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암 투병 중인 노(老)학자가 마루에 쪼그려 앉아 발톱을 깎다가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렸다. 멍들고 이지러져 사라지다시피 한 새끼발톱, 그 가여운 발가락을 보고 있자니 회한이 밀려왔다. “이 무겁고 미련한 몸뚱이를 짊어지고 80년을 달려오느라 니가 얼마나 힘들었느냐. 나는 왜 이제야 너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냐.”
햇볕 내리쬐던 가을날,
노인은 집 뜨락에 날아든 참새를 보았다. 어릴 적 동네 개구쟁이들과 쇠꼬챙이로 꿰어 구워 먹던 참새였다. 이 작은 생명을, 한 폭의 ‘날아다니는 수묵화’와도 같은 저 어여쁜 새를 뜨거운 불에 구워 먹었다니···. 종종걸음 치는 새를 눈길로 좇던 노인은 종이에 연필로 참새를 그렸다. 그리고 썼다. ‘시든 잔디밭, 날아든 참새를 보고, 눈물 한방울.’
마지막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웠을 때 이어령은 작은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참새 한 마리를 보고, 발톱을 깎다가, 코 푼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다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 소회를 짧은 글로 적고 간혹 그림도 그렸다.
췌장암 투병 중 올해 미수를 맞은 이어령은 "어떤 고통이 와도 글을 쓰고 싶다. 그 의지가 나를 살게 할 것"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 “죽음이 목전에 와도 글을 쓰겠다”
췌장암 투병 중인 이어령(88) 선생을 만난 건 지난 10월 말이다.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체중이 50㎏대로 내려왔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해온 그는 살아갈 날, 아니 견딜 수 있는 날들이 6개월에서 3개월, 다시 1개월로 줄어들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최근 분신과 다름없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의 문을 닫았다.
일주일에 한 번 기(氣) 치료만 받는다는 그가 “심심할 때마다 병상에서 끄적였다”는 낙서장을 가져왔다. 시 같고 짧은 산문 같은 글들이 거기 있었다. 일기 쓰듯 매일 낙서를 하다 ‘눈물 한 방울’이라는 다섯 글자를 떠올렸다고 했다. “늙으니 춤을 출 수 있나, 남을 대신해 노동을 할 수 있나. 늙고 병든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회한의 눈물 담긴 시(詩) 한 줄뿐이더군요.”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을 펴낸 바 있는 이어령이 새해 시제(詩題)로 삼은
‘눈물 한 방울’은 병상 위에서 사위어 가는 한 노인의 푸념, 넋두리가 아니다. ‘디지로그’ ‘생명자본’ 등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해온 이 석학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화두가 ‘눈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어요.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눈물, 즉 박애(fraternity)예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어요. 대한민국만 해도 적폐 청산으로, 전염병으로, 남북 문제로 나라가 엉망이 됐지만 독재를 이기는 건 주먹이 아니라 보자기였듯이 우리에겐 어느 때보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절실합니다.”
프랑스 학자이자 마르크시스트인 자크 아탈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부른 것이 이기적 생존 경제라면 이제 인류는 이타적 생명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령은 그보다 10년을 앞서 ‘생명이 자본이다’ ‘정보화 다음은 생명화 시대’라고 선언했다.
“나는 눈물 없는 자유와 평등이 인류의 문명을 초토화시켰다고 봐요. 우리는 자유를 외치지만 코로나19는 인간이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줬지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릴 보고 비웃어요. ‘너희들은 짐승이야. 까불지마. 나만도 못해. 난 반생명 반물질인데도 너희들이 나한테 지잖아? 인간의 위대한 문명이 한낱 미물에 의해 티끌처럼 사라지잖아?’ 하고 말이죠.”
이어령은 오늘의 재앙을 끝내는 길, 몸과 더불어 영혼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눈물을 갈구하는지는 최근의 트로트 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나 유발 하라리 같은 지식인들이 외치는 백마디 말이 트로트 한 곡이 주는 위로를 당하지 못해요. 무대 위 가수의 노래를 듣고 우는 객석의 청중을 보고 시청자들이 다시 울지요. ‘아직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막간 세상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에···. 분노와 증오, 저주의 말이 넘쳐나는 시대, 누군가는 바보 소리를 들을지라도 날카롭게 찔리고 베인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어령의 ‘눈물족자’를 그림으로 그려보겠다고 한 건 화가 김병종(67.서울대 명예교수)이다. 6년 전 ‘생명 그리고 동행’이란 제목의 시화전을 이어령과 함께한 그는 “선생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게 될 흔적을 예술로 승화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주말’ 연재를 제안하자 이어령이 빙그레 웃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과 연재를요?” 다만, 죽음이 목전에 오더라도 펜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글을 쓸 수 있다면, 성경의 욥처럼 죽는 날까지 반석 위에 이 고통을 새길 수 있어요. 그 의지가 내겐 혈청제예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요.” 세밑이던 29일, 그는 영정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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