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문제는 친문이 아니라 文이다
박제균 논설주간 입력 2021-05-17 03:00수정 2021-05-17 03:06
文 4년 가장 큰 잘못은 ‘언어 파괴’
잘못하고 되레 성내는 이상한 나라
‘운동권·문파에 휘둘린다’ 사실 아냐
강성 대통령, 문파 행동 사실상 조장
박제균 논설주간
문재인 대통령 집권 4년의 가장 큰 잘못은 뭘까? 실정(失政)을 열거하자면 입이 아프지만, 나보고 딱 하나만 꼽으라면 이거다. 언어 파괴. 그 4년 동안 공정 정의 법치 개혁 상식 도덕 같은 사회 규범 언어의 어의(語義)가 훼손되고 변질됐다.
잘못된 정책이야 이 정권이 정신을 차리거나(가능성은 낮지만)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파괴된 언어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은 흔적을 남겨 국민화합을 해치고, 국가경쟁력을 좀먹는다. 이를 바로잡는 일 또한 지난(至難)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당장 이 정권 사람들이 ‘개혁’을 말하면 덜컥 두려운 생각부터 든다. 개혁=장악, 즉 ‘우리 편 만들기’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설사 내년에 정권교체가 돼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도 개혁을 외친다면 또 무슨 저의는 없나, 의심부터 할 것 같다. 언어 습관이란 게 그만큼 무섭다.
문 정권 들어서 가장 크게 망가진 단어는 ‘공정’일 것이다. ‘과정은 공정할 것’이란 대통령 취임사의 화두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식 공정임이 드러났다. 즉 ‘모든 과정은 공정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공정하다.’ 이 같은 ‘그들만의 공정’에 청년들이 분노하는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이제 이런 ‘문재인 어학사전’에 ‘균형감각’이란 낱말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 차기 대통령이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시대정신과 함께해야 하고, 균형감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대정신’이야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난데없는 균형감각(Sense of proportion)이라니….
역대 대통령 가운데 균형감각과는 가장 거리 먼 사람 중 한 분이 그 말을 입에 올리니 당황스럽다. 취임하자마자 적폐몰이로 이전 정권 사람들을 초토화시키고, 철저한 ‘편 가르기’ 통치로 조국 윤미향 추미애 사태를 조장했으며, 무능한 운동권식 국정 운영으로 안보와 경제, 인사(人事)와 코로나 백신 정책을 망치고도 4주년 회견에서조차 잘못한 게 없다는 대통령. 자신의 균형감이 부족하니, 다음 대통령이 갖췄으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다시는 이런 말씀은 안 했으면 한다.
그날 회견을 보면서 대통령의 강한 멘털에 놀랐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볼수록 잘못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잘못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나는 잘했는데, 야당과 일부 언론의 폄훼로 억울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국가 지도자라면 잘못을 알고 부인하는 것보다 잘못 자체를 모르는 게 더 위험한 터.
최고 권력자부터 이러니, 4년을 거치는 동안 대한민국은 잘못한 윗분들이 더 당당한 나라, 잘못한 자들이 도리어 성내는 이상한 나라가 돼버렸다. 잘못을 지적하면 문빠(이하 ‘문파’로 순화)들은 ‘이명박 박근혜 때는 더했다’는 기이한 논리로 반박한다. 그때 결코 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는 잘못이 들통나면 부끄러워할 줄은 알고, 인사 조치했었다. 설령 그때 그랬다 한들, 그때도 잘못했으니 지금 잘못해도 된다는 논리가 말이 되나.
임기 4년이 지나면서 이것만은 분명해졌다. ‘성품이 착한 문 대통령이 주위에 포진한 86 운동권 세력에 끌려다니거나 강성 문파에 휘둘린다’는 임기 초반 관측은 틀렸다는 사실. 이번 부적격 장관 인사를 두고 “검증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도 드러나듯, 운동권 출신 여권 인사들보다 문 대통령이 더 강성이다.
한국정치 수준을 떨어뜨리는 문자폭탄에 대해서도 ‘양념’이라느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느니 하며 문파의 집단행동을 사실상 조장해온 사람도 대통령이다. 국민통합의 책무를 지닌 대통령답게 ‘문자폭탄은 민주적 여론 형성을 저해한다’고 손사래를 쳤어도 문파가 지금처럼 기승을 부릴까.
대통령은 회견에서 다중(多衆)이 쏟아붓는 문자폭탄에는 ‘정치하는 분들이 조금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라’고 주문했다. 정작 자신을 향한 시민 1명의 모욕에는 ‘여유 있는 마음’을 잃고 고소한 뒤 2년이 다 돼서야 취하했다. 상대 진영 사람을 적대시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문파의 행태와 닮지 않았나.
이제 ‘대통령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문’에 대한 ‘빠’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 대통령부터 여유 있는 마음을 되찾고 문파를 놓아주면 문파도 대통령을 놔줄 것이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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