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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교도소보다 못하다… ‘타인은 지옥’ 된 文정권 청년주택

교도소보다 못하다… ‘타인은 지옥’ 된 文정권 청년주택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웹툰 ‘타인은 지옥이다’로 본 SH 청년주택의 비인간성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05.15 03:00 | 수정 2021.05.15 03:00

 

 

부산 출신 청년 종우는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고생 끝에 찾아낸 저렴한 고시원에 자리 잡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친절하지만 사람을 자꾸 훑어보고 살피는 느낌이다. 이웃 사람들의 분위기도 어딘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 험상궂은 깡패, 음침한 더벅머리, 벽을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통화하라는 옆방 남자, 내 샴푸를 마구 쓰는 아저씨 등 호감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이 값이면 어쩔 수 없지. 종우는 회사를 차리고 자신을 취직시켜준 대학 선배와 술을 마시다가 두 취객이 싸우는, 아니 한 쪽이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구타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종우가 말리려고 했지만 선배는 괜히 남과 얽혀서 좋을 것 없다고 제지한다. 그런데 그들이 술자리를 끝내고 나와 보니 폭행은 살인으로 끝난 상태였다.

죄책감을 느끼며 고시원으로 돌아온 종우는 출출함을 느끼고 라면을 끓여 먹으려 한다. 그러자 같은 층에 사는 깡패가 내 것도 끓여달라면서, 다른 사람이 너를 계속 쳐다보고 있던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낯선 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 이 좁은 공간, 얇은 벽 너머로 말소리가 모두 들리는 이 고시원에는 뭔가 더 끔찍한 비밀이 있는 듯하다.

일러스트=안병현

네이버에 연재된 웹툰 <타인은 지옥이다>의 줄거리다. 이토록 한없이 찜찜하고 불쾌한 설정의 이야기가 누적 조회 수 8억회를 기록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끼리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사생활을 지키기 어려운 공간. 고시원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를 장르적으로 표현해낸 이야기가 젊은이들의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거의 모든 고시원의 구조는 비슷하다. 매 층마다 복도가 쭉 이어져 있고 양쪽으로 방이 줄줄이 배치된다. 최소한의 면적을 최대한 쪼개야 하므로 벽돌이 아니라 합판 따위로 방을 나눈다. 방음이 될 턱이 없다. 옆방 사람이 누구와 무슨 통화를 하는지, 저녁 먹은 게 소화가 안 되어서 방귀를 뀌는 중인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 시각은 차단되지만 청각이 뚫려 있기에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한다.

역사의 시계를 좀 더 뒤로 돌려보자. 우리는 각방을 쓰는 고시원에 살면서도 사생활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는다. 하지만 17세기 이전에는 심지어 왕과 귀족도 그만큼의 사생활을 누리지 못했다. 애초에 ‘복도’라는 건축 요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방은 서로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원치 않더라도 서로의 방을 통과해야만 했다. 엄마와 아빠가 동생을 만드는 중이건, 오빠가 간이 변기에서 용변을 보는 중이건, 남의 방을 통과해야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완전히 떨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와 그의 학문적 동료들은 <사생활의 역사>라는 5권짜리 대작을 함께 썼다. 서구에서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양식과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지 파헤친 학문적 블록버스터였다.

그 작업에 참여했던 역사학자 미셸 페로는 아예 <방의 역사>라는 별도의 책을 통해 복도의 탄생과 사적 공간의 출현에 주목했다. 17세기 영국의 대저택에 복도가 생기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남의 방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방마다 별도의 문을 설치하고 미리 노크하는 관습이 생겼다.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에 홀로 앉아 근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이 될 수 있었다. 근대 철학은 사생활 발명의 연장선상에 놓인 사건이었다.

 

17세기의 사생활 혁명은 21세기에 이르러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 추세는 분명하다. 가령 덴마크에서 새로 지은 감옥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어지간한 대학 기숙사보다 깨끗한 시설에 1인 1실, 개인별로 화장실까지 따로 쓰는 모습에 전 세계 네티즌들이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각자 사생활을 지킬 수 있는 공간을 누리는 것, 그것은 인권의 핵심 지표라 할 수 있다.

2021년 현재, 우리의 청년들은 사생활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7일 밝혀진 바, 서울시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제공하는 서울시 역세권 청년주택 미분양 사태를 보면 분명히 그렇다. 문제의 청년주택 ‘용산 베르디움 프렌즈’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보증금과 월세가 주변 시세보다 저렴해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현재는 무려 105명이나 입주를 거부한 상태다. 이유는 간단하다. 청약이 불발된 평형의 구성 때문이다. 2인 1실, 혹은 3인 1실의 셰어하우스 형태인데, 그나마도 추첨으로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다. 난생처음 만나는 누군가와 주방, 거실, 심지어 화장실까지 나눠 써야 한다. 2021년 대한민국이 청년에게 제공하는 삶의 조건이다.

이것은 17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가장 기본적 인권인 사생활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처사다. ‘룸메이트’나 ‘하우스메이트’를 구해서 함께 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룸메나 하메를 구하는 사람은 본인이 직접 상대를 만나서 서로 조율하고 합의하는 반면, 서울시의 청년주택은 SH 측에서 추첨으로 짝을 지어주는 것이니 말이다. 군인의 숙소나 대학생의 기숙사, 혹은 수형자의 수감 시설처럼 매우 특별한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기존에 쌓인 신뢰 관계가 없는 임의의 타인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하는 주거 정책은 현대 문명국가에서 상상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권은 청년 인권을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않는 듯하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협소한 공동 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가능성을 상상한 작품이다. 나 또한 고시원에서 적잖은 기간을 살아봤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공감할 수 있었다. 사람은 얼마든지 서로에게 지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조금씩 배려하고 서로 노력한다면, 천국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가 국민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 청년을 독립된 인격체로, 사생활을 보장받아야 할 주체로 여기고 있지도 않는 듯하다. 우리 스스로 서로 지킬 걸 지키며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고시원에서, 청년주택에서, 기타 온갖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부대끼고 있는 고단한 젊음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