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간석지 270만평을 논으로…5000여 주민의 젖줄
호남 거부 현준호와 영암 학파농장
전남 영암군 서구림리에 있는 상대포. 예부터 경치가 빼어난 미항으로 소문났던 곳이다. 근처에 왕인박사 유적지가 있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통영 사람들은 세계 3대 미항인 시드니·나폴리·리우데자네이루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통영만 못하다고 말한다. 통영항은 규모 면에서 이들 미항과 비교될 수 없는데 통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통영항이 지닌 소박함과 정겨움 때문이라고 본다. 한려수도에 펼쳐진 작은 섬들 사이를 지나 항구 입구에 들어서면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 품에 선뜻 다가선 듯한 느낌이 든다. 앞에 마주한 왼쪽 미륵산과 오른쪽 남망산으로 휘감겨진 모습이 어머니 젖가슴과 같아서이다. 이런 이유인지 몰라도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통영의 파도 소리와 바다를 가로지르는 통통배 소리를 배경 삼아 연주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 바 있다.
소작료 깎아주고 임차권도 인정
미항으로 소문났던 영암 상대포
순박한 사람들 살아온 선비마을
친일논란에 6·25 때 사살된 현준호
역사의 비극은 어떻게 설명할까
왕인 박사·최치원이 떠난 곳
풍수가 뛰어난 영암 구림마을. 사진 뒤로 월출산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우리나라에 통영만한 미항은 또 없을까. 물론 있다. 단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이다. 영산강 물줄기 상에 있는 영암 구림(鳩林)의 상대포가 대표적 미항이었다. 구림은 통영과 달리 국제항으로서 자태를 뽐내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때 여기서 주로 배를 타고 중국과 일본으로 떠났다. 그래서 백제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들고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는 전설이 있고, 신라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 갔다는 사실이 있다. 당나라는 외국인을 위한 과거를 별도로 실시했기에 통일신라의 젊은 인재들도 여기서 당나라를 향해 떠났다. 젊은이뿐이겠는가. 상인도 구림의 명품 도기(陶器)를 들고 서해와 남해를 들락거리지 않았겠는가.
다도해를 거쳐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나주로 가는 물길과 갈라지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구림을 만난다. 강을 따라 구림에 다가갈수록 월출산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는데 이 산을 배경 삼아 펼쳐지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월출산 천왕봉 기세가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다가 멈춰 선 곳이 구정봉이고, 거기서 다시 남서쪽으로 이어진 곳이 주지봉이다. 주지봉 양쪽에서 흘러내린 좌청룡 우백호가 구림을 감싸고,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구림천이 마을의 탯줄 역할을 하면서 영산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여기서 풍수지리가 말하는 이상적인 터를 볼 수 있다.
호남 거부 현준호 추모비.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도덕경』은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개울이 된다”라고 말한다. 이 내용을 구림에 대입하면 “수컷 월출산과 암컷 영산강을 지키면 구림은 천하의 개울이 된다”로 바뀐다. 이어서 노자는 “천하의 개울이 되면 덕이 늘 떠나지 않아 어린애 상태로 되돌아간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구림이 천하의 개울이 되면 어린애와 같은 순박미를 지닌다. 구림은 이런 순박미를 지녔기에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가 태어날 수 있었고,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마을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했다고 본다. 한편 도선국사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는데 비둘기들이 살렸다고 해 구림, 즉 비둘기 숲이란 이름이 여기서 생겨났다.
이런 이유로 구림 사람은 순박해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동계를 결성해서 조선 명종 때부터 최근까지 운영해 왔다. 대동계란 일종의 향약으로 자치적인 마을 규약이다. 그래서 ‘법대로 하자’는 격조 떨어지는 말은 구림에선 도덕과 윤리와 상식에 의해 묻히고 만다. 이런 자치적 공동체는 마을 입구에 있는 회사정(會社亭)이란 정자를 중심으로 뿌리내렸다. 그런데 어이 된 일인지 이 순박한 마을에 청천벽력과 같은 피바람이 몰아쳤다. 해방 후 좌우 세력 간의 치열한 대립 탓이다. 뒤이어 터진 한국전쟁도 가세해 이 마을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크지 않은 마을에 19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좌우대립·한국전쟁이 남긴 상처
구림마을 입구의 회사정.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이와 비슷한 시기 명맥만 유지하던 상대포 항구 기능은 완전히 멈췄다. 바다에 접한 인근 항구에 역할을 넘겨서이다. 과거에는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내지의 큰 고을에서 해안가 항구로의 이동이 불편했다. 게다가 해안가는 왜구 침입 등으로 위험이 상존해 내륙으로 들어올수록 항구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산과 강이 함께 어우러지는 멋진 항구가 내지에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처럼 내륙 교통이 발달한 상황에선 상대포와 같은 항구는 경쟁력을 잃게 마련이다. 이런 가운데 구림 앞에 펼쳐진 서호면 일대 간척지가 모두 매립되어 물길이 막히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항구의 명맥마저 끊어졌다.
간척지 매립은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한 거니까 과거 배고픔이 일반화된 상황에선 불가피한 사업이다. 이 사업을 진행한 사람은 당시 호남 최고의 부자 현준호(1889~1950)다. 그는 구림 앞에 펼쳐진 간척지를 매립해서 논을 조성하고 이를 학파농장이라 명명했다. 이 농장은 270만 평 규모였는데 여기서 생산된 쌀로 2개 면 사람에 해당하는 5000여 명이 먹고 살았고, 농장 인근에 6개 동이 새로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무송동인데 무송(撫松)은 현준호의 호다. 이 매립사업은 당시로선 대단한 기업가 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므로 현준호는 농업시대 정주영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정주영의 며느리 현정은은 현준호 손녀다.
현준호가 세운 호남은행 목포 지점. 현재 목포문화원으로 쓰고 있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현준호는 지주로서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당시 학파농장을 관리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작료는 수확량의 30%였는데 실제로는 15%에 불과했다. 소작료를 늘 평년작 미만 기준으로 책정하는 등 소작인을 많이 배려해서다. 또 보리농사 수확물은 소작인 소유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소작인에게 토지 점유권을 주어 소작을 계속하기 위해 감수해야만 하는 소작인의 억울함을 원천적으로 해결했다. 게다가 점유권을 사고팔 수 있어 사실상 소유권을 인정했다. 이는 지주로서 생각할 수 없는 혁명적 조치다. 이 마을 한가운데에는 마을 사람이 주동이 되어 세운 그의 추모비가 한 점 훼손됨이 없이 잘 보존되고 있다.
현준호는 간척사업을 벌이기 전에는 호남은행을 설립한 은행가였다. 호남의 또 다른 갑부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통해 문화사업을 벌였다면 현준호는 은행을 통해 민족자본을 육성했다. 호남은행은 일본인을 행원으로 쓰지 않고, 일본말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는 걸 내부 경영원칙으로 삼아 명실상부한 민족은행이 되고자 노력했다. 이 점이 민씨 일가가 주동이 되어 세운 천일은행과 다르다. 호남은행은 일제의 미움을 사 결국 문을 닫았다. 은행 청산과정에서 생긴 돈 일부를 군용기 구입 자금으로 헌납하자 그에게 친일파라는 낙인이 붙여졌다. 이런 행동은 사업가로서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인 듯싶은데 기계적으로 단죄한 게 아닌가 싶다.
천혜의 자연을 훼손한 책임일까
현준호
그런데 친일파란 낙인보다 더 큰 비극이 해방 후 그에게 닥쳤다. 큰아들과 함께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고, 둘째 아들은 한국전 때 국군 소령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전사했다. 현준호가 인민군에 잡혔을 때 따뜻한 보리밥 한 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 큰 부자가 구금 당시 얼마나 먹지 못했으면 지금까지 이런 얘기가 전해질까? 그런데 이런 비극이 어째서 그에게 닥쳤을까? 평소 자신이 베푼 게 많아 전란 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과신한 탓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간척지 매립으로 구림이 지닌 천혜의 아름다움을 훼손한 책임을 하늘이 그에게 물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난다.
장자는 “길을 걷지 않고 걷기란 쉬워도 땅을 밟지 않고 걷기란 어렵다”라고 말한다. 현준호는 부자로서 자신의 부만 간직하는 쉬운 길을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발에 흙이 묻어도 땅을 밟고 걷는 어려운 길을 자진해서 선택해 간척지 매립에 뛰어들었다. 장자는 이어서 “사람을 위해 부림을 받을 적에는 사람을 속이긴 쉬워도 하늘을 위해 부림을 받을 적에는 하늘을 속이긴 어렵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준호의 간척지 매립은 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결코 속이지 못한 걸까? 그렇지 않고선 그의 비극적 죽음을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구림 마을의 비극도 이렇게 설명해야 그나마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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