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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체면 때문에…" 황혼 데이트 폭력 반복 돼도 혼자서만 속앓이

"체면 때문에…" 황혼 데이트 폭력 반복 돼도 혼자서만 속앓이

윤정훈 기자 hoony@imaeil.com , 배주현 기자 pearzoo@imaeil.com
매일신문 입력 2021-12-20 17:35:04 수정 2021-12-20 20:55:03

가해 노인들, 피해 노인 집 찾아 협박하거나 집착·스토킹 위협
피해자들 "자식들 알면 안돼" 숨기기 일쑤
대구 피해노인 보호 전문기관 2곳에 불과…피해 호소·상담 전무
실태 파악조차 어려워

게티이미지뱅크

데이트 폭력 피해 노인은 사별이나 이혼 등으로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아 상대방 가해자가 피해 노인의 집에 찾아와 문을 열라고 협박하거나 집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감시하는 등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다수 노인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걸 꺼려 홀로 숨어지는 데다, 대피할 시설도 부족하다.

◆협박과 스토킹…데이트폭력에 시달리는 노인들

70대 홀몸노인 A씨와 B씨는 올해 초 지인의 소개로 만나 연인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은 데이트 문제로 종종 갈등을 겪었다. A씨는 외식을 하고 영화도 보는 등 일반적인 데이트를 선호했고, B씨는 집에서 데이트를 하며 A씨가 밥을 차려주길 원한 것이다.

B씨의 요구에 A씨는 "한평생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해왔는데 데이트를 하면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단호히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B씨는 "너는 내 돈 보고 만나냐"며 욕을 퍼부었고, A씨의 옷을 찢고 밀치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70대 C씨와 D씨는 지난해 여름 복지관에서 진행하던 스포츠 댄스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사교적인 성격인 C씨는 D씨와 함께 밥을 먹고 D씨를 집에 초대하는 등 친한 친구로서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자신과 C씨가 사귄다고 착각한 D씨는 C씨가 다른 남성 노인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본 뒤, 혼자 사는 C씨의 집에 찾아가 위협하거나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등 협박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C씨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 나이에 남자랑 싸워서 집 떠나 시설에서 생활하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쉼터 입소를 망설였다.

콜라텍에서 만나 호감을 갖고 만남을 지속해 오던 70대 후반 E씨와 F씨는 연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남성인 F씨는 E씨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E씨는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헤어진 뒤에도 F씨의 집착은 계속됐고 심지어 E씨의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기도 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E씨는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주변에 친구를 만나러 왔을 뿐이다'라는 F씨의 말에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다. 결국 E씨는 집을 피해 한동안 친구 집에서 지내야만 했다.

대구 중구에 사는 한 노인(78)은 "복지관에서 알게 된 친구가 1년 전 만나던 남성 노인에게 성관계를 거부했다가 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부끄러워 자식에게 말을 못 하겠다며 친한 나에게만 털어놓았다"며 "막상 내가 피해자라고 해도 이야기하는 게 어려울 것 같다. 나이 먹고 데이트하다가 폭행당했다면 어느 누가 고운 시선으로 보겠느냐"고 했다.

클립아트코리아

◆피해 구제 어렵고 창피해서 피해 사실 숨기기도

대다수 노인에게는 '데이트 폭력' 개념 자체가 생소하다. 그렇기에 폭력 발생 시에도 신고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지인이나 가족에 대한 체면 때문에 주변에 알리거나 신고할 생각을 못하면서 노인들의 데이트 폭력 문제 실태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실제로 대구여성의 전화, 대구노인의전화, 대구 노인보호전문기관 등에 접수된 '노인 데이트 폭력 상담 건수'도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자식에 의한 존속 학대나 남편에 의한 학대 등 가정에서 일어나는 학대는 신고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상태라 관련 상담도 자주 들어온다. 하지만 노인 간 데이트 폭력에 대한 상담은 전무해 사례 발굴도 힘들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만큼 폭력 피해 노인들이 피해 호소까지 용기를 내기 어렵다는 의미다.

데이트 폭력 피해 노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보호시설이 마땅찮다. 현재 대구에 있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은 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 북부노인보호전문기관 등 2곳뿐이다.

학대 받은 노인이 머물 수 있는 학대피해노인전용 쉼터 1곳도 있지만 이는 주로 가정에서 발생하는 노인 학대 예방을 위한 교육과 상담을 지원하고, 입소 때 현장 조사 및 진술 확보, 사례 회의, 대상자의 건강검진 등 절차가 많아 노인 이용이 쉽지 않다.

자녀에게 해당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입소를 꺼리는 것은 물론 나이가 많은 경우 복용 중인 약이 없다는 등의 문제로 폭력 피해 입소가 어렵다. 쉼터 측 역시 나이가 많은 노인을 받기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강난미 대구중구노인상담소 소장은 "노인들은 거주지 등 환경 변화에 특히 거부감이 크기 때문에 자신의 집을 떠나 어떤 시설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안 좋아한다"며 "아무래도 여성보호쉼터엔 자기보다 젊은 여성과 그 자녀들이 대부분이라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 껄끄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껴 이용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대구여성의전화 관계자는 "피해자가 요청을 하면 가정폭력피해쉼터나 긴급피난처에 연결을 하고 가해자와의 분리 조치가 필요하면 경찰 측에 연결해 도와주지만 쉼터 이동은 쉽지 않다"며 "나이가 많고 건강상의 이유로 쉼터 생활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