을 심었지만 아는 이만 둘러보는 장소가 됐다. 이 동네 있던 창의궁은 1910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일제가 조선을 수탈하려 만든 회사) 사택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사택은 광복 뒤에 귀속재산(적산)으로 접수됐다. 그 뒤 땅을 나눠 주택들이 들어섰다.

정선의 명작 인왕제색도. 그림을 그린 자리를 놓고 설이 분분하다.

종로경찰서장 동상이 서있는 이유, 청운동(淸雲洞)
자하문에서 청와대로 내려가는 길, 윤동주 문학관 맞은편에 최규식 동상이 서있다. 최규식은 1968년 1·21일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을 때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숨진 종로경찰서장이다. 당시 함께 숨진 정종수 경사 기념비도 그 곁에 있다.

동네 이름은 청운초등학교 뒤쪽 계곡 청풍계의 ‘청’과 백운동의 ‘운’을 더한 이름이다. 백운동(白雲洞)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서로 맞닿은 지점이다. ‘흰 구름이 아름답다’고 붙은 이름인데 현재 행정구역상 명칭은 아니다. 청풍계는 인왕산 아래 청운초등학교 후문 일대 계곡을 말하는데 대부분 주택가가 됐다.
조선 후기 제일 화가로 불리는 겸재 정선이 경복고등학교 부근에서 태어났다. 겸재는 그 뒤 인왕산 아래 군인아파트 부근으로 이사해 84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청운초등학교 터에서 송강 정철이 태어났다. 경복고는 본래 화동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옛 경기고. 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에서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로 세워진 뒤 청운동으로 이전했다. 경기상업고등학교도 동숭동에 있다가 1926년에 이사 왔다.

시위대가 사라졌어요, 신교동新橋洞
국립서울농학교와 국립서울맹학교가 있는 동네다. 맹학교는 한국 첫 시각장애인 국립특수학교다.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다가 1931년 지금 장소로 옮겨왔다. 1959년에 서울농아학교와 서울맹학교로 나누어졌다. 청와대 앞에서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시위로 학생들 고통이 컸다. 시각장애인들은 미세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확성기는 이들에게 흉기나 다름없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평온을 되찾았다. 청운초등학교에는 다리 난간석 지주가 있다. 1970년 자하문를 넓히다가 발견해서 옮겨놓았다. 다리가 있던 곳은 신한은행 효자동 지점 앞 자하문로다. 자하문로는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백운동천이 흐르던 물길을 덮어 만들었다. 백운동천 위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

1956년에 찍은 인왕산 아래 친일파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 아방궁이라 할만하다. [서울육백년] 대학당.

수성동계곡. 가운데 보이는 돌다리가 기린교, 오른쪽에 옥인아파트가 있었다. [중앙포토]

일제 부역자들이 탐낸 땅, 옥인동玉仁洞
수성동 계곡에 안평대군 집턱와 그 앞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기린교가 있었다.

교각 없이 긴 돌 2개를 뉘어놓은 소박한 모양새다. 이 다리는 1960년대에 옥인아파트를 지으며 잊혀졌다. 반전이 일어났다. 2009년에 일대 환경을 복원하려 아파트 철거를 추진할 때였다. 아파트 뒤에 가려있던 다리 모양의 돌이 드러났다. 사료들을 맞춰보니 기린교였다. 그 전까지는 엉뚱한 돌다리를 기린교라고 단정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었다. 종로구청은 이 일대에 옹벽을 세우고 허브공원을 만들려고 했다. 기린교의 등장으로 계곡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일대 전체가 서울시 기념물이 됐다.

펜으로 그린 체부동 성결교회. 그림=안충기

중국은 왜 서촌 교회를 사려했을까-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付洞)
배화여자중·고등학교 및 배화여자대학교가 있는 동네다. 연산군 때 지은 누각의 윗동네라 해서 누상동, 아랫동네라 해서 누하동이다. 두레엘리시안 아파트 맞은편 건물 공사 때 땅을 파보니 조선시대 배수로 시설과 건물터가 나왔다. 규모로 보아 인경궁으로 추측한다. 누상동에는 청와동(靑瓦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조선시대 각자다. 이 바위에서 인왕산 아래 있던 인경궁 푸른 기와가 보였단다. ‘청와대’ 이름을 여기서 따오지는 않았다.

체부동은 경복궁역에서 자하문 쪽으로 가는 길 초입 왼쪽 동네다.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나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금천교시장이다. 아기자기한 음식점들이 늘어서있고 철물점도 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 중 하나다. 청춘 핫 플레이스가 됐다. 골목 속에 서울미래유산 성결교회가 숨어있다. 1931년에 완공했다. 시대별로 달라지는 벽돌 쌓기 방식을 볼 수 있다. 2014년 중국 자본에 넘어갈 뻔했는데 서울시가 매입해 ‘생활문화지원센터’로 용도를 바꿨다. 외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는 보수해 각종 생활 문화 활동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교회와 역사를 같이 한 한옥 별채 ‘금오재’도 남게 되었다.
경복궁역 네거리에 금천교가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졌다. 바로 옆 시장의 이름은 이 다리에서 따왔다.

경복궁은 싫어 이 동네가 좋아, 필운동(弼雲洞)
동네 이름은 ‘필운대’에서 따왔다. 이 동네 배화여학교는 본래 미국 선교사 캠벨이 세웠다. 서울지방경찰청 부근에 있다가 1916년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일대가 인경궁 자리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뒤 광해군은 경기도 교하로 천도하려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후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라는 승려의 말을 믿고 인경궁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이 나자 그를 누르려 경덕궁(경희궁)을 지었다. 경희궁보다 컸던 인경궁은 결국 완공하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며 사라졌다. 정확한 규모와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경궁의 남쪽 경계가 경덕궁일 것으로 추정한다.

사직단.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된 제례 준비 공간 전사청(典祀廳) 권역을 복원해 지난 10일 개관했다. [연합뉴스]

향나무는 본래 담장 안에 있었다, 사직동(社稷洞)
사직단이 있는 동네다. 사직단은 조선 때 토지 신 사(社)와 곡식 신 직(稷)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다.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사직단 주변에는 소나무 또는 잣나무처럼 늘 푸른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정문 앞에 서있는 늙은 향나무는 본래 사직단 안에 있었으나 길을 내며 담 밖이 됐다. 이 동네에는 단군성전도 있다. 본래 남산에 있었는데 일제가 헐어내 현재 위치에 다시 지었다. 성전 안에는 정부 표준 단군 영정과 단군상이 있다. 경희궁 뒤에는 이름난 활터인 황학정(黃鶴亭)이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치마바위를 쪼아 새긴 글자들. 1940년 촬영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치마바위에 몹쓸 짓한 놈들
인왕산은 사대문 안 웬만한 곳에서는 다 보인다. 주산인 백악의 서쪽에 있어 조선 초에는 서봉·서산 이라고도 불렸다. 1537년 중종 때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서열 1위가 공용경, 2위가 오희맹이었다. 임금은 경회루에서 이들을 접대하며 북쪽 백악산과 서쪽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공용경은 백악산을 공극(拱極), 오희맹은 인왕산을 필운(弼雲) 지었다. 이 이름이 필운대와 필운동으로 남았다.

걷다가 고개를 들면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보인다. 인왕산 남쪽 끝 누상동에서 무악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1968년 인왕산에 길을 내며 폭파해서 없앤단다. 삿갓바위는 인왕산 남쪽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데 있다.
정상 아래 널찍하게 펼쳐져 있는 바위가 치마바위다. 인왕산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내용이 비슷한 여러 버전의 전설이 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경회루에서 인왕산 기슭에 있는 폐비 신씨 집을 바라보곤 했단다. 그걸 알게 된 폐비가 이 바위에 치마를 걸어놓고(또는 흔들며) ‘여보 나 여기 있어’라고 했다는 얘기가 그중 하나다. 병풍바위라고도 부른다. 치마바위는 일제강점기에 수모를 당했다. 1940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도성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대형 글자를 새겨 넣었다.

東亞靑年團結 동아청년단결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九月十六日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朝鮮總督 南次郞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大日本靑年團大會 대일본청년단대회

당시 1만 1454원을 들여서 7개월 동안 작업했다. 광복 뒤인 1950년 서울시가 82만원을 들여 이를 삭제했지만 매끈하던 바위에는 역사의 어지러운 흉터가 남았다.

인왕산 선바위. 서울시 [서울문화재대관]

정상 못미처 동쪽에는 매부리바위가 있다. 하늘로 향해 뻗은 매의 머리모양인데, 틈에 자라는 소나무가 부리처럼 보인다. 남쪽 능선 정상 부근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부처가 앉아있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아슬바위라고도 한다. 무악동에는 선바위가 있다. 우뚝 선 모양, 또는 승려가 장삼 입은 형상이라고 붙은 이름이다. 기도처로 소문났다. 조선 초 도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도성 성곽 안에 둘 지, 밖에 둘 지를 놓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무학은 성내파고 정도전은 성외파였다. “들이면 불교가 흥하고 내보내면 유교가 흥한다”는 정도전의 말을 이성계가 들어줬단다.

[청와대 동쪽 동네 한바퀴]

삼청동 총리공관 일대. 저 멀리 인왕산 춘추관과 인왕산이 보인다. [청와대 경호처]

총리공관 자리에 살던 부끄러운 이들, 삼청동(三淸洞) 팔판동(八判洞)
세종문화회관 뒤 당주동이 고향인 이충렬 전기 작가는 어린 시절 삼청동으로 놀러다녔다.

“동십자각에서 삼청동 올라가는 길이 그때는 물이 제법 흐르는 개울이었어요. 친구들과 물길을 따라 올라가 삼청공원 숲에서 술래잡기를 했지요. 유치원 때는 소풍가서 나무나 바위 밑에 선생님들이 숨겨놓은 보물찾기도 했고요.”

지금처럼 민가가 들어서기 전 삼청동 계곡은 물이 제법 많았다. 삼청동 이름은 삼청전(三淸殿)에서 왔다는 설,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인심 도 맑다(人淸)는 말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도성 안에서 백악의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산의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남산의 청학동이 그 다음’이라는 기록도 있다.(용재총화).
대한제국 말 고종은 지금의 총리공관 일대 땅을 이윤용(이완용의 배다른 형)에게 하사했다.  (그 옆 땅 주인은 친일파 송병준이었다.) 친일파 민규식이 여기서 살았고,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으로도 쓰였다. 정부 수립 뒤 잠시 국회의장 공관으로 썼다. 1961년 5월 당시 내각수반인 송요찬이 집무하면서부터 총리 공관이 됐다. 삼청동에는 조선초부터 화약고가 있었다. 안전 문제 때문에 민가가 드문 한적한 산 속에 지었을 테다.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안에 있는 기기국 번사창. [대통령 경호처]

금융연수원 안에 번사창이 있다. 조선말 기기국 소속 건물이다. 기기국은 고종 때 지은 한국 최초의 신식 무기 공장이다. 지붕 모양, 벽돌 쌓기, 창문 형태 등에 중국과 서양식이 섞여 있다. 중국 톈진 출신 기술자들의 손을 빌어 지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세균실험실로, 미군정 때는 중앙방역연구소로, 정부 수립 뒤에는 사회복지연수원으로, 1970년 이후에는 한국금융연수원 소유가 됐다.
팔판동은 조선시대 판서 8명의 판서가 살았다는 ‘팔판서골’에서 유래했다.

근대 교육의 중심지, 화동(花洞)
조선시대 왕궁의 꽃을 기르고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 서쪽인데 사육신 중의 하나인 성삼문의 집터이기도 하다. 지금 정독도서관 자리에 한국 첫 정규 중등교육기관인 한성중학교가 있었다. 대한제국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서재필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가산을 몰수했다. 이들의 집터 위에 한성중학교를 세웠다. 이후 박제순 집터도 학교 터로 들어갔다. 한성중학교는 한성고등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어갔다. 1938년에 지은 학교 건물은 스팀 난방시설까지 갖춘 당시 최고급 건축물이었다. 광복 뒤 이름을 경기고등학교로 바꾸고, 1976년 강남으로 이전했다.

건춘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점선). [대통령 경호처]

사연 많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소격동(昭格洞)
소격동은 화동과 함께 서울 북촌의 중심이다. 북촌이란 종로의 윗동네 중에서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말한다. 풍수지리상 길지로 여겨져 사대부와 왕궁 및 관청 관계자들이 많이 살았다. 도교의 제사인 초제를 주관하던 소격서가 있었다. 지금 소격동의 절반 정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1980년에 전통가옥 보존지구로 지정됐는데 10년 뒤 해제했다.
한때 광화문은 소격동에 있었다. 일제가 1918년 조선총독부(1918년 8월 25일~1929년 10월 1일 완성)를 지을 때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긴 것. 1968년이 돼서야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으로는 종친, 외척, 왕궁 관계자들이 주로 출입했다. 조선시대 종친은 왕의 4대손까지를 말한다. 건춘문 맞은편에 역대 왕실관련 각종 사무를 보던 종친부가 있다. 종친부 옆에 왕의 기록과 친필 등을 보관하던 규장각이 있었다. 창덕궁에 있다가 옮겨왔는데 지금은 서울대학교 안에 있다.

일제는 종친부 건물 일부를 수도육군병원으로 썼다. 이 자리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설병원, 서울대의대 제2부속병원, 제36육군병원, 수도육군병원, 국군수도통합병원, 육군보안사령부, 국군서울지구병원, 테니스장으로 쓰다가 2013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됐다. 종친부 건물도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현재 남아 있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설병원 건물은 서울대 의학부 건물과 함께 이땅에서 가장 오래된 의료 건물 가운데 하나다.

풍문여중, 풍문여고 자리. 왼쪽 3층 건물은 1965년까지 있었다. [종로구청]

왕이 그러면 되겠어요? 사간동(司諫洞)
건춘문의 길 건너편 사간원이 있던 동네다. 사간원은 왕에게 간쟁하고, 신료 탄핵, 법률 제정 논의, 5품 이하 관료 인사 등 막강 권력을 가진 기관이다. 왕의 전횡을 견제하고 권력의 중심을 잡는 자리였기에 강직하고 학문 뛰어난 사람을 선발했다. 경복궁을 지으며 동서쪽 모퉁이에 쌍둥이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만들었다. 도로를 내며 동십자각은 섬이 되었고. 서십자각은 일제 때 전차 길을 내며 없어졌다.

송현동(松峴洞) 대부분은 이건희미술관(옛 미 대사관 직원 숙소)이 들어설 자리와 덕성여중이 차지하고 있어 주택은 몇 채 안 된다. 소나무가 많은 고개 ‘솔고개’ 또는 ‘솔재’에서 온 이름이다. 경복궁의 풍수지리를 보완하려 보호하던 소나무 숲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에서 북촌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이 안국동(安國洞)이다. 덕성여고와 공예박물관(옛 풍문여고)이 있는 동네다. 골목 안쪽에 청국장 잘하는 별궁식당이 있다. 꼬릿한 냄새를 잡아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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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청와대 개방이 반갑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손님이 많아져 좋지만 가게 세가 뛸까 겁난다. 가로수길, 홍대앞, 경리단길 같은 데서 벌어진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를 봤기 때문이다. 골목길 안쪽에 사는 원주민들은 조용하던 일상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통의동에는 역사 책을 주로 내는 출판사 푸른역사가 있고, 또 역사 전문서점 역사책방이 있다. 동네 분위기와 어울린다. 2006년 이 동네 한옥에 자리 잡은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에게 물어봤다.

-청와대 개방 뒤 사람 많이 늘었지요?
“서촌 일대는 일요일에는 비교적 한가했어요. 그런데 일요일에 점심 식사하러 나왔더니 북적북적해요. 경복궁~청와대~토속촌 삼계탕 코스는 코로나 이전에 중국 단체관광객들의 기본 동선이었어요. 이 코스가 부활할 수 있겠네요.”

-동네를 걸으며 사람들이 무얼 보면 좋을까요.
“상층 양반문화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북촌에 비해 서촌은 열린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시인 이상·윤동주, 화가 이쾌대·이여성 형제 같은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았겠지요. 특정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조선시대 이래 해방공간까지 이곳에 살던 이들을 생각하며 걸으면 색다른 느낌일 거예요. 곳곳에 우리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잖아요.”

-개방한 청와대가 어떻게 변할지도 궁금하겠어요.

“어떤 형태로 재탄생할지는 이쪽 동네 사람들 목소리도 들어봐야 해요. 세계 최대 공연장을 짓자는 허황된 얘기도 나오는데 여기만큼은 성장개발의 논리가 미치지 않았으면 해요,”

-실패하지 않을 동네 밥집 몇 개 찍어주세요.
곰탕은 한옥식당 ‘고래’, 오리로스·닭백숙·장어탕은 토속촌 옆 ‘순이네’(옛날 인심이 살아있어요), 이탈리아 음식은 ‘더솔키친’, 메밀국수는 ‘메밀꽃 필 무렵’, ‘꾸스꾸시’에 가면 튀니지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걷기 좋은 코스 하나 꼽는다면….

옥인길~수성동계곡~인왕산 둘레길~더숲초소카페가 좋아요. 카페 앞에서 시내를 보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려요.
(더숲초소카페는 일대를 지키는 군 경비초소가 있던 자리에 만들었다. 주차 공간이 몇 대 안 돼 차 가지고 가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박혜숙 대표가 추천하는 산책 코스

약이 되는 정보 둘

▶청와대 앞길약 500m 차 없는 거리 운영시범 운영: 5월 28일부터 6월26일까지 주말과 공휴일 12회.

▶인왕산로 차 없는 거리를 시범 운영: 호랑이 동상부터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약 1.5㎞ 양방향. 5월 22일, 29일 8시~12시 2회.

글·그림=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