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懲毖錄) 교훈
미래는 과거의 결산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다가올 미래를 알기 위함이다.
함석헌 옹은 역사를 설명하기를
한 사람이 잘못한 것은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는 것 이라고 명료하게 답했다.
똥개의 특성은 한 마리가 짖으면 온 동네 똥개 모두가 아무 이유도 없이 합창이 된다.
이유도 모르고 똥개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체
우리 주변에는 을 읽어 본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은 국보 제132호이다.
더 놀란 사실은 몇해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서적 중에서
을 발견하고 어떻게 이것이 일본사람이 읽는 것인지
의아 했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알게 된 것은
이 1647년에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1695년에 번역되어 간행된 것을 알게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을
듣고는 읽어야 할 사람은 읽지 않고 경계의 대상인 일본인들이
읽었다는 사실에 난감하기만 하였다.
우리 역사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라는 뼈아픈 역사가
왜 반복되었는가?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게을리하고 역사의 교훈을 잊은 탓이다.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히는 수모의 역사가 또다시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스스로 자강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담근질해야 하는 것이다.
은 유성룡이 임진왜란 직전의 국내의 정세에서부터
임진왜란의 실상과 왜란 후의 상황을 냉철하게 서술한 역사서다.
유성룡은 자서에서 을 저술한 까닭을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 말이 있는데 이것이 저술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을 읽노라면 울분을 삭일 수가 없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망하는 일만 골라서 하였는지?
즉 총체적 난국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왕은 백성을 팽개치고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신하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살폈고,
장수들은 싸움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고,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이런 것을 바라보는 백성은 원망하고 통곡하다 급기야
분노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이것은 약과에 불과하다.
에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금도 반복되는
기막힌 사실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왜군 침입 후 첫 승전을 올렸던 부원수 신각은 도원수 김원명이
자신을 따라 도피하지 않았다며 명령 불복종 죄로 몰려
우상 유홍의 주청으로 참형되었다.
나중에 신각이 전투에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에서 참형
을 중지하려고 급히 선전관을 보냈으나 이미 집행한 후였다.
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도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며,
그를 추천한 유성룡도 공격을 받았다.
함경도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은 그곳으로 피난 온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박하여 왜장 가등청정에게
데려가 항복했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부산이 함락되자 병영으로 재빨리 돌아와서
맨 먼저 제 첩을 피난시키고 본인은 새벽녘에 도망쳤다.
그러자 성안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많은 군사들은 무너졌다.
에는 일본 사신들이 조선의 상태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기술하고 있다.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예조판서가 베푼 잔치
자리에서 술에 취해 자리 위에 후추를 흩어 놓았다.
그러자 기생들과 악공들이 다투어 줍느라고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고 통역에게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기강이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임금의 피난 행력이 의주까지 이르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서둘러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신들이 도움을 준다면 속국 정도
가 아니라 아예 명나라로 편입하겠다고 구걸외교를 펼치는 사태
까지 있었다.
이런 경우를 본다면 징비의 절실함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참으로 눈이 아찔한 것을 어쩔 수 없다.
유성룡은 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으로
첫째, 한 사람이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천하의 큰 일을 그르칠 수
있으며
둘째, 나라의 최고 자도자가 국방을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고
셋째, 전쟁 같이 큰일을 닥쳤을 때에는 반드시 나라를 도와줄
만한 후원국이 있어야 한다는 세가지로 정리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문제가
지금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성찰할 일이다.
아니 반복되고 있으니 신속히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유성룡이 말처럼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 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에서 절박함을 배우고, 미래를 대비
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수모와 치욕의 역사는 다시 찾아올 것이
자명하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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