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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스르기

끝내 얼굴 가린 '1억 기부 할머니'

끝내 얼굴 가린 '1억 기부 할머니'

이달 초 연세대 기부 후 사라져… 파주에서 찾아
"자식들 알면 큰일나" "난 모르는 일" 공개 꺼려

조백건 기자 loogu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에요." 지난 1일 연세대에 1억원을 기부한 할머니는 이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살구색 재킷에 헐렁한 바지를 입고 학교 식당에 들어선 할머니는 물어 물어 학교 본부까지 찾아가 꼬깃꼬깃한 수표를 건넸다 했다.

"토지보상금으로 받은 이 돈을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고만 했을 뿐, 이름도 주소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도대체 누굴까. "자식들 대학 공부는커녕 밥도 제때 못 먹였다"는 할머니가 왜 1억원이란 거금을 학교에 기부했을까. 본지 5일자 A1면에 보도된 이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할머니가 타고 떠났다는 경기도 파주시 금촌행 버스를 무작정 올라탔다. 단서는 '60대 후반, 정씨 성(姓), 자식이 ○명'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할머니를 직접 봤던 학교 직원으로부터 그 생김새와 옷차림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파주 금촌동에 내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이런 할머니 아느냐"고 물었다. 허사였다. 돌아와 밤새 고민하던 중, 어느 순간 '기독교 학교인 연세대에 기부한 할머니는 기독교 신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다음날 아침 금촌동 주변 교회를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100개가 넘었다. 56번째 교회에 전화를 걸었을 때, 교회 직원의 반가운 응답이 들렸다. "자식이 ○명이고, 60대 후반인 정씨 할머니요? 그런 할머니가 한 분 있기는 한데…."

집 앞으로 찾아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살구색 재킷'과 '헐렁한 바지'를 입은 한 할머니가 아파트 문을 나서는 것이 보였다. "정씨 할머니 되시죠? 연세대에 1억원 기부하셨다는 얘기 듣고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는 펄쩍 뛰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병원비 낼 돈도 없는데, 기부는 무슨 기부…. 잘못 알고 왔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한참을 붙들고 물어보니 할머니는 난처한 얼굴로 속삭였다. "우리 아이들이 알면 큰일나. 제발 가요." 다음날에도 할머니는 "내가 많이 아파요. 난 모르는 일이니 그만 돌아가줘요"라고 할 뿐이었다. 전화를 걸어도, 초인종을 눌러도, 할머니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할머니 말대로 사람을 잘못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왼손'도 모르게, 아니 자식들도 모르게 기부를 택한 할머니 덕분에, 어려운 환경에서 절망하던 학생들은 희망을 찾게 됐다. 할머니가 건강하시길 빈다.

입력 : 2008.04.09 2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