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은 불덩어리처럼 날아가고… 죽음의 공포보다 탄성이 나와"
'젊은 학도여 붓 대신 총을'… 중학교 2학년 때 입대, 둘째와 셋째 형은 전사
위급 상황에서 통신병이 '자꾸 부르지 마레이' 외쳐… 목소리가 표적이 돼 피격
최보식 편집인
입력 2021.06.25 08:34 | 수정 2021.06.25 11:02
류형석(87) 선생은 신문기자들에게 몹시 귀찮은 존재(?)였다. 관례적으로 해온 6·25 관련 보도 내용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는 데도 말이다.
가령 조선일보의 '6·25 당시 한강 방어선에서 맥아더 장군과 대화를 나눈 소년병은 고(故) 신동수씨였다'는 내용의 기사(2006년 6월 24일· 2016년 8월 3일)에 대해 "맥아더와 만난 사람은 신씨가 아니다"라며 정정 보도를 요청했다. 그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6·25전쟁사' 등을 근거로 "신씨의 부대 이동 경로를 볼 때 두 사람이 만날 수는 없다"고 했다. 적당히 넘어가기를 원했던 신문기자들 입장에서는 성가셨을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이 옳았다.
맥아더와 소년병의 만남 '영화 인천상륙작전' 한장면 / YUTUBE 캡쳐
그는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내가 만났을 당시의 직업은 세무사였다. 그는 60대 후반부터 갑자기 ‘소명(召命)’을 받은 듯 6·25를 정확하게 기록해보겠다고 뛰어든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역사학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그는 하루 9시간 이상 6·25 관련 전사 자료를 읽었고 특정 전투의 참전자를 찾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정부나 대학, 연구소의 지원은 없었다. 10여 년 뒤 순전히 그 혼자의 열정과 노력으로 '낙동강'(8권), '삼팔선'(4권)을 발간했다.
류형석씨는“중학교 2학년 열여섯 살 때 군에 들어가 징집 연령이 된 스무 살에 제대했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그와 연락이 안 닿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꺼져있던 그의 휴대폰에 신호음이 갔다. 목소리가 들렸다. 받은 이는 그 아들(중앙대 교수)이었다.
“그동안 쭉 아버지 전화를 꺼놓았습니다. 궁금해하시는 분께 예의가 아니다 싶어 6개월 전에 아버지 번호를 제 휴대폰으로 돌려놓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2017년 11월 서울대 병원에서 튜브를 넣어 혈관 확장하는 스턴트 시술을 받던 중 의료사고가 났습니다. 응급상황까지 가서 몇 차례 위중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1년 7개월 입원해 있었습니다. 재작년 요양병원으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찾아뵙지만 코로나 때문에 창문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최 선생님 연락 왔다는 걸 전해드리겠습니다.”
소년처럼 체구가 작았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는 늙어도 소년이었다. 정확히 10년 전 오늘 나는 조선일보에 '소년병(少年兵) 출신 류형석' 인터뷰 기사를 썼다.
그 기사는 ‘지금은 영락없는 노인이지만, 류형석(77)씨도 소년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는 대구농림중학 2학년에 다녔다. 경북 선산군 집에서 대구까지 기차통학을 했다’로 시작됐다.
"어느 날 제 때에 통학열차가 오지 않았다. 대낮쯤 부산행 '11호 완행열차'가 들어왔다. 한강철교가 끊기기(1950년 6월 28일 새벽) 바로 전 서울서 출발한 열차였다. 안은 혼잡하고 옷도 제대로 못 입은 피란민들이 타고 있었다. 그 뒤로 여객열차가 끊겼다. 학교는 7월 5일 무기휴학에 들어갔다."
학교와의 인연이 그걸로 끝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을 때다. 7월 25일 마을을 비우라는 '소개령(掃開令)'이 떨어졌다. 그의 가족은 낙동강을 건너 경북 영천으로 피난 갔다.
"나루터에서 서로 자기 가족을 태우기 위해 난투극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이 뱃전에 달라붙으면 발길로 걷어차 물속에 처박았다. 갓과 두루마기 차림으로 봇짐을 등에 진 노인도 걷어차였다. 물속에 거꾸로 처박혔다. 노인이 죽겠구나 싶었다. 한참 뒤 물 위로 갓이 솟아오르더니 그 노인이 다시 배에 매달렸다. 인명은 모진 것이었다. 나는 어둑해져서야 겨우 강을 건넜다."
피난민들을 경북 영천의 한 계곡에 집결시켰다. 동네별로 팻말이 붙어 있었다. 청년방위대가 돌면서 젊은 사람들을 징발했다. 나이 스물이 된 그의 셋째 형이 징집됐다. 다음 날에는 결혼한 서른살 된 맏형이 끌려갔다. 그가 방위대를 찾아가 "대신 갈 테니 우리 형님을 풀어달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원 숫자만 채우면 됐다.
1952년 연천에서. 류씨는 뒷줄 왼쪽 세번째.
당시 징집 연령은 20세 이상이었다. 18세 이상이면 지원할 순 있었다.
"그 시절에는 징집영장이 나와도 군대에 안 간 사람들이 많았다. 집안에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은 안 갔다. 군 복무 중에도 빼냈다. 입대한 뒤로 병원에서 여섯 달을 지내다가 제대하기도 했다. 요지경 속이었다. 전쟁통에 상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해 박사학위를 받아 60년대에 장관 한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못난 사람들이 나라를 지킨다는 말이 맞다."
―그때 선생은 열여섯살, 왜 그런 마음을 먹었나?
"피난을 오면서 산비탈에서 한 부대가 휴식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 학생 모자를 쓴 사람들을 봤다. 순간 피가 끓었다. 사회 분위기도 그랬다. '피 끓는 젊은 학도여 붓 대신 총을 들자' '이 몸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고 했다. 경주로 이동해 신체검사와 구두면접을 받았다. 조사관이 '몇 살이냐' '싸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 잘 싸울 수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나를 떨어뜨릴까 봐 겁이 났다."
그와 함께 징집된 장정 170명은 열차 편으로 대구로 갔다. 역에 내려 인원 점검을 하니 한 명이 모자랐다. 중간에 도망친 것이다. 인솔 장교는 맞은편에서 오는 한 젊은이를 불러 세웠다. 젊은이는 군 면제 증명서를 내보였다. 장교는 한참 들여다보더니 북북 찢고는 '줄 뒤에 붙어' 명령했다.
"훈련소는 제사 공장 구내였다. 내무반 옆에는 큼직한 기계들이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일제 99식 소총으로 포복과 각개전투 등 훈련을 받았다. 총을 메면 땅에 끌릴 정도였다. 열흘째 수료하는 날 사격장에서 M1소총 8발을 쏴봤다."
그는 '소년병'이 됐다. 군번은 0151993. 팔공산에 있던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 11연대 1대대에 통신병으로 배치됐다. 군복을 입는 순간부터 나이는 상관없었다. 어리다고 봐주는 것도 없었다. 같은 대대 작전과에는 중학교 수학교사 출신의 서른살이 넘은 사병도 있었다. 그와 반말하면서 저녁에는 수학책을 들고 가서 배웠다."
6·25당시 포항여중 전투를 영화화 한 “포화속으로” / YUTUBE 캡쳐
―어린 나이의 군 생활은 훨씬 더 춥고 배고팠는가?
"그런 경험을 했던 분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는 군에서 먹고 입는 것이 집보다 나았다. 세 끼 쌀밥을 먹었다. 북진할 때는 일주일에 두세 번 갈빗국과 하루 한 봉씩 건빵이 지급됐다. 가을이 되니 미제 야전점퍼와 내복, 방한복이 나왔다."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뒤로 북한군은 퇴각하기에 급급했다. 그의 부대는 교전 없이 날마다 100리를 걸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하루에 대여섯 개씩 생겨났고 터졌다. 처음에는 걸음을 뗄 수 없어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M1 소총을 지팡이 삼아 발을 질질 끌며 갔다. 그는 걸으면서 잤다. 앞 사람에게 부딪혀 잠깐 정신을 차리다가도 다시 서서 잠들었다. 곧 뒷사람에게 부딪혀 밀려서 걸음을 옮겼다. 10월 10일 그의 부대는 38선을 돌파했다.
"당초 우리 1사단은 평양 점령을 두고 미군과 경쟁을 벌였다. 백선엽 장군은 평양 출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평양은 국군이 먼저 점령해야 한다'며 그에게 당부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대전 무렵부터 가랑이가 찢어지듯이 쫓아갔다. 평양 입성은 10월 19일이었다. 시내 곳곳에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시가전을 준비한 듯했다. 하지만 큰 전투 없이 무혈 입성했다. 김일성은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승용차를 버리고 산속으로 달아났다. 김일성 승용차는 지금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그의 부대는 평양에서 하룻밤 잔 뒤 북진을 계속했다. 평남 신안주에서 평북 박천을 거쳐 수풍발전소 방향의 영변으로 올라갔다. 10월 25일 압록강 접경인 태천에서 중공군과 처음 조우했다. 이때 중공군 포로 한 명을 생포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백선엽 장군이 직접 신문했다. 중공의 정규군대가 참전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쯤 뒤 우리 정보가 맞다는 것이 판명됐다."
한밤중 영변에서 중공군에 포위됐다. 앞에서 피리 소리가 들렸다. 이어 뒤와 좌우에서 피리를 불어댔다. 중공군의 심리전으로 사방에서 피리 소리를 듣게 되면 전의를 상실한다. 겁에 질린 부대는 퇴로를 찾았다.
'선봉에 선 중대가 중공군의 척후병을 발견하고 총을 쏘자, 뒤따르던 우리 병사들은 중공군의 기습인 줄 알고 혼비백산해 도망갔다. 그런 해프닝이 있었지만 포위망의 틈을 뚫고 빠져나왔다. 당시 대대장은 일제 시대에 중국군에서 근무했던 사람이었다. 수전증이 심한 그는 지도와 나침반을 쓰지 않았다. 그냥 별을 보고 방위를 정했고 산세(山勢)를 보고 길을 찾았다. 포탄이 떨어지면 그 소리만 듣고서 '이는 대포의 유효사거리이니 적진 쪽으로 10m 전진해라' '이는 최대사거리이니 뒤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병사들 사이에는 그런 소문이 나 있었다. 여하튼 이분의 지휘로 우리는 탈출할 수 있었다."
그의 부대는 태천에서도 중공군과 전투가 붙었다. 아침에는 국군이 진격하고, 밤에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밀리곤 했다. 세 차례 공방을 거듭했다.
"어느 아침 중공군의 습격을 받았다. 땅에 총탄 꽂히는 소리가 픽픽픽 들렸다. 들판으로 철모와 소총을 들고 도주하는 국군들이 보였다. 마침 연대와 통화하던 대대장도 냅다 뛰기 시작했다. 대대장을 따르는 병사는 통신병인 나밖에 없었다. 지휘관은 통신이 없으면 죽은 몸이다. 산 능선으로 올라온 대대장이 '중대를 불러라'고 명령했다. 무전을 보내도 응답이 없었다. '모든 중대는 몇 시까지 어느 계곡으로 집결하라'고 반복해 날렸다. 응답이 없어 전멸했나 싶었다. 집결 장소에 내려오니 전 중대가 다 모여 있었다. 대대장이 무전기로 불러도 중대장들은 듣기만 하고 응답을 안 한 것이다. 위급 상황에 작전 지시를 내릴까 봐 그랬던 것이다."
태천 전투를 마지막으로 후퇴의 길에 들어섰다. 38선으로 철수해 임진강을 놓고 대치했다. 1950년 마지막 날, 중공군의 총공격이 개시됐다.
"자정 무렵 중공군은 우리 진지에 포탄을 퍼부으면서 임진강을 건넜다. 무전병인 내가 제3중대를 호출했다. 그쪽 무전병은 몹시 다급한 상황이었다. 부산사람인 그는 짜증스럽게 '자꾸 부르지 마레이' 외친 직후 그 목소리가 표적이 돼 저격을 받았다."
1월 4일 그의 부대는 서울을 빠져나갔다. 소위 1·4 후퇴였다. 천안까지 밀렸다가 다시 반격했다.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임진강까지 진출해 그의 부대는 문산에 주둔했다.
1951년 4월부터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있었다. 서울 점령이 목표였다. 임진강에서 수색까지 두 차례나 진퇴를 반복하는 혈전이 벌어졌다.
"중공군이 주둔한 맞은편 산을 보면 그 움직임이 메뚜기처럼 와글와글했다. 당시 종군화가가 우리 진지에서 전투 장면을 스케치했다. 야간 전투는 불꽃놀이와 같았다. 조명탄이 올라가고, 대전차포가 불덩어리로 날아갔다. 그 광경에 죽음의 공포보다 탄성이 나왔으니 인간이란 이상한 동물이다. 내 둘째와 셋째 형은 전사했다."
전쟁통에도 사람은 살아간다. 전투가 매일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한가한 날들이 더 많았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는 수학과 영어책을 꺼내 공부했다. 사회에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휴전이 됐을 때, 정부로서는 전시의 대규모 병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의 문제가 생겼다. 병사들에게 제대 신청을 종용했다. 그는 일등중사(하사)로 전역했다. 군대 갈 나이인 스무살에 제대했다.
학도병이 학교로 돌아가면 한 학년 위로 복학시켜주는 규정이 있었다. 그는 중학교 3학년에 복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가기에는 늦어 있었다. 집안 농사도 맡아야 했다. 그는 독학을 해서 공무원 채용시험인 보통고시에 합격했다.
국세청에서 퇴직한 뒤 현재 세무사로 일하는 그는 소년병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참전 수기를 펴냈다. 40여명의 소년병들을 만났다고 한다. 올 초에는 '낙동강'이라는 전 8권짜리 6·25 전쟁사를 썼다.
소년병의 수는 모두 1만 4400여명이다. 이중 2464명이 전사했다. 아이를 전쟁에 동원했다는 국제사회의 시선을 우려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년병의 실체는 어둠 속에 있었다.
[학도의용대는…]
소년병은 군번과 병적표가 있는 정규군이었다. 이 점에서 학생 신분이었던 '학도의용대'와는 다르다. 학도대는 초기 전황이 어려울 때 전국학생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조직했다. 이중 일부는 정규군으로 편입되기도 했으나, 대부분 군번과 계급이 없는 '학생' 신분으로 싸웠다. 전황이 안정되면서 1951년 2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은 학도대의 '복귀령'을 내렸다. 학도대는 군번과 병적표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중에 다시 군에 징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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