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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정규재 칼럼] 윤석열 시대에 주는 고언-통합과 협치 아니라 법과 원칙이다

 

[정규재 칼럼] 윤석열 시대에 주는 고언-통합과 협치 아니라 법과 원칙이다
  •  펜앤
  •  최초승인 2022.03.11 16:01:11
  •  최종수정 2022.03.1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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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주필

윤석열 시대가 열렸다. 권력은 윤석열 당선자가 하기에 따라 더 강고해질 수도 있다. 한국은 지금 사회 전반에 좌경화 현상이 심각하다. 문재인 지지율이나 이 치열한 선거전에서 더 숨길 수도 없이 드러난 투표성향은 이를 잘 말해준다. 좌경적 성향이 높은 것은 한국인의 삶이 풍요해지면서 그 공간을 타고 주자학적 농업적 전통적 세계관이 확고하게 재부상했다는 뜻이다. 모든 대륙의 전통사회는 좌경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동체주의적이며 사회적이다. 그리고 그런 충동은 전통적 가치관을 파고든다. 이것이 20세기가 말해주는 열전과 냉전의 전쟁 지도다.

전통사회의 좌경적 본질이 정치 전면에

당선 2일 차를 맞은 윤석열 당선자에 대한 언론들의 주문은 일제히 통합과 협치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조선에서부터 한겨레까지가 모두 그런 논조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요 하나마나한 교언영색의 헛소리다. 분열하고 좌우의 편을 가르라는 뜻이 아니다. 말인즉슨 문 정권이 워낙 편갈이 정치를 했기 때문에 부디 갈등과 분열 없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뜻이겠지만 통합과 협치라는 말이야말로 분열을 낳고, 기표와 기의가 다른 위선적 정치를 낳고, 국민을 가치 혼동과 정치적 혼란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정치는 분명한 언어여야 하고 원칙과 철학이 분명해야 한다.

통합 협치 아닌 법과 원칙이라야

통합과 협치의 불명료성이 아니라 광장에 내걸린 깃발처럼 진퇴가 분명하고 좌우가 분명해야 사회의 질서가 잡히고 국민 모두가 그 신호의 명확성 속에서 자신의 삶을 분명하게 설계하는 것이다. 통합과 협치라는 구호가 불유쾌한 것은 그 말속에 무정견과 무책임과 적당한 타협과 엄정함의 부재 즉, 법치의 실종이 깃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멍들이 결국은 댐을 무너뜨리게 된다. 네 편 내 편을 따지라는 것이 아니다. 내 편 내 편이라는 저차원의 구분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다만 윤석열 정권에서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되는 지가 명확해야 각 정파간 협상 비용을 줄이고 소위 정치흥정의 국력 소모 과정을 줄이고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자가 ‘깃발 하나 바로 세우면 천하의 질서가 저절로 잡힌다’고 말한 바로 그것이다. 

통합과 협치는 원칙과 철학을 훼손하게 되고 국가의사결정 과정에서 사회적 기득권의 크기를 다투는 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지금도 국정의 온갖 분야에서 원칙이 폐기되고 오로지 갈등의 상대적 크기를 경합하는 세력들이 승기를 잡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정부 구조만 해도 그렇다. 통합과 협치의 행정구조 즉, 합의제 위원회 제도로 설계되어 있는 수많은 국가기구만 하더라도 이런 기구가 너무도 많아지면서 국정은 이미 혼탁 그 자체다. 협의제가 아닌 독임제 행정기구로 전환되어야 할 영역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책임을 공동화하는 무책임의 정치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을 즐겨 동원한다. 그러나 분명한 책임은 협치가 아니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사회적 합의는 사회적 갈등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론은 사회적 갈등론

금융위원회는 조속히 금융부 혹은 재무부로 전환되어야 마땅하고 방통위는 그 속에서 정책 관련 업무는 바로 떼어내 산업부 등으로 일원화하는 것이 긴요하다. 최저 임금을 결정하는 경제사회발전 노사정 위원회는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고 국회가 권한을 무한 확장하면서 여당 3자리, 야당 3자리 씩으로 갈라 먹어 왔던 유사 행정기구들은 그 권한을 독임제 행정기구로 이관하는 것이 행정 효율이나 투명성 차원에서 요긴하다. 그것이 국정의 기본이다. 협치라니.

통합과 협치를 말하는 사람들은 적대적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힌 국민 다수 대중을 포용하고 끌어안는 그런 정치를 해달라는 차원에서 이 모호한 언어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이다. 조직된 대중은 어떤 형태건 정치적 지원군이거나 그 파당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통합이나 협치에서 배제되는 것이 맞다. 국민을 진정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을 보편적 원칙에 따라 하나로 취급해야 한다. 그것은 법치와 원칙밖에 없다. 다종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는 5천만 유권자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법치 밖에 없다. 그 외의 모든 의논들은 위선에 불과하고 권력적 배분에서 작은 것이라도 특혜를 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권력과의 원근에 따라 국민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법과 원칙에 따라 국민을 절대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래서 통합과 협치라는 말은 법과 원칙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것이 맞다. 법과 원칙이라는 언어는 질적으로 법치주의라는 말과 같다. 국가가 그리고 권력이 자의성을 극력 배제하고 냉정한 판단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모든 세련되고 성숙한 사회의 기본적 특질이다. 통합과 협치라는 말은 권력을 나누어 갖자는 비열성을 그 안에 함축하고 있다. 무엇을 더 나누어 먹자는 것인가.

문재인 처벌 문제를 얼버무리지 마라

혹자는 통합과 협치라는 말로 국민을 증오로 몰아넣지 않는 그런 품위 있고 조화로운 정치를 강조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문재인을 의법 처리해야 하는가 아닌가. 만일 통합과 협치를 말하는 자라면 동시에 문재인을 의법처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윤석열 당선인은 시스템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번 권력의 자의성은 나름대로 배제할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사면권을 가진, 최고 수준의 정치적 존재다. 그리고 문재인은 이미 사실상 확정된 범죄만 해도 여러 건이고 엄밀하게 죄를 묻는다면 여적죄에 국가보안법까지 십여건 범죄에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이 크다. 자, 이 문제를 빼놓고 통합과 협치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노무현의 범죄는 통합과 협치를 몰라서 이명박 정권의 검사들이 나서야 했나. 윤석열이야말로 문재인 정권의 칼잡이가 되어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겐 다스는 “당신 회사!”라는 관심법적 판결로 역시 감옥행을 몰아부쳤던 것이다. 통합과 협치를 말하는 자들은 이 문제부터 답해야 한다. 문재인의 범죄를 불문에 부치자는 것인가,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 보복에 반대한다. 문재인에 대해서도 범죄의 진상을 밝히되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만일 통합이나 협치라는 말로 문재인에 대한 치죄를 반대한다면 그 말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맞다. 아니라면 통합이니 협치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엄연한 대통령제 국가다. 통합과 협치는 대통령제 헌법과는 다른 정신이요 철학이다.  

새 대통령에게 주는 충고랍시고 그리고 듣기 좋다고 아무 말이나 둘러대는 그런 헛구호는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통합과 협치를 말하는 자들의 위선적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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