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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삶

우상은 왜 ‘I’dol일까…“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에 담긴 깊은 뜻 [백성호의 예수뎐]

우상은 왜 ‘I’dol일까…“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에 담긴 깊은 뜻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2.01.15 05:00

[백성호의 예수뎐]

성서에 정겨운 일화가 한 토막 있다. 예수가 고향 나사렛에 머물 때였다. 그날도 예수는 유대교 회당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회당 밖에서 사람을 보내 예수를 불렀다.(마가복음 3장 31절)

나는 눈을 감고 그 광경을 그려본다. 혹시 그때가 저녁 무렵은 아니었을까. 성서에 기록된 그 대목이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예수아! 밥 다 됐다. 집에 와서 저녁 먹어라!” 그런 전갈은 아니었을까. 2000년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 그리스어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한 외교용 언어였다. ‘예수(Jesus)’의 이름은 아람어로 ‘예수아(Yeshua)’이다. 이런 광경을 그려보면 왠지 가슴이 따듯해진다. 예수가 우리가 사는 동네 골목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친근한 누군가로 다가온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벽화.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십계명 중에서도 중요한 계명이다. [중앙포토]

 

(34)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에 담긴 깊은 뜻

예수에게 그 전갈이 갔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가복음 3장 32절) 예수는 사람들에게 되물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사람들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예수를 쳐다봤을 터이다. 예수는 자신을 빙 둘러싼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장 35절)

예수의 대답은 파격이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고, 그 속성을 공유하는 이의 답이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섰다. 예수의 ‘물음’이 가슴에 꽂혔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예수의 대답도 가슴에 꽂혔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는 왜 그리 묻고, 왜 그리 답했을까. 예수는 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형제ㆍ자매라고 했다. 그들은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나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안고 눈을 감았다.

예수는 "신의 뜻을 실행하는 자라야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다"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사람.’ 무슨 뜻일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순종일까. 아니면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것이 순종일까. 그도 아니면 신학교를 나와서 사제가 되고, 수녀가 되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순종일까.

대체 예수가 말한 ‘순종’은 무엇일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문제 속에 늘 답이 있다. 답과 문제는 한 몸이니. 그럼 ‘순종하는 사람’ 대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먼저 찾으면 된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 그들은 누구일까. 우리는 착각한다. 나와 종교가 다르고 교단이 다른 사람들이라 본다. 과연 그럴까.

모세가 받은 십계명 중 하나는 “우상을 섬기지 마라”이다. 흔히 불상에 절을 하거나 금으로 만든 송아지 따위를 모시는 걸 우상이라 여긴다. 십계명에 담긴 의미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 순종할까. 하느님 뜻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절대자 위의 절대적 힘’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신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수시로 ‘나’를 섬긴다. 나의 기대, 나의 성공, 나의 욕망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이 일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의 뜻’을 따르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도록 기도까지 한다. “~하게 해주십시오!” “제발 ~가 되게 해주세요!” 그러니 결국 누가 누구를 섬기는 걸까.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걸까, 아니면 하느님이 나를 섬기는 걸까.

모세가 하늘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에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있다. [중앙포토]

십계명에서 경고한 ‘우상’은 멀리 있지 않다. 가까이 있다. 하느님보다 더 강력하게, 더 열정적으로 섬기는 ‘나만의 신’. 그 대상이 대체 누구일까.

그렇다. 그건 바로 ‘나’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도 ‘나의 뜻’에는 순종한다. 그러니 법당에 앉아 있는 불상이 우상이 아니라 바로 내가 우상이다. 신의 뜻을 가리는 ‘나의 뜻’이야말로 진정한 우상이다. 그래서 예수는 아람어로 “타브(tab)!”라고 했다.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다. ‘마음의 눈을 돌리라’는 뜻이다. ‘나의 눈’에서 ‘신의 눈’으로 돌리라는 말이다.

그리스 아테네에 간 적이 있다. 30년째 거기서 살고 있는 한국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의 남편은 그리스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리스 정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이곳 사람들의 신앙은 다른 점이 있나요?”

그녀는 며칠 전에 교회 장례식에 참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소 잘 알던 이웃이 자식을 잃었어요. 교통사고였죠. 우리 같으면 하느님께 따지잖아요. 울고불고 매달리잖아요. 왜 내 자식을 데려가시느냐고. 다시 살려 달라고요. 그런데 여기는 달라요. 받아들이는 방식이 놀랍도록 차분해요. 이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모르는 하느님의 뜻이 뭔가’를 물어요. 자기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요. 이곳에서 산 지 30년이 됐지만 지금도 놀랍더군요.”

그것은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게 아니라 ‘신의 뜻’을 묻는, 그리스도교의 고귀한 전통이다. 그 전통의 출발점은 예수다. 그런데 왜 뒤바뀌었을까. 우리는 왜 ‘나의 뜻’이 이루어질 때만 ‘신의 뜻’이 성취됐다고 여기는 걸까. 축구 경기를 할 때도 내가 골을 넣을 때만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한다. 골을 먹을 때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감사의 기도란 내가 바라는 대로 될 때만 올리는 것일까.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에 담긴 계명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중앙포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사람들은 이 계명을 두고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계명’이라고 말한다. 이 계명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를 공격하고 배척하기도 했다. 그런데 십계명의 뜻은 과연 문자 그대로일까. 호수에 파도가 일었다. 갈릴리의 바람과 함께 나는 눈을 감았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여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인도의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갓 태어난 아기가 일곱 걸음을 걸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일화에 담긴 메시지는 진실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건 이적을 실제로 일으켰느냐 하는 사실 여부가 아니다. 그 일화에 담겨 있는 이치(메시지)의 진실성이다. 그런 이치가 우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유롭게 한다.

아기 붓다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 우주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 자신만이 최고라니. 그건 너무 배타적이지 않은가.” 왜 ‘유아독존’일까. 왜 붓다만이 존귀하다고 했을까.

죽도록 보수를 따지는 이들, 죽도록 진보를 따지는 이들은 안목이 좁다. 눈이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꿰뚫어 알맹이를 보는 이들은 다르다. 보수와 진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무엇이 우리 모두를 위한 최선인가?’에 방점을 찍는다.

유대인들에게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진보와 보수는 일종의 방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어느 한쪽의 시각일 뿐이다. 그래서 전체를 담지는 못한다. 진보가 진보를 내려놓고, 보수가 보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오가게 된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둘의 근본이 실은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꿰뚫는 이들의 눈은 남다르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예수의 눈은 무한히 넓고 무한히 깊었다. 예수의 주인공은 껍데기로 보이는 나사렛의 목수가 아니었다. 그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 속을 채웠다는 ‘신의 속성’ 말이다. 그것이 ‘아담의 아들’이라 자처한 예수의 주인공이다.

예수는 그 속성을 회복하라고 했다. 그것을 위해 하느님께 순종하라고 했다. 나의 고집이 하나씩 둘씩 모두 무너지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그렇다. 신의 속성만 남는다. 하느님의 속성만 남는다. 거기가 ‘하느님 나라’이다. 그 나라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뛰어넘어 이 우주에 가득하다. 오직 그것만 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섬기려야 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 있기에 말이다. 이를 붓다는 ‘유아독존’이라고 표현했다. 오직 그것만이 존귀하다고 했다. 그러니 십계명의 구절도, 붓다의 선언도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통합적이다. 둘로 쪼개는 게 아니라 하나로 모은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이슬람 성전이 세워져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역사의 자취를 모두 가지고 있는 땅이다. [중앙포토]

그 눈으로 예수는 물었고, 그 눈으로 예수는 답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갈릴리 호수에 노을이 붉게 내렸다. 하나, 둘, 셋……. 멀리 산 중턱 마을에 불이 켜졌다. 바람이 차가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를 향해 발을 뗐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런데도 우리는 한눈을 판다. 자꾸만 ‘다른 신’을 섬긴다.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나’이다. 나의 고집, 나의 집착, 나의 욕망을 버무려 자꾸만 ‘나’라는 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그 신을 숭배한다. 그게 나의 눈이다.

호수의 수면 위로 메아리가 울린다. 가슴을 때리며 쿵쿵 울린다. 하늘이 묻는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네가 섬기는 우상은 진정 누구인가.”

〈35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는 종교다.”

이렇게 고백하는 기독교 신학자도 있습니다.

이유는 성경에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구약성경 출애굽기 20장 3절)

모세가 하늘로부터 받은 십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목숨처럼 여기는 기독교인은 장벽을 세웁니다.
다른 종교가 행여 자신의 땅에 발을 들일까봐,
행여 내가 다른 종교에 눈길을 돌릴까봐,
스스로 벽을 세웁니다.
높고, 또 두터운 장벽을 말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역사종교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세 당시에는 여러 민족이 태양신 등 여러 신을 믿었다.
 일종의 다신교 사회였다.
 유대인은 이민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지켜야했다.
 그걸 위해 ‘유일신’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역사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합니다.

이 구절을 안고서 묵상해 봅니다.

  “왜 성경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을까.
    …
    그건 내가 이미 섬기고 있는 다른 신이 있기 때문이지.
    …
    하느님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내가 순종하는 다른 신.
    …
    그건 대체 무엇일까.”

이렇게 곰곰이 물음을 던지다 보면 답이 올라옵니다.
내가 섬기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다름 아닌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뜻’을 먼저 묻지 않습니다.
대신 ‘나의 뜻’을 먼저 묻고,
그걸 하느님이 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뜻이 성취되면 "기도가 통했다"고 말하고,
나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도가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만난 기독교의 영성가와 수도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신의 뜻을 먼저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나의 뜻으로 받아들이려 애를 썼습니다.
물론 신의 뜻과 나의 뜻이 다를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 때는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더군요.
그렇게 나의 뜻을 허물더군요.

어쩌면 우상은

나의 밖이 아니라
나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도
어김없이 순종하는 나만의 신.

그건 다름 아닌 나의 에고입니다.

그런 우상을 남겨둔 채,
우리는 밖으로만 화살을 겨누고 있는 건 아닐까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백성호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중앙일보 종교 담당 기자입니다. 일상의 禪, 생활의 영성이 소중하다 생각합니다.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