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 인격은 어느 정도 될까요?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13)은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두산 백과)
귀주대첩이란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거란이 비록 흥화진에서 고려에 패하긴 했지만 쉽게 포기할 소배압이 아니었습니다.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밀어닥쳤습니다. 개경은 비상 사태에 돌입을 하였습니다. 개경 주변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성 안으로 피신시키고, 곡식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우물은 모조리 메워 버리게 했습니다. 적군의 식량이 될 만한 것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적군의 굶주림과 피로에 지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 청야 전술 " 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배압은 철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철수하는 거란군이 압록강 근처의 귀주에 도착했습니다. 귀주는 25년 전, 서희의 담판으로 얻은 강동 6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귀주의 동쪽 벌판에서 전투가 시작 되었습니다. 밀고 당기는 팽팽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거란군 쪽으로 몰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려군은 때를 놓칠세라 바람을 타고 적진에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고려군의 대승이었습니다. 거란의 10만 군사 중에 살아서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불과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전투를 " 귀주 대첩 "이라고 합니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위대한 장군의 인품
명장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고 돌아오자 현종왕이 친히 마중을 나가 얼싸안고 환영했습니다.
또한 왕궁으로 초청해 중신들과 더불어 주연상을 성대하게 베풀었습니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강감찬 장군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소변을 보고 오겠다며, 현종의 허락을 얻어 자리를 떴습니다.
나가면서 장군은 살며시 내시를 보고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자 시중을 들던 내시가 그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강장군은 내시를 자기 곁으로 불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조금 전에 밥을 먹으려고 밥그릇을 열었더니 밥은 있지 않고 빈그릇 뿐이더군.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짐작하건데 경황 중에 너희들이 실수를 한 모양인데 이걸 어찌하면 좋은가?"
순간 내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빈이 강감찬 장군이고 보면 그 죄를 도저히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내시는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부들부들 떨기만 했습니다.
이때 강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미가 급한 상감께서 이 일을 아시면 모두들 무사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가?
내가 소변보는 구실을 붙여 일부러 자리를 뜰 것이니, 내가 자리에 앉거든 곁으로 와서'진지가 식은 듯 하오니 다른 것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른 것을 갖다놓는 것이 어떨까?"
내시는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있은 후, 강감찬 장군은 이 일에 대해 끝가지 함구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내시는 그 사실을 동료에게 실토했으며,
이 이야기가 다시 현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훗날 현종은 강감찬 장군의 인간됨을 크게 치하해 모든 사람의 귀감으로 삼았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간 용모 강감찬은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 사람의 인격과 재능이 외모의 잘나고 못남에 정비례하랴.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처신이 신중하며 위엄이 있어 정적(政敵)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명문 귀족 진주강씨 가문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관직에서는 청백리의 모범이었던 충신이자 영걸이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능력이 뛰어나고
돈이 많다 하더라도,
인격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지 못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인격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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