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논산=이성진 기자
입력 2021.03.28 05:30 | 수정 2021.03.28 05:30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명재고택. 조선시대 학자 파평윤씨 명재 윤증 선생의 집이었다. 이곳 사랑채에 ‘이은시사(離隱時舍)’란 현판이 걸려 있다. ‘속세를 떠나 은거하며 나아갈 때를 아는 집’이란 뜻이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의 고향이자 파평윤씨(坡平尹氏) 후손들이 다수 거주하는 집성촌이다. 윤씨 조상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일대에 집성촌을 형성, 마을 저수지를 중심으로 선영과 재실, 신도비, 종학당 등을 곳곳에 조성했다. 저수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엔 조선시대 학자 명재 윤증 선생이 살던 명재고택이 옛 모습 그대로 있는데, 이곳 사랑채엔 오래전부터 다음과 같은 현판이 걸려 있다. ‘이은시사(離隱時舍)’. 명재고택 유지·관리를 책임져 온 윤완식씨는 이 네 글자를 ‘속세를 떠나 은거하면서 나아갈 때를 아는 집’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단순히 ‘나오라’ 했을 때 나가는 게 아니라 ‘그 정도 봉사했으면 됐다’ 정도의 이야기가 있을 때 나가야 한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 현판은 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르면서 종친회 안팎에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노성면 파평윤씨 집성촌에서 부쩍 윤 전 총장 이야기가 많아진 건 단순히 같은 파평윤씨란 혈연으로 맺어져서만은 아니다. 실제 윤 전 총장 일가는 이곳과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매년 봄이면 전국 파평윤씨가 모여 제를 올리는데, 윤기중 교수도 최근까지 이곳을 방문했다. 윤 전 총장의 경우 2008년 대전지방검찰청 논산지청장 역임 당시 마을에 종종 모습을 비치곤 했다. 정치권에선 윤 전 총장이 서울 출생이지만 부친의 고향이 논산이란 점 등에서 사실상 ‘충청’ 사람으로 분류한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윤 전 총장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높아지면서 그를 대놓고 띄워주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파평윤씨 종중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두식 백록학회 이사장은 “우리는 선대부터 벼슬을 잘 하지 않아 선비답게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한편으론 정계 진출을 바라는 이들도 적지 않다”며 “내 마음속으론 물론 잘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종중회 소속 한 관계자의 이야기는 더 구체적이다. “같은 일가로서 윤 총장이 국가를 이끌기를 바란다. 그가 나오면 우리가 어디를 가겠나. 모두 틀림없이 그쪽으로 쏠릴 거다. 지금 같은 시국에선 윤 전 총장이 필요하다.” 마을 사람들은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지나면 윤 전 총장이 한 번쯤은 이곳에 내려올 거라 보고 있다. 큰일을 치르기 전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는 등의 풍습에 따른 기대감에서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파평윤씨 노종파 대종중 묘역 너머로 마을 저수지와 민가들이 위치해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윤석열 지지율 이끄는 충청권
이곳 윤씨 집성촌 사람들의 지지와 염원은 같은 종친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지만, 충청 지역 민심이 집약돼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러 충청권 출신 인사들이 대권후보로 거론되어 왔으나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된 전례는 없다. 언뜻 떠오르는 인물만 나열해 보아도 김종필·이회창·이완구·이인제·정운찬·반기문·안희정 등 적지 않다. 윤 전 총장에 대한 충청 민심은 ‘이번만큼은 다르지 않겠냐’는 기대로 나타나고 있다.
충남도의회의 한 4선 의원은 “윤 전 총장의 연고와는 별개로 그의 선산이 논산에 있다 보니 그에게서 느끼는 연대감이나 동질감이 상당하다”며 “뚜렷한 대권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현 정권을 상대로 해 나온 점은 지역에 강한 인상을 심고 있다”라고 말했다. 충청권을 지역구로 둔 야당의 한 중진의원은 “과거 실패의 경험으로 충청 인사의 대권가도는 지역민들의 염원이 됐다. 그때의 좌절감은 현재의 기대감으로 번지는 중이다. 윤 전 총장의 기세는 과거 인물들과는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는 최근 윤 전 총장의 지지율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TBS 의뢰로 실시한 지난 3월 1·2·3주 차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각각 32.4%, 37.2%, 39.1%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다. 3주 차에서 윤 전 총장은 이재명 경기지사(21.7%), 이낙연 의원(11.9%), 홍준표 의원(5.9%), 추미애 전 법무장관(2.7%), 유승민 전 의원(2.7%) 등을 10%포인트 이상의 차로 크게 앞질렀다.(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의 이런 지지율은 그동안 충청권 대선주자로 두각을 나타냈던 어느 인사들보다도 높은 수치다. 2017년 19대 대선후보로 거론되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만 해도 대권 지지율은 다수 여론조사에서 20%를 웃도는 데 그쳤다.
윤 전 총장의 이런 높은 지지율의 바탕에는 충청 지역의 압도적 지지가 깔려 있기도 하다. 윤 전 총장에 대한 충청권(대전·세종·충청) 지지율은 최근 30~40% 안팎을 기록하며 보수 색채가 강한 PK 및 TK 지지율과 비등한 수준이다. 3월 2주 차에선 충청권 지지율이 1주 차 대비 9.2%포인트까지 오른 46.7%를 기록하며 TK(52.6%) 다음으로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한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윤 전 총장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당시 윤 전 총장에 대한 충청권 지지율은 33.8%로 PK(30.4%), TK(27.3%)를 모두 앞지르기도 했다. 박찬주 국민의힘 충남도당위원장은 “대전·세종을 떼고 보면 충청의 지지율은 TK보다 더 높게 나타날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지난 3월 3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구고등검찰청에 방문한 모습. 정치권에선 TK·PK 외연 확장을 위한 정무적 행보란 분석이 나온다. photo 김동환 조선일보 기자
과거 충청권 인사와는 다른 정치적 흡인력
단순 지지율 비교 이외에도 윤 전 총장이 처해 있는 정치적 여건이 과거 충청 출신 대선주자와 다르다는 점도 충청권이 기대감을 갖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과거 주자들은 충청이란 지역적 기반을 중심으로 정치세력화를 도모했었다. 이 때문에 영남 내지 호남과의 지역 연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또는 기존 정당의 조직력 위에 올라탔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나 이인제 전 의원 등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윤 전 총장은 정당에 속하지도 않고, 특정 지역 기반에 기대지 않은 상황에서 오로지 이름 석 자만으로 30% 전후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윤 전 총장이 주축인 제3지대의 등장 가능성이 지속해서 거론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치권에선 다만 3지대만으론 대선에 나가 성공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에서 윤 전 총장이 향후 야권 개편에 시동을 걸 거란 시선이 많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에게 진 것으로 볼 때 제3지대 인사들의 독자세력화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증명됐다.
국민의힘 안팎에선 이미 윤 전 총장과의 연대나 포섭 의지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3월 8일 비상대책위 회의를 마치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별의 순간’을 잡은 것 같다”며 윤 전 총장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충남 공주시·부여군·청양군을 지역구로 둔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조국이 옳으면 1번, 윤석열이 옳으면 2번을 찍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정 의원은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3지대 세력화라는 건 성공 사례가 없거니와 그 자체로도 허구다. 지금의 야권은 결국 단일대오로 재편될 것이며 그 통합 후보로 윤 전 총장이 대안이 될 거라 본다. 윤 전 총장과 국민의힘 연대는 필연”이라고 말했다.
정 의원은 윤 전 총장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를 총괄한 점과 관련해선 “검사의 본분을 다한 거다. 누가 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며 “2012년 18대 대선 하루 전날 윤 전 총장이 부친 윤기중 교수와 함께 박 전 대통령 광화문 유세에 참관했다는 이야기를 측근을 통해 들었다. 전직 대통령 수사는 당에서 문제될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정 의원은 5선에 정무감각 등을 높이 평가받아 당 안팎에선 차기 유력 당 대표 후보로도 거론된다. 향후 윤 전 총장에 대한 당의 영입 속도가 정 의원을 주축으로 가팔라질 거란 관측도 나온다.
국민의힘 세종시당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김병준 전 비상대책위 위원장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3지대’라는 말 자체가 기존 정당과의 대등한 연합을 위한 조치일 수 있다. 세력 기반이 약한 상황에서 들어오면 결국 힘을 못 쓰고 묻힐 가능성이 커서다.” 김종필 전 총리가 15대 대선을 앞두고 ‘충청 핫바지론’으로 충청 표심을 결집했지만 DJP연합(김대중·DJ, 김종필·JP의 단일화)으로 사실상 충청대망론을 실현하지 못한 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겨룰 만한 힘을 갖추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김 전 위원장은 “윤 전 총장의 경우 이미 그 존재만으로 제1야당을 빨아들이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충청은 될 만한 사람 뽑는다”
충청권은 특정 정당에 대한 쏠림 없이 캐스팅보터의 면모를 보여왔다는 특징이 있다. 역대 총선만 해도 여야는 충청권(충남·충북) 지역구를 엇비슷하게 나눠 가졌다. 19대 총선에선 새누리당이 9곳, 민주통합당은 6곳, 20대에선 새누리당 11곳, 더불어민주당 8곳, 21대에선 미래통합당 8곳, 더불어민주당 11곳 등이었다. 윤 전 총장이 현재까지 보여온 이미지는 여야 내지 진보·보수에 휩쓸리지 않는 강한 리더십인데, 이는 중도 표심이 강한 충청권 표심과 어느 정도 부합하기도 한다. 이런 지지세를 한 번에 따내기 위해선 유력 대권주자란 인식을 심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소장은 “충청대망론이 지속해서 실패한 데엔 충청만을 고집하다 TK·PK 등 외연 확장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전국적 유력 주자란 인식을 주지 못한 데 있다”라며 “윤 전 총장이 지난 3월 3일 사직 하루 전날 충청권이 아니라 대구고검·지검을 찾은 건 이를 이해한 윤 전 총장의 정무적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2010년대 충청권 대선주자였던 한 인사는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충청권 표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말하길 ‘충청 사람들 속은 잘 모르겠다’ 하더라. 좋게 말하면 합리적이며 대통령이 정말 될 법한 사람을 찍는다는 이야기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조건 충청 사람만 서포트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근데 윤 전 총장은 1940년대 정권에 굴복하지 않던 독립운동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과 비견되기도 한다. 그의 인품, 능력이 과거 인사들보다 훌륭하다는 이야기다.”
최근 충청권에서 불거지는 상대적 박탈감 역시 충청대망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분위기다. 정부·여당이 보궐선거를 앞두고 가덕도신공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선거가 없는 충청권의 숙원사업에 대해서는 큰 움직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충청권 광역철도나 서해 KTX 철도망 구축, 서산공군비행장 민항 유치 등이 대표적 사업들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이명수 국민의힘 의원 등 충청도를 지역구로 둔 야당 의원들은 지역 언론을 통해 ‘충청 홀대론’을 집중적으로 키워나가는 중이다.
박찬주 국민의힘 충남도당위원장은 “사실 문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이 컸지만 정책적으로 이뤄진 게 없고 이는 반문 정서로 이어지고 있다”며 “지역에선 충청권을 향한 구애를 놓지 않았던 노무현 정부와도 대비한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대선후보 당시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공약으로 충청권 표심을 결집한 이후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조성해 충청에 대한 지원을 이어나갔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도 세종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추진 등으로 노무현 정부의 원안을 받아들이곤 충청 지원을 확대하는 내용을 검토한 바 있다.
이런 지역 분위기는 이른바 반문 정서로 이어져 여론조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리얼미터에 따르면, 올해 문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에서 긍정평가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신년기자회견이 진행됐던 1월 3주 차(43.0%)인데 당시 충청권의 부정평가는 그 전주 대비 5.8%포인트 오른 54.2%를 기록하며 TK(76.4%), 강원(54.5%) 다음으로 높게 나타났다.
충청도를 지역구로 둔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총선 유세에서부터 ‘윤석열 대망론’을 주도해왔다. 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여의도 문법 벗어난 새 정치 보여야”
윤 전 총장은 아직 향후 행보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정치권 밖에선 그에 대한 지지 기반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상당하다. 대표적인 곳이 ‘윤석열을 사랑하는 모임(윤사모)’이다. 지난해 1월 조직된 윤사모의 일반 회원은 약 2만1000명, 대학교수 및 중소기업 CEO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 회원은 1만8500여명이다. 윤사모는 전국 253개 선거구 지역위원장 선임 절차에 돌입했다. 3월 27일엔 정당법에 따라 중앙당 창당 발기인 대회를 진행한 후 본격적으로 창당 준비위원회 체제를 가동하겠다는 계획이다. 당명은 ‘다함께자유당’(가칭)이다.
윤사모 회장인 홍경표 법무법인 신율 법무이사는 “정치인은 의지가 있는데 조직이 없는 경우, 의지는 없는데 조직이 있는 경우로 나뉜다. 여기서 조직은 민초, 즉 국민들이다. 윤 전 총장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이를 준비해 원활하게 정계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윤사모엔 충청권 지역인사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홍 회장은 “국내 정치가 영남, 호남으로 갈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중간에 매개할 요소가 필요한데 이를 해낼 수 있는 건 충청뿐”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충청대망론이라는 일종의 지역주의에 기대는 것이 오히려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다음은 PK 출신 한 정치권 인사의 이야기다. “충청대망론이 설득력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역주의가 한국 정치에서 특정 지역을 소외시키는 등의 폐해를 낳았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윤 전 총장이 충청대망론에 올라타는 순간 자칫 윤석열 바람은 빠질 수 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 정치를 그려낼지, 스스로 하기 어렵다면 좋은 참모를 기용해 이를 보여줘야 한다. 지금껏 그랬듯 기존 정치와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구현해내야 한다.”
김병준 전 비대위원장 역시 충청대망론이란 잣대로 민심을 재단하는 기존 정치권의 관습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존 여야 정당에선 소위 여의도 문법을 버려야 한다. 반기문 전 총장이 등장했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신념이나 가치 등을 표명하기도 전에 새 인물, 흡인력에 따라 이합집산하다 실패했다. 이번엔 정치권도 다르길 바란다. 정치적 견해부터 묻고 따지길 당부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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