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주몽처럼 백발백중, 일제 격침하다
매일신문 배포 2021-07-23 13:30:00 | 수정 2021-07-23 20:06:31
명포수와 명사수
일본 헌정기념관에는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총알이 전시돼 있다.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부상 군인 후송 모습.
『삼국사기』에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高)요, 휘는 주몽(朱蒙)이다.…나이 겨우 7살에 숙성한 품이 보통 아이와 다르고,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혔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그로써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 말 달리며 뒤돌아 쏘는 고난도 파르티안 기사(騎射) 방식이 나올 만큼 선조의 활쏘기는 유명했다.
활쏘기 명성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었고,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기록이 숱하다. "태조가 단 한 번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 태조가…큰 숲에 앉아 있는데…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쇠살(金矢)를 뽑아 쏘니…무릇 스무 번 쏘아 모두 죽였으므로…활쏘는…신묘함이 이와 같았다, 두 마리의 노루가 모두 달아나므로…화살 한 개 쏜 것이 두 마리를 꿰뚫고 화살이 풀명자나무에 꽂혔다."
독립전쟁에 나선 한국인 역시 명중(命中) 솜씨를 발휘했다. 일제 응징, 광복의 충정에 의한 화랑의 임전무퇴, 불퇴전의 의지가 거둔 결과이다. 비록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말이다.
상해사변 당시 오송포대와 주변 지도.1932년 4월 중앙일보
◆김수산 포탄으로 일본 적함 침몰
1932년 1월 8일, 32세 이봉창(1901년생)이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져 실패하자 25세 윤봉길(1908년생)이 다시 나섰다. 일제가 그해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키고 4월 26일 상해침공 승리 겸 천장절(일왕 생일 축하) 행사를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자 윤봉길이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군 사령관 등을 명중시켜 즉사시켰다.
두 젊은이가 일본 심장부 도쿄와 전승지 중국 상해에서 일궈낸 의거는 일본과 세계를 뒤흔들었다. 물론 두 젊은이는 1932년 10월 10일과 12월 19일 사형으로 순국했지만 앞서 1919년 9월 2일 61세 강우규가 서울 남대문역에서 시도한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에 대한 폭탄 암살 사건에 이어 독립운동사에 폭탄 투척의 새 역사를 남겼다.
1932년 상해사변 즈음, 또다른 망명 20대 한국 젊은이의 포탄 비화도 전해진다. 1937년 5월 3일의 『앞길』 제10호(국사편찬위원회)의 글을 인용한 『신한민보』(1937년 7월 15일)는 경남 진주 출신 22세 망명 한국인 '명포수' 김수산의 활동을 실었다. 중국군 포병 소속으로 일본 적함을 포탄으로 명중시켜 침몰시켰다는 내용이다.
신문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항일 활동으로 퇴학돼 망명, 중국군 포병으로 근무하다 상해사변 때 오송(吳淞)포대에 배치돼 일본 적함 1척을 명중시켰는데, 소위 '적함침몰사건'이다. 다만 국가 공훈록에는 "중국군 입대, 상해사변 시 포병관측통신반장 활약, 남경포병학교 졸업 후 중포대연습대특무장 근무…" 등만 나온다. 보도처럼 "상해사변 당시 적함 1척이 오송포대 앞에서 침몰된 것은…다 아는 사실이지만…이면에 감취어 있는 포수 한국 청년 김수산의 사실과 성명은 아는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 됐다.
봉오동전투 승리에 기여한 홍범도(왼쪽) 장군과 최진동 장군.
◆홍범도 장군 포수 모아 일군에 대첩
"홍범도 장군은…공부한 일은 없으나…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은 훌륭한 어른…어려서 함경도 백두산 밑에 갑산(甲山)이라는 곳에 가서 사냥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여 살았습니다.…총 잘 쏘기로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지경이었습니다.…"
1946년 12월 7일 『어린이신문』은 '조선 해방을 위하여 몸을 바치신 분들'이란 글에서 홍범도(1868~1943)를 '장군'으로 소개했다. 그는 배우지 못했고 머슴, 군인, 스님과 사냥꾼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험을 했다. 그의 사격술은 독립운동사의 전설이 됐고, 천민으로 차별받던 포수를 모아 처음 산포수 의병부대를 꾸렸고,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의 주역이 됐다.
일본군 스스로 '하늘을 나는 장군' (飛將軍)이라 부르며 두려워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또한 일제가 '한국인이 그를 하느님과 같은 숭배'를 받는 인물로 보고할 정도였다. 평안도에서는 '축지법을 쓰는 장군'으로 통했고, 평안·함경도에 퍼진 민요에도 등장했다. "홍 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홍범도 대장님은 동산리에서/왜적 순사 열 한 놈 몰살시켰소/…."
특별한 신기(神技)의 사격술 일화도 있다. 73세인 1941년 6월 일본 동맹국 독일의 소련 침공 때다. 그는 참전을 요구하며 25m 떨어진 작은 동전을 사병들 앞에서 사격, 명중시켜 놀라게 했다. 참전도 못하고 강제이주된 카자흐스탄에서 삶을 마쳤지만 '명포수' 독립운동가 명성은 영원하다. 오늘날 그를 '전쟁영웅'으로 뽑아 기리고, 육군사관학교도 '전쟁영웅'으로 삼아 흉상을 세웠다. 정부가 올해 부인(단양 이씨)과 아들(홍양순)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고, 이국땅 그의 유해 송환도 추진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사용한 권총.
◆안중근 의사 하얼빈역서 권총 명중
"…어려서부터 취미가 사냥이었던 나는…사냥꾼을 따라다니며…사냥을 했다.…커 가면서 총을 메고…새와 짐승을 사냥했는데…부모님과 선생님이 엄하게 꾸짖기도 하였다.…나는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권총을 뽑아 들고 이토의 오른쪽을 향해 네 발을 쏘았다.…"
지난 2019년 나온 안중근 자료집은 황해도 양반 집안 출신인 그의 성장기를 싣고 있다. 어릴 적부터 익힌 사냥과 총은 그의 삶에서 빠질 수 없다. 러시아 연해주 활동 시절에도 여전했던 총쏘기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거사 대미(大尾)로 멈췄다.
앞서 그는 함북 경원 출신으로 머슴살이 등으로 부(富)를 일궈 항일 투쟁을 한 연해주 망명 지사 최재형 집에 머물며 그곳에서도 총을 쐈다. '늙은 도둑'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위해서였다. 거사 자금도 최재형이 댔으니 출신이 다른 두 지사의 인연이 돋보인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의 권총 명중과 이토의 절명은 안중근이 '소년 시절부터 시작한 사격과 사냥을 즐기고 말 위에서 돔방총으로 달아나는 짐승을 잡고, 날아가는 새도 백발백중으로 맞춘' 소문 그대로였다. '타고난 명사수'인 그의 총탄은 독립전쟁에 불후(不朽)의 흔적이 됐다. 이밖에도 독립전쟁을 빛낸 명중 사례는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다.
정인열 논설위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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