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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론

[송평인 칼럼]윤석열의 정치적 소명의식

송평인 논설위원 입력 2021-03-10 03:00수정 2021-03-10 04:29

 

윤석열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
여기서 시대정신을 읽는 걸 넘어 자기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소명의식을 지닌 정치인이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윤석열이 검찰총장에서 사퇴한 후 야권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더 키우고 있다. 그가 정치하겠다고 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 안 하겠다고 한 적도 없다. 그의 경우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게 긍정으로 읽히는 경우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에 의존해 사는 직업정치가와 정치를 위해 사는 정치가, 즉 소명(召命)의식을 가진 정치가를 구별한다. 정치권 밖의 한 분야에서 확고하게 자기 입지를 굳힌 사람이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 정치권에 들어오는 경우는 베버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본 직업정치가와 달리 소명의식을 가진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카리스마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카리스마는 본래 신의 은사(恩賜)라는 뜻이다. 정치적 카리스마는 본인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대중의 지지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 지지는 은사적이다. 본인이 거기서 시대의 정신을 읽고, 시대의 정신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면 그때의 정치는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된다.

윤석열의 검찰총장 사퇴는 잘했다고 보면서 그의 대권 도전은 부적절하다고 보는 이가 많다는 한 여론조사는 기만적이다. 윤석열을 내쫓고 싶은 문재인 지지 응답자들에 의해 왜곡이 빚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 밖의 인물이 정치에 뛰어드는 데 대한 반대 여론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정치는 직업정치가가 해야 한다는, 그럴듯하지만 근거 없는 사고에 기인하고 있다. 이상적인 정치는 소명의식을 가진 지도자가 직업정치가들을 이끄는 정치다.

 

더불어민주당은 가장 직업적인 정치가들인 운동권 출신에 의해 장악된 정당이다. 이들은 국회뿐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을 장악하고, 전통적으로 전문직이 수행하는 장관직까지 진출해 국회와 정부의 분립 기반을 무너뜨리고, 공기업 임원과 공공기관 단체장직을 약탈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정권 연장에 필사적인 것은 대부분 한 번도 정치 이외의 직업을 가져보지 못한, 그래서 정치를 계속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직업정치가들이기 때문이다.

베버는 정치 기자를 현대적 대중 정당에 속한 직업정치가가 생기기 전부터 활동한 최초의 직업정치가라고 봤고, 변호사를 다른 전문직과 달리 정치를 겸할 수 있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정치에 몸담을 수 있는 제1의 직업정치가 예비군으로 봤다. 노무현 정동영 문재인 이낙연 등 민주당 쪽에서 내세운 역대 대선 후보(혹은 예비주자)는 예외 없이 변호사 출신이거나 정치 기자 출신이다.

보수 정당의 위기는 박근혜 탄핵으로부터가 아니라 박근혜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정치 외의 어떤 직업도 가져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노련한 직업정치가도 아니었다. 좋은 정당은 정치권 밖으로부터의 충원에 의해 활력을 얻는 법인데 보수 정당은 법관 출신에 대쪽 감사원장으로 통했던 이회창과 기업가 출신으로 성공적인 서울시장을 지낸 이명박 같은 외부 충원이 박근혜를 기점으로 사라짐으로써 위기를 맞았다.

10년 전 안철수가 별의 시간을 맞았고 지금 윤석열이 별의 시간을 맞고 있다. 안철수는 국민의힘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고 윤석열도 정치를 한다면 그의 인적 네트워크의 스펙트럼이 좌우로 널리 퍼져 있어 국민의힘과 일정한 거리를 둘 것으로 예상된다. 10년 간격으로 별의 시간을 맞은 두 사람이 다 국민의힘과 거리를 둔다는 사실이 보수 정당의 진짜 위기를 보여준다. 국민의힘은 안철수, 윤석열과의 연대를 통해 유연하게 변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안철수는 그동안 분명한 소명의식을 보여줬다. 그가 내년 대선 출마를 포기하고 서울시장에 도전장을 낸 것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현실적 면이 없지 않지만 ‘야권의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전초전부터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면도 분명히 있음을 평가해야 한다.

문제는 윤석열에게 소명의식이 있느냐는 것이다. 소명의식이란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를 향해 거듭되는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갈 힘이다. 대선에서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못하고 일어설 목표가 있어야 소명의식이 있다고 할 것이다. 반기문은 그런 소명의식 없이 거품 같은 인기에 의존해 나왔다가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