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논설주간 입력 2021-04-05 03:00수정 2021-04-05 03:53
與, 보선 이기든 지든 ‘失政 대못 박기’
레임덕 국면전환 개헌론 가능성도
제왕적 대통령제 롤러코스터 탄 尹
‘청산’에 정치적 소명 걸어야
박제균 논설주간
2016년 4월 20대 총선 이틀 뒤 게재된 내 칼럼 제목은 이랬다. “위기의 박근혜, 개헌 ‘블랙홀’ 펼칠까” 총선 참패로 위기에 빠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었다. 그런 위기가 오히려 실패한 대통령을 줄줄이 양산하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할 기회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취임 이후 ‘개헌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며 반대해온 박 대통령의 태도엔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 그해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돌연 ‘임기 내 개헌 방침’을 밝혔다. 들불처럼 번지던 국정농단 사건을 덮기 위한 비겁한 제안이었다.
해묵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틀 뒤 치러질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이후가 궁금해서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권(與圈)은 어떻게 나올까. 선거 결과가 유리하게 나온다면 실정(失政)을 반성하기는커녕 ‘대못박기’에 나설 것이다. 불리하게 나온다면? 반성하고 정책 전환에 나설까.
다 아는 대로 문재인 정권 4년은 이보다 실패할 순 없을 정도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온 힘을 쏟았던 남북관계 대전환은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물 건너갔다. 안보는 ‘문재인 보유국’을 자랑하는 동안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가 더 단단해졌으며,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며 사실상 북 비핵화 포기 선언을 할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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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망한 부동산 정책을 비롯해 ‘부채 천조국’ 등 경제 정책도 어느 것 하나 건질 게 없다. ‘화합’이라고 쓰고 ‘분열’로 읽어낸 국민화합 정책, 검찰 장악으로 드러난 검찰개혁, 후진국 수준의 코로나 백신 확보 실패…. 입만 아프다.
이쯤 되면 보선 결과와 관계없이 국정 대전환에 나서야 정상이건만, 참패를 한다 해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레임덕 가속화의 초조감 때문에 특유의 전(前) 정권 탓, 야당 탓, 보수언론 탓을 해가며 실패한 정책의 대못을 박으려 들 것이다. 개각으로 국면전환을 기도(企圖)하겠지만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같은 무리수를 끝까지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다.
자칫 개헌론을 들고 나올 수도 있다. 선거 패배로 여권으로선 초유의 위기에 몰린다면 개헌만 한 국면전환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여당이 지든 이기든 레임덕을 피할 수 없는 대통령에겐 유혹이 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에 앞서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 모두 집권 4년 차에 개헌 의사를 밝힌 것도 단임제 대통령의 운명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3월 개헌을 발의한 바 있으나 진정성 없는 ‘기록용’에 가까웠다. 지금은 처지가 다르다. 174석의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여당 2중대’ 의원들, 개헌에 찬성하는 야당 의원까지 포함하면 국회 의석 분포도 개헌안 통과에 나쁘지 않은 지형이다.
개헌으로 한국정치 만악(萬惡)의 근원처럼 여겨지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할 수 있다면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있고 한 명의 현직 대통령이 레임덕은 물론 ‘퇴임 후 안전’까지 걱정해야 하는 오늘의 상황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개헌의 최종 관문인 국민의 뜻이다.
올해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개헌 찬성(57.9%)이 반대(28.7%)의 두 배다. 하지만 개헌 시기에 대해선 차기 정부(58.8%)가 현 정부(29.2%)의 두 배다. 개헌엔 찬성하지만 임기 말 개헌은 부적절하다는 민의(民意)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정치적 소명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끊어내라는 민의를 담기에 윤 전 총장만 한 그릇도 드물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로 제왕적 권력을 건드렸다가 좌천된 뒤 문재인 정부의 총아(寵兒)로 부활했다가 다시 ‘산 권력’에 손을 대 갖은 핍박을 받고 저항하다 대선주자 지지율 1위로 떠오른 인물. 윤석열처럼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롤러코스터처럼 경험한 사람이 있을까.
따라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청산은 윤석열이 주장하는 ‘상식 정의 법치의 복원’ 외에도 그의 강력한 정치적 브랜드가 될 수 있다. 여권이 보선 이후 개헌론을 제기하든 않든, 그가 정치에 뛰어든다면 제왕적 대통령제 청산에 대한 확실한 청사진을 보여줘야 하는 이유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사슬을 끊어내려면 꼭 개헌을 해야만 하는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부터 답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제왕적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법에 능한 윤석열이라면.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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