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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다 더 아픈 치유의 시간

다 더 아픈 치유의 시간

등록 :2021-03-19 04:59수정 :2021-03-19 09:24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29)<잉글리시 페이션트>, 상처조차 매혹적인 사람
삶이 폐허가 된 순간에도 계속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전쟁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강박에 괴롭다면 이야기의 온기 쬐길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한 장면.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전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역대 맨부커상 중에서 최고의 작품을 기리는 ‘황금 맨부커상’ 또한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돌아갔다. 영화사 오원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뒤에도,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억울함도 분노도 없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나의 이런 질문에 이 작품은 너무도 해맑고 다정하면서도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속삭인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도저히 치유될 것 같지 않은 무시무시한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그 모든 상처와 절망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지상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이탈리아 북부의 버려진 수도원.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원에서, 치명적인 전신 화상으로 죽어가는 영국인 환자, 그를 놀라운 인내력으로 돌보는 스무 살 간호사 해나, 연합군 스파이였던 도둑 카라바지오, 폭탄처리 전문가이자 시크교도인 공병 킵이 모여 산다. 그들에게 이 버려진 수도원은 기묘한 편안함을 주는 은신처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 수도원은 버려진 폐허이기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신원 미상의 영국인 환자는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심각한 화상을 입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의료용 모르핀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도 너무나 침착하게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전쟁의 포화로 약혼자가 사망한 뒤 모든 희망을 잃은 해나는 공식적인 간호사 업무를 거부하고 홀로 수도원에 남아 이 영국인 환자를 보살피기로 결심한다. 죽은 약혼자에 대한 끝나지 않은 사랑을 간직한 채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해나를 보며 카라바지오는 소리친다. “스무 살짜리가 유령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다니!” 카라바지오는 해나를 걱정하며 말한다. “넌 슬픔으로부터 너 자신을 보호해야 해. 슬픔은 거의 증오에 가까워.” 하지만 해나는 가망 없는 영국인 환자, 얼굴도 이름도 없는 환자를 치유하며 자기 안에 새로운 희망이 싹트기 시작함을 느낀다. 슬픔은 눈물로 젖어버린 마음에 피어나는 곰팡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말라붙은 토양에 내리는 단비처럼 해나의 메마른 감성을 어떻게든 살아 있도록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무너진 삶에 주춧돌을 다시 세우는 일

난청까지 겪고 있는 영국인 환자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죽어가면서도 ‘마음의 눈’만은 생생하게 뜨고 있다. 그래서 한눈에 알아본다. 해나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돌보고 있지만, 사실 해나는 의사보다는 환자에 가깝다는 것을. 죽은 약혼자를 잊지 못한 해나는 ‘우리 둘 모두 유령을 사랑하고 있다’며 영국인 환자와 자신의 공통점을 알아챈다. 해나에게 이 영국인 환자를 살리는 것은 무너져버린 자신의 삶을 주춧돌부터 다시 세우는 일이며, 자신을 한번도 제대로 돌본 적 없는 가난한 시골 소녀가 자기 대신 선택한 또 하나의 분신을 온몸을 다해 돌보는 눈물겨운 몸짓이기도 하다. 영국인 환자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영국인 환자의 본래 이름은 알마시, 그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유령은 바로 자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여인 캐서린이었다. 영국 지리학회의 탐사작업 도중 리비아 사막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시각각 밀려드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을 나눈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목 아래 우묵한 부위를 ‘보스포루스 해협’이라 부르는데, 그곳은 세상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캐서린의 흉골상 절흔(Suprasternal Notch), 그곳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유일무이한 고유성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캐서린의 목선 아래 움푹 파인 부분, 그들만의 보스포루스 해협은 전쟁의 광포함으로부터, 세상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그들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토록 사랑했던 캐서린은 사막 한가운데서 비행기 사고로 조난당했고, 알마시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사막을 무려 120킬로미터나 걸어 영국군에게 구조를 요청하지만 끝내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사랑했지만 지켜주지 못한 여인 캐서린을 가슴에 품은 채 알마시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것이다.<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주인공들은 세상의 잔혹한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은신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렇게 숨어 살면 세상의 무서움과 추악함뿐 아니라 세상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부터도 소외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모든 아름다움과 추악함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쳐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버려진 폐허 속에서도 또 다른 생의 아름다움은 탄생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마저 숨긴 채 삶에 대한 희망을 모두 놓아버렸지만, 자신을 향한 해나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마지막 이야기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알마시. 세상 모든 슬픔으로부터 도망쳐 단 한명의 이름 모를 화상 환자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낯선 나라의 폐가에서 살고 있는 해나. 신출귀몰한 솜씨로 온갖 장소들에 교활하게 숨겨진 지뢰를 찾아내며, 전쟁을 일으킨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안고 살아가는 공병 킵. 도둑이자 스파이라는 복잡한 과거를 간직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토록 의심하고 혐오하는 영국인 환자에게 점점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카라바지오도. 모두가 지극한 공포와 폐허 속에서도 마침내 살아갈 희망을 찾는다. 필사적으로.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아

그들은 한사코 사랑과 희망과 행복으로부터 도망치지만,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원에서도 새로운 희망과 사랑과 행복은 별들처럼 반짝인다. 이 세상의 잔인함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저마다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전쟁의 상처로부터 도망쳐왔지만, 그들은 또 하나의 더 큰 전쟁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고통에서 스스로를 구해내는 치유의 전쟁. 괴로워하는 환자를 향한 돌봄과 보살핌에 온몸을 던지다보면 어느새 내 몸도 마음도 치유되어 있는 기적 같은 구원도. 치유는 서로를 향해 총탄을 발사하는 전쟁보다 힘겨운 또 하나의 마음속 전쟁이다.그리하여 진정으로 남을 보살필 결심을 한 자는 한평생을 건다. 그 어떤 치유의 약속도 없는 곳에서, 그 어떤 회복의 기미도 없는 곳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생을 건다. 그리하여 기약 없는 돌봄 속에 진정한 치유가 있다. 해나는 자신의 행복 따위는 완전히 포기한 채 어떻게든 이 이름도 사연도 모르는 영국인 환자의 고통을 경감해주려 하지만, 어느 순간 영국인 환자의 목숨을 건 사랑 이야기가 자신을 치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죽어가는 사람,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 두 사람의 미칠 듯한 사랑 이야기가 자신을 치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간호사인 해나가 영국인 환자를 치유하는 걸로 믿었는데 알고 보니 한 발짝도 홀로 움직이지 못하는 영국인 환자가 이 젊은 간호사를 치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나는 알마시의 육체적인 고통을 돌보고, 알마시는 해나가 앓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돌보며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영국인 환자 알마시는 해나가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청년 킵을 ‘파토 프로퍼거스’(Fato profugus)라고 불렀다. 운명의 도망자라는 뜻이다. 대오에서 완전히 이탈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이질감과 이방인의 소외감을 그들은 공유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잠깐 스쳐 지나간 단어지만, 나는 이 단어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운명적으로 추방된 자만이 삶의 가장 깊은 정수를 빨아들일 수 있음을. 이 네명의 추방자들은 바로 그 운명적인 탈주와 타고난 슬픔으로 깊이 연대한 채,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과 삶의 가장 비참한 순간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삶의 추악함은 물론 아름다움까지도 거부하려 했지만, 그 모든 살아 있음의 흔적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그 치유의 전쟁, 희망이라는 이름의 총성 없는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온몸이 새카맣게 타버려 신원조차 알아볼 수 없는 알마시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온갖 이야기들이다. 그가 죽는 순간 이 모든 지혜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두려울 정도로,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모두 태워 이야기의 불꽃 하나를 지펴 올리는 이야기꾼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유일한 장작으로 삼아 그 삶이라는 장작을 남김없이 태워 그것을 이야기로 만든다. 해나는 슬프지만 그를 보내줘야 한다. 영국인 환자의 모든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을 뿌리내리기 시작했으므로. 그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리라 결심한 스무 살. 이제 영국인 환자가 피워올린 이야기의 불꽃으로 이미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생의 토양은 촉촉하고 따사롭게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해나는 다시 사랑의 씨앗을, 희망의 묘목을, 설렘의 새싹을 키울 수 있는 존재로 부활한다. 때로는 상처를 입는 순간의 아픔보다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더욱 괴롭힌다. 상처보다 더 아픈 치유의 과정이 우리의 무릎을 꺾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문학은, 끝내 아름다운 타인의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 당신이 이야기의 모닥불로 얼어붙은 심장을 데우는 모든 순간, 이야기는 당신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의 불을 지필 것이다. 때로는 상처보다 치유가 더 아픈 당신에게, 상처에 결코 무너지지 않은 주인공들, 그리하여 상처마저 매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포근한 응원의 손을 내밀 것이다.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