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섬진강변 봄꽃 잔치
구례 산수유마을 ‘노오란 열꽃’ 만발
주인-집터 닮은 매화의 절개
역사를 밟고 가는 길은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지만, 봄날 봄꽃길만큼은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은 설렌다. 노란색 꽃이 봄의 합창을 하고 있는 구례 산수유마을은 산동면 상위마을, 반곡마을, 계척마을 등 산수유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마을들을 가리킨다.
산수유마을 중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상위마을은 아래로 굽어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정자 ‘산유정’에 올라서면 산수유꽃을 ‘마른 가지에 번지는 노오란 열꽃’으로 묘사한 오세영의 시가 떠오른다. 상위마을은 지리산 만복대 자락을 따라 형성된 다랑논과 계곡 사이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시내가 정취를 더해준다. 산수유는 노란 꽃잎 때문에 흔히 개나리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두 꽃은 빛깔 분위기가 다르다. 개나리의 샛노란 빛이 해맑은 어린아이와 같다면 산수유의 ‘노오란’ 파스텔톤 빛은 고아한 여성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 전북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계척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있는 곳이다. 중국 산둥반도가 원산지로 알려진 산수유나무는 1000년 전 산둥성 여인이 지리산 자락으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 산수유나무의 약 65%(10여만 그루)가 이 일대에서 자라고 있는 이유다. 흥미롭게도 이 마을에는 ‘남도 이순신길-백의종군로’라는 푯말도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이 구례를 오갈 때도 이 산수유나무를 보았을 게다.
먼저 구례 화엄사엔 홍매화와 들매화가 있다. 홍매화는 1702년 계파선사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기념으로 심은 매화나무다.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 귀퉁이에 서 있는 이 홍매화는 금강송처럼 꽃송이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형태다. 해마다 봄만 되면 장엄하면서도 위풍당당한 이 매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화엄사로 몰려든다. 화엄사 측은 아예 ‘화엄 천년의 공간, 향기에 취하다’는 주제로 2022년 ‘홍매화·들매화 전문 사진 및 휴대전화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홍매화 주변은 전문 사진작가들과 일반인들의 사진 촬영으로 야단법석이다.
홍매화는 꽃색이 매우 고혹적이다. 햇살 방향과 날씨에 따라서도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구름이 낀 흐린 날은 분홍빛, 약간 밝게 흐린 날은 선홍빛, 아주 쾌청한 날 역광을 받았을 때는 검붉은 빛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화엄사 홍매화는 ‘흑매’로도 불린다.
홍매화와 함께 화엄사를 대표하는 또 다른 매화나무는 화엄사 뒤편 구층암 근처(길상암 입구)에 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저절로 자란 야생 매화인 들매화(천연기념물 제485호)다. 원래 4그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 그마저도 노쇠해 절정의 개화기인데도 활짝 핀 꽃송이를 보기가 어렵지만 올곧게 수행한 노승(老僧)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매천의 발자취는 그 이웃인 운조루(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도 나타난다. 경부 최부잣집과 곧잘 비교되는 호남의 대부호 집이 운조루다. 이곳 류씨 주인들은 매천과 가까이 교류했다. 매천은 칠언시로 운조루의 풍광과 정취를 노래했을 정도로 이 집을 좋아했다. 또 운조루의 주인 류형업(1886∼1944)은 매천의 자결 소식을 듣고서는 “이것은 가히 의로운 죽음이라 할 것이니 유방백세(流芳百世·향기가 100대에 걸쳐 흐름)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글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운조루 사랑채와 연결되는 정자는 매천 등 구례의 선비들이 즐겨 모여 담소를 나누던 현장이다. 이 정자에서는 마당 쪽으로 오래된 매화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운조매’라고 불리는 이 매화나무는 1776년 운조루를 지을 당시 이식했던 나무가 고사한 뒤 뿌리 부근의 가지 하나가 되살아나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의 역사와 함께해 온 운조매는 부자이면서도 나눔을 적극 실천해온 집주인들을 닮은 듯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분위기를 내는 게 인상적이다.
운조루 바로 인근에는 또 다른 부자 명당인 곡전재가 있다. ‘금가락지가 떨어진 땅’이라는 의미로 금환낙지(金環落地) 명당터로 불리는 이곳은 금가락지처럼 둥글게 돌담을 두른 형태가 특징적이다. 2.5m 정도의 돌담장 사이로 홍매화, 백매화, 산수유꽃이 동시에 피어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현재 한옥 체험 민박으로 운영되고 있는 곡전재에서 봄꽃을 감상하면서 부자 터 기운을 덤으로 쐬어보는 것도 좋다.
봄꽃 나들이에는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섬진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나는 벚굴이 제철이다. 성인 남성 손바닥만 한 엄청난 크기에 오동통하면서도 쫄깃쫄깃한 굴 속살이 일품이다. 바다에서 나는 굴과 달리 담백한 맛도 난다.
글·사진/구례·광양=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구례 산수유마을 ‘노오란 열꽃’ 만발
주인-집터 닮은 매화의 절개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의 매화 꽃밭. 백매화와 홍매화가 어울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운데, 그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섬진강변 지방도 861호선을 따라가면 산기슭마다 매화나무 군락지를 감상할 수 있다.
《봄꽃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지리산까지 행진하고 있다. 전남 광양 매화마을에서 한바탕 꽃잔치를 벌인 매화는 섬진강변을 울긋불긋 수놓더니 전남 구례 지리산까지 파고든다. 매화에 뒤질세라 지리산 자락 구례군 산동면에서는 산수유가 또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중이다. 광양과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이어지는 봄꽃 길은 그 옛날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의 길’이기도 하다. 1597년 8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궤멸되다시피 한다. 이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돼 섬진강변을 따라 북상하며 수군 재건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때 그 육로는 이순신의 희생과 고뇌로 얼룩진 길이었지만, 4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화사한 꽃길로 변신했다.》○ ‘노오란 열꽃’이 핀 산수유마을
산수유에 둘러싸인 구례 산수유마을 풍경.
전남 구례는 이순신이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곳이다. 이순신이 육지에서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한 군량미를 처음으로 확보했던 곳이 바로 곡창지대 구례다. 백의종군으로 남하했을 때도 구례 현감과 백성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구례의 이순신 백의종군 길목은 지금은 산수유마을로 변신했다.역사를 밟고 가는 길은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지만, 봄날 봄꽃길만큼은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은 설렌다. 노란색 꽃이 봄의 합창을 하고 있는 구례 산수유마을은 산동면 상위마을, 반곡마을, 계척마을 등 산수유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마을들을 가리킨다.
산수유가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과 바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위마을 아래로는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로 유명해진 반곡마을의 산수유 꽃담길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꽃담길을 따라 더 아래로는 산수유문화관과 산수유사랑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언덕배기에 조성된 사랑공원에는 산수유를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과 함께 산수유 정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포토존이 여러 군데 있다. 평일임에도 빨간 산수유즙을 파는 좌판들이 들어섰고, 이곳에서 맛보는 산수유 막걸리 한잔은 봄꽃 향연의 흥취를 더욱 돋워준다.한편 전북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계척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있는 곳이다. 중국 산둥반도가 원산지로 알려진 산수유나무는 1000년 전 산둥성 여인이 지리산 자락으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 산수유나무의 약 65%(10여만 그루)가 이 일대에서 자라고 있는 이유다. 흥미롭게도 이 마을에는 ‘남도 이순신길-백의종군로’라는 푯말도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이 구례를 오갈 때도 이 산수유나무를 보았을 게다.
○구례 매화엔 스토리가 있다
수령 300여 년으로 추정되는 화엄사 홍매화. 밝은 날 역광을 받으면 꽃 색깔이 검붉어 ‘흑매’라고도 불린다.
꽃나무는 임자를 만났을 때 그 향기가 더욱 진해진다. 꽃나무가 사람을 만나 ‘스토리’라는 보이지 않는 물감으로 채색되기 때문이다. 흐드러지게 핀 산수유 사이로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는 구례 매화들이 그렇다. 구례의 매화나무는 저마다 스토리 빛깔이 다르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암향(暗香)도 독특하다.먼저 구례 화엄사엔 홍매화와 들매화가 있다. 홍매화는 1702년 계파선사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기념으로 심은 매화나무다.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 귀퉁이에 서 있는 이 홍매화는 금강송처럼 꽃송이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형태다. 해마다 봄만 되면 장엄하면서도 위풍당당한 이 매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화엄사로 몰려든다. 화엄사 측은 아예 ‘화엄 천년의 공간, 향기에 취하다’는 주제로 2022년 ‘홍매화·들매화 전문 사진 및 휴대전화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홍매화 주변은 전문 사진작가들과 일반인들의 사진 촬영으로 야단법석이다.
홍매화는 꽃색이 매우 고혹적이다. 햇살 방향과 날씨에 따라서도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구름이 낀 흐린 날은 분홍빛, 약간 밝게 흐린 날은 선홍빛, 아주 쾌청한 날 역광을 받았을 때는 검붉은 빛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화엄사 홍매화는 ‘흑매’로도 불린다.
홍매화와 함께 화엄사를 대표하는 또 다른 매화나무는 화엄사 뒤편 구층암 근처(길상암 입구)에 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저절로 자란 야생 매화인 들매화(천연기념물 제485호)다. 원래 4그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 그마저도 노쇠해 절정의 개화기인데도 활짝 핀 꽃송이를 보기가 어렵지만 올곧게 수행한 노승(老僧)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크게보기구례 부잣집 곡전재의 둥그런 담장에 핀 봄꽃들.
이뿐이랴. 산사에서 벗어나 속세로 내려오면 매천사(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의 매화를 빼놓을 수 없다. 매천사는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를 남기며 자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1855∼1910)을 기리는 사당이다. 사당 이곳저곳에 심어놓은 매화나무는 지조 있는 조선 선비 정신을 상징하는 듯, 맑고도 서늘한 향기가 감도는 것 같다. 그 향기에는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하는 매천의 절규가 담겨 있는 듯했다.매천의 발자취는 그 이웃인 운조루(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도 나타난다. 경부 최부잣집과 곧잘 비교되는 호남의 대부호 집이 운조루다. 이곳 류씨 주인들은 매천과 가까이 교류했다. 매천은 칠언시로 운조루의 풍광과 정취를 노래했을 정도로 이 집을 좋아했다. 또 운조루의 주인 류형업(1886∼1944)은 매천의 자결 소식을 듣고서는 “이것은 가히 의로운 죽음이라 할 것이니 유방백세(流芳百世·향기가 100대에 걸쳐 흐름)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글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운조루 사랑채와 연결되는 정자는 매천 등 구례의 선비들이 즐겨 모여 담소를 나누던 현장이다. 이 정자에서는 마당 쪽으로 오래된 매화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운조매’라고 불리는 이 매화나무는 1776년 운조루를 지을 당시 이식했던 나무가 고사한 뒤 뿌리 부근의 가지 하나가 되살아나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의 역사와 함께해 온 운조매는 부자이면서도 나눔을 적극 실천해온 집주인들을 닮은 듯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분위기를 내는 게 인상적이다.
운조루 바로 인근에는 또 다른 부자 명당인 곡전재가 있다. ‘금가락지가 떨어진 땅’이라는 의미로 금환낙지(金環落地) 명당터로 불리는 이곳은 금가락지처럼 둥글게 돌담을 두른 형태가 특징적이다. 2.5m 정도의 돌담장 사이로 홍매화, 백매화, 산수유꽃이 동시에 피어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현재 한옥 체험 민박으로 운영되고 있는 곡전재에서 봄꽃을 감상하면서 부자 터 기운을 덤으로 쐬어보는 것도 좋다.
광양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의 장독대에 놓인 3000여 개의 옹기들.
구례 산수유마을처럼 온 동네가 매화로 치장한 곳을 보고 싶다면 광양 매화마을로 가볼 일이다. 매천의 고향이기도 한 광양은 해마다 매화축제가 열리는 다압면 매화마을이 유명한데, 특히 16만5000m²(약 5만 평) 이상의 산자락에 10만 그루의 매화나무들이 들어선 홍쌍리 청매실농원의 풍경이 빼어나다. 아득한 구름숲처럼 보이는 매화꽃밭 사이로는 평일임에도 인파가 넘쳐나고 주차장은 차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화사한 홍매화와 맑고도 깨끗한 백매화 숲 너머로 펼쳐지는 섬진강변 풍경을 즐기기 위해 봄이면 전국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봄꽃 나들이에는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섬진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나는 벚굴이 제철이다. 성인 남성 손바닥만 한 엄청난 크기에 오동통하면서도 쫄깃쫄깃한 굴 속살이 일품이다. 바다에서 나는 굴과 달리 담백한 맛도 난다.
글·사진/구례·광양=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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