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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기행

발효식품 김치는 수천년 이어온 한국문화의 뿌리

발효식품 김치는 수천년 이어온 한국문화의 뿌리

품앗이 문화 깃든 `한국인의 얼` 김치

삼국유사에 김치·젓갈 등장
고려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에도
"소금 절인 김치는 겨울 반찬" 기록

16세기 말 임진왜란 전후
일본서 고추 들어오며 `빨간` 김치 시작
이후 통배추에 고춧가루·젓갈 등 섞어
한반도 고유의 포기김치로 진화
저온서 유산균으로 발효 독특한 특징

중국이 김치기원으로 주장하는 `저`는
세계 어디에나 있는 채소절임일 뿐

14일 세계지식포럼서 김치세계화 토론

  • 허연 기자
  • 입력 : 2021.09.09 16:42:25   수정 : 2021.09.09 16:43:17

 

◆ 매경 포커스 / 허연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간 ◆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고려말 조선초에 활약한 문신이자 학자인 권근(1352~1409)의 '양촌집' 제10권에 보면 '축채(蓄菜)'라는 시가 나온다. '축채'는 채소를 비축하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니 김장을 뜻한다. 내용을 보자.

시월엔 바람 높고 새벽엔 서리 내려
(十月風高肅曉霜·십월풍고숙효상)
울안에 가꾼 채소 다 거두어 들였네
(園中蔬菜盡收藏·원중소채진수장)
맛있게 김장 담가 겨울을 준비하니
(須將旨蓄禦冬乏·수장지축어동핍)
진수성찬 없어도 날마다 먹을 수 있네
(未有珍羞供日嘗·미유진수공일상)
쓸쓸한 겨우살이 스스로 가엾으니
(寒事自憐牢落甚·한사자련뇌락심)
남은 해 감회가 깊음을 깨닫네
(殘年偏覺感懷長·잔년편각감회장)
앞으로 얼마나 먹고 마실 수 있으랴
(從今飮啄焉能久·종금음탁언능구)
백년 광음이 유수처럼 바쁜 것을
(百歲光陰逝水忙·백세광음서수망)

 

지금으로부터 600년이 훨씬 넘은 시기에 쓰인 문학작품임에도 요즘 김장을 대하는 정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 2013년 유네스코는 우리나라 김장 문화를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했다. 그만큼 김치를 담그는 일은 한국문화의 특성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행위다. 채소를 절여 먹는 문화는 세계 어느 문화권에도 있다. 하지만 김치는 현존하는 채소 절임 문화 중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다. 김치는 전 세계 채소 절임 문화의 최고봉이자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치의 모든 것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풀어본다.

한편 제22회 세계지식포럼에도 김치 세션이 마련된다. 세션은 '김치 세계화는 가능한가'를 주제로 오는 14일 오후 5시 25분 서울클럽에서 열린다. 장 부스케 프랑스 파리 몽펠리에대 명예교수와 이하연 대한민국김치협회장, 박채린 세계김치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발표하며, 민승규 국립한경대 석좌교수가 주재한다.

◆ 사계절 뚜렷한 대륙성 기후가 가져다준 선물 '김치'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는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특히 겨울이 혹독하고 춥다. 김치는 추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탄생한 음식이다. 가을까지 농사 지은 채소류를 조직이 물러지지 않게 발효해서 겨우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게 김치다. 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문헌은 약 3000년 전 중국의 시경(詩經)으로 '외를 깎아 저(菹)를 담그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저(菹)'가 채소 절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김치와 달리 채소를 그냥 소금에 절여 발효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라기보다는 대부분의 문명권에 있는 원시적 채소 절임을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지(漬)'라고도 칭했다. 289년 중국 서진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 편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발효식품을 잘한다'는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인들이 술, 장, 젓갈과 같은 발효식품을 잘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서도 소금에 절인 김치와 젓갈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어 당시 사람들이 소금에 절인 채소를 먹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김치가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첫 문헌은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다. 이규보는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를 통해 외, 가지, 순무, 파, 아욱, 박 등 여섯 가지 채소에 대해 언급했고, '순무로 담근 장아찌는 여름 3개월 먹으면 좋고, 소금에 절인 김치는 겨울 내내 반찬이 된다'고 기록했다.

지금의 김치는 원시 절임 음식을 기반으로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독창적으로 확장·발전시킨 것이다.

◆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는 '침채(沈菜)'에서 유래



김치를 뜻하는 우리 고유어로는 '디히'와 '지'가 있다. '디히'는 순수한 우리말로 어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된 '두시언해(杜詩諺解)'에 따르면 중국의 김치인 '저(菹)'를 '디히'로 번역한 후 '디히-지히-지'로 변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또한 중국의 '저(菹)'가 소금에 절인 것이라 하여 '지(漬)'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지(漬)'는 오늘날 오이지, 짠지, 섞박지처럼 발효식품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전라도나 경상도 지방에서 김치를 칭하는 방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금 가장 흔히 쓰는 말인 '김치'의 어원이 되는 단어는 조선시대에 등장한다. '침채(沈菜)'인데, 침채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는 뜻의 한자다. '침채(沈菜)'가 '침채-딤채-김채-김치'로 변화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 임진왜란 후 다양한 재료를 만나며 획기적으로 발전하다



획기적 변화를 맞이한 계기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전후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먹고 있는 '빨간 김치'는 이때 이후 탄생한 것이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통배추가 도입되면서 통배추에 젓갈과 고춧가루를 넣어 담근 지금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포기김치가 나타나게 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김치가 한반도 고유의 독창적인 형태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766년 유중림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배추김치, 오이소박이, 동치미, 가지김치, 전복김치, 굴김치 등 41종의 김치 만드는 법이 수록돼 있다. 1809년 빙허각 이씨가 부녀자들에게 전할 목적으로 살림살이 방법을 정리한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김치 만드는 법이 나오는데 지금과 거의 흡사하다. 1827년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나오는 92가지의 김치 제조법도 마찬가지다. 이무렵 해물, 젓갈, 고추 등 양념을 풍부하게 넣어 김치를 담그고 숙성시키는 것이 일반화됐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김치 제조법



날로 발전한 우리 김치 제조법은 중국에도 전해졌다. 1712년 김창업의 '연행일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귀화한 노파가 그곳에서 김치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녀가 만든 동치미의 맛은 서울의 것과 같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조선 순조 때 쓰인 필자 미상의 연경(북경) 여행기록인 '계산기정'에는 "통관(通官) 집의 김치는 우리나라의 김치 만드는 법을 모방하여 맛이 꽤 좋다"고 돼 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미뤄 볼 때 이미 18세기 무렵 우리의 김치가 중국에 건너가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쓰촨성에 가면 쓰촨파오차이(四川泡菜)라는 김치가 있는데 만드는 법이나 맛이 우리의 동치미와 흡사하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 때 명군으로 조선에 왔던 쓰촨 출신 군인들이 제조법을 배워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지역과 재료에 따라 천의 얼굴로 변모하는 김치



우리나라 김치는 정형화된 레시피가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특히 지역에 따라 재료가 크게 달라진다.

젓갈로는 새우젓·조기젓·멸치젓 등이 쓰이는데, 중북부지방에서는 새우젓·조기젓을 쓰고 남부지방에서는 멸치젓·갈치젓을 많이 쓴다.

일반적으로 북쪽 추운 지방에서는 고춧가루를 적게 쓰는 백김치·보쌈김치·동치미 등이 유명하다. 북한 지역에서는 돼지고기를 넣거나 육수를 내어 김치 국물을 만들기도 해서 김치말이밥 같은 음식이 발전했다.

서울 지역은 궁중음식의 영향을 받아 오이소박이·장김치 등 독특한 김치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여러 지방 이주민들에 의해 그 특색를 잃었다. 경기도 황해도는 새우젓에 황석어젓, 까나리젓을 사용해서 김치를 담근다. 모양이 화려한 경우가 많다. 용인오이지·순무짠지·순무김치·꿩김치·고구마줄기김치·숙김치·보쌈김치·섞박지 등이 있다.

충청도는 김치가 심심한 편이다. 양념보다는 아삭아삭함을 살리는 편인데 국물이 많지 않다. 젓국을 쓰지 않고 소금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박김치·파짠지·열무물김치·가지김치·시금치김치·새우젓깍두기 등이 있다.

전라도의 김치는 일단 양념이 진하다. 조기젓·밴댕이젓·병어젓을 추가로 사용하고, 참깨와 찹쌀 풀을 넣어 독특한 맛을 낸다. 갓쌈김치·고들빼기김치·배추포기김치·검들김치·굴깍두기 등이 있다. 강진, 영암에서는 토하젓을 넣어 담그기도 한다.

경상도는 멸치젓을 사용하며 간이 세고 국물이 적다. 전라도에 비해 부가 재료를 덜 쓴다. 전복김치·속새김치·콩잎김치·우엉김치·부추김치 등이 특색 있는 김치다.

평안도는 콩나물김치·갓김치·함경도대구깍두기·채칼김치·봄김치 등이 있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젓갈을 거의 쓰지 않으며, 국물이 많은 김치를 만들어 먹는다. 평안도 가지김치, 함경도 대구김치 등이 유명하다. 제주도의 경우 춥지 않은 기후 특성상 김장김치가 육지보다는 발달하지 못했다.

◆ 유산균 생존율이 높은 건강식품



미국의 건강 잡지 '헬스'는 2008년 3월 24일 기사에서 김치를 스페인 올리브유, 그리스 요구르트, 인도 렌틸콩, 일본의 낫토와 함께 세계 5대 건강 식품으로 선정했다. 김치의 가장 큰 매력은 유산균에서 나온다. 김치 유산균은 소화에 좋고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김치에 존재하는 유산균은 일반적으로 유제품에 존재하는 유산균보다 장까지 살아서가는 생존력이 높다. 김치 고유의 유산균인 '락토바실러스 김치(lactobacillus kimchi)'는 유제품에서 검출되는 유산균보다 훨씬 생존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유제품에 많은 동물성 유산균의 생존율은 40%를 넘기기 어렵지만 식물성 유산균은 약 90% 이상이 위산 속에서도 생존이 가능하다. 따라서 김치 유산균은 다른 유산균에 비해 장에 정착하는 비율이 높다. 즉 다른 음식에 비해 적은 양을 섭취해도 다량의 유산균을 인체에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 김치 독자성의 근거



2020년 말 중국 측에서 "김치의 종주국은 중국이며 한국에 김치 기술을 전파한 것"이라는 억지 주장이 나왔다.

사실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는 문화는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 어느 문화권에서나 있었다. 김치는 원시 절임 문화를 가미 발효 절임 문화로 발전·확대시킨 우리 고유의 산물이다. 김치는 동물성 젓갈과 무 김치 등의 채소를 조합해 한국인들이 탄생시킨 고유의 음식이다. 즉 김치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채소 절임이다.

중국의 주장을 너그럽게 봐준다고 해도 그렇다. 중국이 기원으로 주장하는 '저(菹)'는 중국 북부지역에서 발달한 채소 절임이다. 이 지역은 알다시피 한족의 땅이 아니라 동이족의 주 활동 무대였다.

'저'와의 역사적 연결 고리 역시 중국보다 한반도가 더 가까운 셈이다. 중국의 주장은 김치 한반도 고유설의 또 다른 근거가 될 뿐이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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