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보고도 모른척하면 불행이 나에게 돌아온다
조선조 중엽 어느 고을 임초시가 고개넘어 오대인 잔칫집에 갔다가 어둑어둑 해질녘에 외솔고개를 넘고 있었다.
원래 왕래하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문데 땅거미까지 지니 적막강산에 바람소리·새소리뿐이다.
그때 “사람 살려~” 여인의 자지러진 비명이 솔밭에서 찢어졌다.
임초시가 걸음을 멈추고 비명이 난 곳으로 숲을 헤치고 접근해보니 젊은이 둘이서 한 여인을 잡고 있었다.
임초시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여인은 나이를 제법 먹어 사십 줄에 접어든 듯한데 젊은 두 녀석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달려든 것이다.
‘야, 이놈들’ 하고 고함 한 마디만 지르면 젊은 놈들은 도망을 칠 텐데,
임초시 입에서 고함은 안 나오고 침만 질질 흘러 수염을 타고 내렸다.
속치마도 벗겨 내려진 여인이 발버둥을 쳤다.
목을 빼서 자세히 보니 그 여인은 잔칫집에서 창을 뽑던 소리꾼이었다.
‘저 여자가 겁탈을 당하고 목을 매려 했다면 내가 한목숨 살려냈을 거여.’
임초시는 그렇게 자기 양심을 달래며 고개 너머 집으로 갔다.
임초시는 반듯한 양반이다.
비록 급제는 못하고 초시에 그쳤지만 학식이 높아, 사또가 관찰사에게 서찰을 올릴 때도 임초시를 찾고 단옷날 시조대회도 심사위원장은 으레 임초시다.
천만석 부자는 아니지만 재산도 탄탄해 집안에 하인·하녀가 우글거린다.
임초시는 입이 무겁고 행동거지도 반듯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날 이때껏 살아오면서 남을 해코지한 적이 단 한번도 없고, 남으로부터 당해본 적도 없다.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뭔가 아쉬운 구석이 있다.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코피를 흘리며 주먹다짐을 해도 뜯어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한 참 구경만 하다가 제 갈길을 가버린다.
화창한 봄날, 임초시가 전대를 차고 장터에 가려고 집을 나서자 부인을 따라 늦게 본 아홉 살 삼대 독자 아들이 대문 밖까지 나와 “아버님 잘 다녀오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다.
옥색 비단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임초시는 장터로 향했다.
장날, 장터에 가는 것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가슴이 설렌다.
족제비꼬리 붓과 만이천봉 먹을 산 뒤 그는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장터에서 동네 사람을 여럿 만났지만, 함께 먹자 소리 하지 않고, 제 돈 내고 제 혼자 먹고 술도 제 혼자 마셨다.
임초시는 얼 크니 하게 취해서 국밥집을 나와 갖바치 집으로 향했다.
아들 가죽 신발을 비싼 돈을 주고 하나 샀다.
아들 녀석이 이번에 서당에서 또래 중에 가장 먼저 동몽선습을 뗐다.
방물가게에 들러 부인에게 줄 박가분과 동백기름도 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지라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높새바람이 심상찮게 불더니 그렇게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먹구름이 덮이고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온 천지는 칠흑이 되었고 바람은 사람을 날려 보낼 듯이 몰아치고 장맛비처럼 비가 퍼부었다.
비에 흠뻑 젖어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와들거렸다.
마침내 저수지 뚝방길이 나왔다.
집에 거의 다 왔다.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져 저수지 속으로 빠져 물귀신이 될세라 조심조심 걷는데,세찬 비바람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사, 사~람 살려, 어푸어푸….”
발길을 멈췄다.
저수지에 빠진 누군가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장터에서 술을 잔뜩 마신 영감탱이가 빠졌겠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들어가면 둘 다 죽는 법!
그는 서둘러 집으로 갔다.
뚝방길을 건너 백 걸음도 못 미쳐 임초시 집이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부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혼자 오세요?
당신 맞으러 도롱이를 가지고 나간 우리 열이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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