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할줄 아는 칠면조, 끝장 보는 ‘닥공’ 닭과 싸우면…
[중앙선데이] 입력 2021.05.22 00:20 | 737호 15면 지면보기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서광원칼럼
닭과 칠면조는 비슷하게 생겼다. 같은 조상을 가졌기 때문인데 칠면조가 약간 더 큰 듯 하지만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만약 이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같은 조건이라면 닭이 이길 확률이 높다. 칠면조가 갖지 못한 ‘강점’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칠면조는 싸우다 질 것 같다 싶으면 얼른 항복한다. 목을 쭉 뺀 다음 바닥에 드러눕는다. ‘내 목과 몸을 당신의 처분에 맡길 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통용되는 방식이다. 그러면 승자는 주변을 빙빙 돌며 자신이 승리했다는 걸 확실히 한다. 격투기에서 이긴 승자가 링을 빙빙 돌듯이 그렇게 한다. 하지만 공격하지는 않는다. 매너 있게 패자의 항복 선언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공작도 상대가 죽을 때까지 가격
칠면조처럼 ‘예의’ 갖추다간 낭패
이순신 장군 “모든 싸움이 첫 싸움”
상대 바뀌면 대응 방식도 달라야
자기만의 룰 고집하면 생존 위험
닭은 다르다. ‘싸움닭’이라는 말마따나 녀석들은 상당히 거칠다. 항복해도 ‘감히 나한테 덤볐어?’ 라는 듯 한껏 ‘분풀이’를 한다. 상대를 사정없이 쪼아 머리 껍데기가 벗겨질 정도로 말이다. 다시 도전할 마음 자체를 없애려는 듯 혼쭐을 낸다. 이러니 같은 조건이라면 칠면조가 불리하다. 닭은 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죽기 살기로 싸우고, 질 것 같으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간다. 칠면조처럼 쉽게 항복하지 않는다. 이러니 닭과 싸우는 칠면조가 항복 선언을 하면 후회 막심할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게임의 규칙이 다르다는 걸 모르는 대가가 엄청나다. 역시 조상이 같은 공작과 칠면조가 싸우면 어떨까? 공작은 부채처럼 쫙 펼쳐지는 멋진 꽁지를 갖고 있으니 승부 방식도 멋질까?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칠면조가 이기면 다행이지만, 만의 하나 항복을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각오해야 한다. 덩치는 칠면조가 크지만 공작은 닭보다 강점이 두 개나 더 많다. 더 잘 날 수 있는데다 날카로운 발톱까지 갖고 있어 상대가 거의 죽을 때까지 인정사정없이 가격한다. 이런 싸움에서 예의를 갖추는 건 죽음으로 가는 길일 수 있다.
개 중에도 비슷한 녀석이 있다. 불독을 개량한 핏불이다. 보통 개는 칠면조처럼 상대가 배를 드러내고 바닥에 누우면 몇 번 목을 무는 흉내를 내다 그친다. 하지만 핏불은 다르다. 끝까지 완전하게 승부를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겁을 줘서 항복을 받아내는 게 아니라 최대한 타격을 입히는 게 녀석들의 방식이다. 이걸 모르고 쉽게 항복했다간 결딴나기 십상이다.
상대가 가진 승부 방식을 모르면 가혹한 운명의 희생양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500여 년 전인 1532년 11월 16일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지금의 페루 지역인 고지대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대치했다. 말이 대치였지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파나마 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던 피사로의 군대는 불과 168명이었다. 정예도 아니었고 더구나 낯선 이국땅이었다. 반면 아타우알파 황제가 이끄는 잉카 군은 자신들의 지역인 데다 8만 명이나 됐고 오합지졸도 아닌 전투 경험이 많은 군대였다.
168명대 8만 명. 싸움이나 되었을까 싶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리 168명의 일방적 승리였다. 피사로의 군대는 황제까지 사로잡아 엄청난 몸값을 뜯어냈다. 어떻게 168명이 8만 명을 이길 수 있었을까? 요즘은 문화인류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책 『총, 균, 쇠』에서 승리의 비결이 바로 총과 균, 그리고 쇠(철)였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지만 사실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당시 잉카 군은 상대와 싸울 때 가능한 한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는 편이었다. 노예로 쓰기도 하는 등 용도가 많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스페인 군에게 전쟁은 적을 죽이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칠면조와 공작이 싸운 것과 비슷했다. 싸우는 방식까지도 불리했던 것이다.
상대와 대적해야 한다면 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규칙이 없는 상황이라면 상대의 방식을 알아야 한다. 상대의 방식을 알기 어렵다면 가능한 한 그 상황에 맞는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 나의 방식이 아니라 상대와 상황에 따라 싸우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 대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임진년의 싸움은 힘겨웠고 정유년의 싸움은 다급했다. (중략)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중략)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이 세계 해전사에서도 드문 23전 23승을 거둔 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실제로 이순신은 이전에 승리한 방식으로 싸우지 않았다. 항상 상대의 정보를 최대한 모았고, 그게 힘들면 적과 마주치는 상황을 기준으로 새로운 해법을 찾았다. 23전을 모두 다르게 싸웠다. 그래서 이겼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르게 대응한 덕분에 전승을 거두었다. 닭과 싸운다면 닭의 방식으로 싸워야 하고, 공작과 싸운다면 공작의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생존의 조건이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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