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 갔다 캔 중투 한 포기…돈 된다 싶어 난에 엎어졌지` [중앙일보]
27년 째 춘란에 미친 `난(蘭)쟁이` 김태석 씨
봄이다. 봄의 전령사(傳令使)라면 복수초ㆍ얼레지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남도땅에선 뭐니 뭐니해도 역시 춘란(春蘭)이다. 오죽하면 ‘보춘화(報春花)’라 이름붙였을까. 그래서 봄자위가 도는 듯 싶으면 100여 만의 ‘난초꾼’들은 설렘에 가득 차고, 이 녘은 어느새 그들의 성지(聖地)가 되곤한다. 전남 담양의 토박이 김태석(51ㆍ금성면 원율리)씨도 이때쯤엔 달뜨는 사람 중 하나이다.
흔히 어떤 한 가지 일에 몰두해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들을 일컬어 ‘쟁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김씨는 분명 ‘난쟁이’이다. 27년 째 춘란과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원(蘭園)을 운영한다고는 하지만 전남 일대 야산을 쏘다니며 야생 난을 채집하는 게 직업인 까닭에 난에 관한 한 눈 밝기가 귀신같다. 술렁술렁 산행을 하는 것 같아도 노련한 어인마니가 산삼을 캐듯 일단 그의 눈길이 꽂혔다하면 어김없이 ‘물건’이다. ‘어인난마니’인 셈이다.
우수(雨水)이던 지난 달 19일. 아침밥을 먹자마자 김 씨가 행장을 꾸린다. 모자를 눌러쓴 등산복 차림에 조그만 배낭을 멘다. 여느 등산객과 영락없다. 다만 배낭 안에 김밥 두 줄과 물통 말고도 은박지가 들어있고, 손엔 지팡이 대신 두발 달린 갈쿠리를 든 게 다를 뿐이다.
10여 년째 길동무를 해온 동료이자 동네 후배인 또 다른 ‘난꾼’ 이준섭(40)씨도 이미 와 있다. 벌써 햇살이 짜하다. 둘은 서둘러 지프차를 몰아 어디론가 내뺀다. 10여 분만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인근 해발 600여m ○○○산 동남향자락.
누가 남도(南道)가 아니랄까봐 어느새 봄기운이 스멀거린다. 버들강아지가 윙크를 하고, 소나무가 새뜻하니 한결 푸르다. 초입부터 여기저기 춘란이 지천이다. 이윽고 두 사람의 난 사냥이 시작된다. 제법 눈에 띄는 ‘토끼촉(산토끼가 뜯어 먹은 포기)’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벙글지 않았지만 꽃대를 뽑아 올린 자태가 고운 놈들도 쓱쓱 지나친다. 못 보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들이 누구인데….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3부 능선쯤에서 갑자기 “심봤다”는 외침이 산을 울린다. 웬 심? 난꾼이 산삼을 발견했다는 말인가? 허둥지둥 올라가보니 김 씨가 한 곳에 엎드린 채 연신 “워 메-워 메”한다. 백 살은 좋이 됨직한 팽나무 밑둥치가 처녀 샅같이 옴폭한데, 그 곳에 난다발이 살포시 앉아있고 김 씨가 들뜬 기분으로 막 드러내려는 참이다. 싱그러운 게 여덟 촉이다. 이 씨도 들뜨긴 매한가지-.
“어이 동상, 좀 보소. 참말로 좋아뿌네 잉.”
“아따 성님, 물견이여 물견. ‘산반중투(散斑中透)’구먼.”
“아먼. 시방은 티미하네만 신아(新芽)가 나오믄 온판 빗살무늬로 화려할꺼이네.”
“아무리 혀도 촉당 십만은 되것지라-잉.”
“그라제”
김 씨가 난을 시작한 건 스물다섯 살 때부터. 동네 선배의 꾐에 빠져 딸기농사로 번 돈 7000여 만 원을 5년에 걸쳐 노름으로 날린 뒤 실의에 빠져 지내다 시름을 덜 겸 인근에 있는 담양댐으로 낚시하러 갔다가 춘란 한 포기를 캔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그가 캔 난은 ‘중투(잎의 가운데로 흰색이나 황색이 깊게 통과한 변이종(變異種)’. 이웃에 사는 ‘난쟁이’어른한테 25만원을 받고서 “돈이 되겠다 싶어” 난세계에 엎으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동네에 난을 혀는 분이 세분 기셨는디, 츰엔 딱이 난을 배우것다고 현 것이 아니라 맴을 달래자고픈 생각에 따라나섰던 거인디 여러 날 께 자미가 새록새록 안 헙디여. 그려서 이러구러 빠져 지내다봉께로 시방 요모양이 되어뿌러지라 잉.”
지난 세월을 얘기하면서 언뜻 눈시울을 붉히는 게 까닭이 깊었다. 사실 그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못나왔다. 면사무소 급사를 하며 3년간 야학엘 다녔지만 교복을 입고 다니는 또래들을 볼 때마다 열 받쳐 친구 두 명과 무작정 상경해 편물공장에서 일했다. 고작 월급 4800원에 새벽6시부터 밤 10시까지 죽도록 고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정도의 노력이면 고향에서 뭘 해도 성공하리라”는 생각이 치밀어 4년 만에 귀향해 딸기농사를 시작했다. 죽자 살자 이태쯤 하니 2000여만 원이 모였다. 소 한 마리에 70만 원 할 때니 꽤 큰돈이었다. 그런데 그 놈의 노름이 문제였다. 하룻밤에 1200만원을 날릴 정도로 빠지다 보니 벌어놨던 건 다 털어먹고, 딸기농사는 현상유지도 안 되고, 노름빚은 쌓여만 가고, 그 짓을 무려 5년이나 했으니….뒤늦게 깨닫고 후회했지만 닥쳐오는 건 죽음 빛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었다. 이미 부인과 자식(2녀1남)이 있는 터였기 때문이다.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 바로 이 참에 낚시를 갔고, 거기서 ‘난 인생’이 시작될 줄이야.
“나멩키로 맹한 놈도 없을 거이지만 일단 잡으면 끝꺼정 들러붙는 성질잉께 난으로 다시 서불기로 참말로 목심을 걸었구만이라.”
동네 난쟁이 어른들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측은하게 여겨선지, 열성이 맘에 들어선지 잘 가르쳐줬다. 전문지 등 책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어려웠다. 꽃(花藝品)은 꽃대로 색과 모양에 따라, 잎(葉藝品)은 잎대로 무늬에 따라 품(品)을 가늠하는 포인트가 헤아릴 수 없는데다 용어마저 죄다 중국ㆍ일본 것들을 빌려쓰다보니 도대체 종잡을 수없었다. 잎무늬 중 한가지인 호피반(虎皮斑)만 하더라도 맹호ㆍ단절반ㆍ시괄ㆍ망지ㆍ취설호ㆍ압상호 등 20여 가지나 되니 말이다. 방법은 하나, 책에서 배운 걸 현장에서 확인하는 길 밖에 없었다.
어른들을 따라 4년 간 담양은 물론 순창ㆍ 함평ㆍ 영광ㆍ 곡성ㆍ 장성 등 난밭이 있다는데 치고 안 가본 데가 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좀 알 것 같다 싶어 독립했다(어른들의 차사정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초짜’는 초짜. 어느 세계이건 초짜를 노리는 사마귀들이 있는 법이어서 그 역시 능란한 장사치들의 농간을 받아 숱한 억울함을 당해야 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해도 끔(시세)을 잘 알덜못혀서 장사꾼들헌테 눈탱이 엄청 맞았지라. 얼렁뚱땅 정신을 빼놓고 사정없이 후려치는디 으디 뺄 재간이 있습디요. 아무리 눅게 혀도 천(만원)은 훨썩 넘는 ‘홍화소심(紅花素心)’을 땡전 팔만에 당했당께요.”
그렇게 7년을 당하고 나서야 꾀가 났다. 알고 보면 지극히 간단한 일이지만 직접 난원을 찾아다니며 시세를 탐지한 뒤 거래를 하면서 ‘눈탱이 맞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돈이 불었고 여섯 평짜리 난실도 마련할 수 있었다. 산에서 채집한 걸 즉시 처분하지 않아도 되니 거래에서 배짱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제값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씨가 지금까지 난쟁이로서 최고가를 기록한 것은 2004년 5월26일 담양군대덕면 용대마을 뒷산에서 캔 ‘중압호(中押縞ㆍ잎의 가운데로 흰색이나 황색의 선이 잎밑에서부터 선명하게 뻗어나가다 잎끝에서 진한 녹색에 눌려 있는 모양의 무늬가 있는 난)’로 7개월간 길러 생긴 새촉과 함께 그해 12월27일 5500만원에 넘겼다. 이 건으로 난 전문지에 실리는 등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6년 전에는 담양군 금성면 개비산 밑자락에서 ‘서반단엽(曙斑短葉ㆍ진한 녹색에 잎끝이 오갈진 키 작은 품종)’ 세 촉을 캐 1200만원에
팔라는 것을 안 팔고 키우다 이듬해 죽여 버리는‘재앙’을 당하기도 했다.
“죽을 뻔도 여러 번 있어라. 물리면 일곱 발도 못 띠고 죽어뿐다는 칠점사를 피하다 한참을 굴러떨어지는 통에 혼절한 적도 있고, 멩품(名品)이 있을만한 데를 찾아 산만 바라보고 운전을 하다 농수로로 차가 구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어라.”
김씨는 숱하게 이런 과정을 겪으며 저절로 마음을 공부했다. 어차피 안달복달한다고 ‘물건’이 잡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마음을 비우자. 하나라도 걸리면 감사하자.
“참말로 희안헌거이 언제부턴가 맴을 빙께 증말 대물(大物)이 나드라 이런 말이여. 이젠 메칠썩 허벌나게 공쳐도 거시기허들 않는당께요.”
그가 난을 하면서 얻은 또 하나 얻은 것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아무리 명품기대주라도 ‘작품(上作)’이 되려면 4~5년은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자칭은‘느림보 농사꾼’이다. 김씨는 현재 꽃물 300여분,잎물 700여분 등 모두 1000여 분을 키우고 있다. 산채(山採)도 꾸준히 하지만 절반가량은 포기나누기를 한 것들이다. 1억원 남짓에‘집떨이’요청도 많지만 절대로 안한다. 한 분에 1000만원 이상 되는 것들도 수두룩한데다 이럭저럭 최하 연 5000만원 벌이는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난은 이미 단순한 취미대상이 아니다. 수요자인 난 애호가가 100여만명이고 배양ㆍ거래 전문가들도 줄잡아 20여만명인 엄연한 산업이다. ‘녹색주(綠色株)’‘난테크’란 말도 있을 정도다. ‘일생일란(一生一蘭)’이란 3예품(藝品·'예'란 춘란이 품종으로 원예가치를 가졌을 때 부르는 용어로 3예품이란 '트리플 A'인 셈이다) 홍두화소심(紅豆花素心)은 한 분(2촉)에 10억원도 넘는다. 난의 ‘행복한 눈물’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난털이도 생겨나고, 어중이 떠중이 난에 뛰어들어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난의 난 자(字)도 모르면서 싹쓸이하는 바람에 군락지를 망치는 건 물론이다. 김씨는 자연훼손 얘기가 나오자 심마니를 보라며 버럭 대든다.
“자연훼손이라고라? 참말로 한심하요. 우덜은 농사꾼이요. 농사꾼이 씨를 말리는 것 봤소? 우덜은 그저 우수 품종 확보를 위해 ‘종자’차원의 채집만 할 뿐 인디언맹키로 필요이상으론 안하요.”
송심난성(松心蘭性)이라더니 과연 그는 어쩔 수없는‘난쟁이’이다.
글=이만훈 인터뷰 전문기자,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27년 째 춘란에 미친 `난(蘭)쟁이` 김태석 씨
이만훈 전문기자의 사람 그리고 세상
난쟁이 김태석씨가 한 시간 산행 끝에 팽나무 아래에서 춘란의 한 종류인 ‘산반중투’를 발견, 기뻐 어쩔줄 몰라하고 있다.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 |
흔히 어떤 한 가지 일에 몰두해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들을 일컬어 ‘쟁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김씨는 분명 ‘난쟁이’이다. 27년 째 춘란과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원(蘭園)을 운영한다고는 하지만 전남 일대 야산을 쏘다니며 야생 난을 채집하는 게 직업인 까닭에 난에 관한 한 눈 밝기가 귀신같다. 술렁술렁 산행을 하는 것 같아도 노련한 어인마니가 산삼을 캐듯 일단 그의 눈길이 꽂혔다하면 어김없이 ‘물건’이다. ‘어인난마니’인 셈이다.
우수(雨水)이던 지난 달 19일. 아침밥을 먹자마자 김 씨가 행장을 꾸린다. 모자를 눌러쓴 등산복 차림에 조그만 배낭을 멘다. 여느 등산객과 영락없다. 다만 배낭 안에 김밥 두 줄과 물통 말고도 은박지가 들어있고, 손엔 지팡이 대신 두발 달린 갈쿠리를 든 게 다를 뿐이다.
10여 년째 길동무를 해온 동료이자 동네 후배인 또 다른 ‘난꾼’ 이준섭(40)씨도 이미 와 있다. 벌써 햇살이 짜하다. 둘은 서둘러 지프차를 몰아 어디론가 내뺀다. 10여 분만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인근 해발 600여m ○○○산 동남향자락.
누가 남도(南道)가 아니랄까봐 어느새 봄기운이 스멀거린다. 버들강아지가 윙크를 하고, 소나무가 새뜻하니 한결 푸르다. 초입부터 여기저기 춘란이 지천이다. 이윽고 두 사람의 난 사냥이 시작된다. 제법 눈에 띄는 ‘토끼촉(산토끼가 뜯어 먹은 포기)’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벙글지 않았지만 꽃대를 뽑아 올린 자태가 고운 놈들도 쓱쓱 지나친다. 못 보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들이 누구인데….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3부 능선쯤에서 갑자기 “심봤다”는 외침이 산을 울린다. 웬 심? 난꾼이 산삼을 발견했다는 말인가? 허둥지둥 올라가보니 김 씨가 한 곳에 엎드린 채 연신 “워 메-워 메”한다. 백 살은 좋이 됨직한 팽나무 밑둥치가 처녀 샅같이 옴폭한데, 그 곳에 난다발이 살포시 앉아있고 김 씨가 들뜬 기분으로 막 드러내려는 참이다. 싱그러운 게 여덟 촉이다. 이 씨도 들뜨긴 매한가지-.
“어이 동상, 좀 보소. 참말로 좋아뿌네 잉.”
“아따 성님, 물견이여 물견. ‘산반중투(散斑中透)’구먼.”
“아먼. 시방은 티미하네만 신아(新芽)가 나오믄 온판 빗살무늬로 화려할꺼이네.”
“아무리 혀도 촉당 십만은 되것지라-잉.”
“그라제”
“우동네에 난을 혀는 분이 세분 기셨는디, 츰엔 딱이 난을 배우것다고 현 것이 아니라 맴을 달래자고픈 생각에 따라나섰던 거인디 여러 날 께 자미가 새록새록 안 헙디여. 그려서 이러구러 빠져 지내다봉께로 시방 요모양이 되어뿌러지라 잉.”
지난 세월을 얘기하면서 언뜻 눈시울을 붉히는 게 까닭이 깊었다. 사실 그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못나왔다. 면사무소 급사를 하며 3년간 야학엘 다녔지만 교복을 입고 다니는 또래들을 볼 때마다 열 받쳐 친구 두 명과 무작정 상경해 편물공장에서 일했다. 고작 월급 4800원에 새벽6시부터 밤 10시까지 죽도록 고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정도의 노력이면 고향에서 뭘 해도 성공하리라”는 생각이 치밀어 4년 만에 귀향해 딸기농사를 시작했다. 죽자 살자 이태쯤 하니 2000여만 원이 모였다. 소 한 마리에 70만 원 할 때니 꽤 큰돈이었다. 그런데 그 놈의 노름이 문제였다. 하룻밤에 1200만원을 날릴 정도로 빠지다 보니 벌어놨던 건 다 털어먹고, 딸기농사는 현상유지도 안 되고, 노름빚은 쌓여만 가고, 그 짓을 무려 5년이나 했으니….뒤늦게 깨닫고 후회했지만 닥쳐오는 건 죽음 빛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었다. 이미 부인과 자식(2녀1남)이 있는 터였기 때문이다.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 바로 이 참에 낚시를 갔고, 거기서 ‘난 인생’이 시작될 줄이야.
“나멩키로 맹한 놈도 없을 거이지만 일단 잡으면 끝꺼정 들러붙는 성질잉께 난으로 다시 서불기로 참말로 목심을 걸었구만이라.”
동네 난쟁이 어른들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측은하게 여겨선지, 열성이 맘에 들어선지 잘 가르쳐줬다. 전문지 등 책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어려웠다. 꽃(花藝品)은 꽃대로 색과 모양에 따라, 잎(葉藝品)은 잎대로 무늬에 따라 품(品)을 가늠하는 포인트가 헤아릴 수 없는데다 용어마저 죄다 중국ㆍ일본 것들을 빌려쓰다보니 도대체 종잡을 수없었다. 잎무늬 중 한가지인 호피반(虎皮斑)만 하더라도 맹호ㆍ단절반ㆍ시괄ㆍ망지ㆍ취설호ㆍ압상호 등 20여 가지나 되니 말이다. 방법은 하나, 책에서 배운 걸 현장에서 확인하는 길 밖에 없었다.
어른들을 따라 4년 간 담양은 물론 순창ㆍ 함평ㆍ 영광ㆍ 곡성ㆍ 장성 등 난밭이 있다는데 치고 안 가본 데가 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좀 알 것 같다 싶어 독립했다(어른들의 차사정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초짜’는 초짜. 어느 세계이건 초짜를 노리는 사마귀들이 있는 법이어서 그 역시 능란한 장사치들의 농간을 받아 숱한 억울함을 당해야 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해도 끔(시세)을 잘 알덜못혀서 장사꾼들헌테 눈탱이 엄청 맞았지라. 얼렁뚱땅 정신을 빼놓고 사정없이 후려치는디 으디 뺄 재간이 있습디요. 아무리 눅게 혀도 천(만원)은 훨썩 넘는 ‘홍화소심(紅花素心)’을 땡전 팔만에 당했당께요.”
그렇게 7년을 당하고 나서야 꾀가 났다. 알고 보면 지극히 간단한 일이지만 직접 난원을 찾아다니며 시세를 탐지한 뒤 거래를 하면서 ‘눈탱이 맞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돈이 불었고 여섯 평짜리 난실도 마련할 수 있었다. 산에서 채집한 걸 즉시 처분하지 않아도 되니 거래에서 배짱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제값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씨가 지금까지 난쟁이로서 최고가를 기록한 것은 2004년 5월26일 담양군대덕면 용대마을 뒷산에서 캔 ‘중압호(中押縞ㆍ잎의 가운데로 흰색이나 황색의 선이 잎밑에서부터 선명하게 뻗어나가다 잎끝에서 진한 녹색에 눌려 있는 모양의 무늬가 있는 난)’로 7개월간 길러 생긴 새촉과 함께 그해 12월27일 5500만원에 넘겼다. 이 건으로 난 전문지에 실리는 등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6년 전에는 담양군 금성면 개비산 밑자락에서 ‘서반단엽(曙斑短葉ㆍ진한 녹색에 잎끝이 오갈진 키 작은 품종)’ 세 촉을 캐 1200만원에
팔라는 것을 안 팔고 키우다 이듬해 죽여 버리는‘재앙’을 당하기도 했다.
“죽을 뻔도 여러 번 있어라. 물리면 일곱 발도 못 띠고 죽어뿐다는 칠점사를 피하다 한참을 굴러떨어지는 통에 혼절한 적도 있고, 멩품(名品)이 있을만한 데를 찾아 산만 바라보고 운전을 하다 농수로로 차가 구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어라.”
김씨는 숱하게 이런 과정을 겪으며 저절로 마음을 공부했다. 어차피 안달복달한다고 ‘물건’이 잡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마음을 비우자. 하나라도 걸리면 감사하자.
“참말로 희안헌거이 언제부턴가 맴을 빙께 증말 대물(大物)이 나드라 이런 말이여. 이젠 메칠썩 허벌나게 공쳐도 거시기허들 않는당께요.”
그가 난을 하면서 얻은 또 하나 얻은 것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아무리 명품기대주라도 ‘작품(上作)’이 되려면 4~5년은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자칭은‘느림보 농사꾼’이다. 김씨는 현재 꽃물 300여분,잎물 700여분 등 모두 1000여 분을 키우고 있다. 산채(山採)도 꾸준히 하지만 절반가량은 포기나누기를 한 것들이다. 1억원 남짓에‘집떨이’요청도 많지만 절대로 안한다. 한 분에 1000만원 이상 되는 것들도 수두룩한데다 이럭저럭 최하 연 5000만원 벌이는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난은 이미 단순한 취미대상이 아니다. 수요자인 난 애호가가 100여만명이고 배양ㆍ거래 전문가들도 줄잡아 20여만명인 엄연한 산업이다. ‘녹색주(綠色株)’‘난테크’란 말도 있을 정도다. ‘일생일란(一生一蘭)’이란 3예품(藝品·'예'란 춘란이 품종으로 원예가치를 가졌을 때 부르는 용어로 3예품이란 '트리플 A'인 셈이다) 홍두화소심(紅豆花素心)은 한 분(2촉)에 10억원도 넘는다. 난의 ‘행복한 눈물’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난털이도 생겨나고, 어중이 떠중이 난에 뛰어들어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난의 난 자(字)도 모르면서 싹쓸이하는 바람에 군락지를 망치는 건 물론이다. 김씨는 자연훼손 얘기가 나오자 심마니를 보라며 버럭 대든다.
“자연훼손이라고라? 참말로 한심하요. 우덜은 농사꾼이요. 농사꾼이 씨를 말리는 것 봤소? 우덜은 그저 우수 품종 확보를 위해 ‘종자’차원의 채집만 할 뿐 인디언맹키로 필요이상으론 안하요.”
송심난성(松心蘭性)이라더니 과연 그는 어쩔 수없는‘난쟁이’이다.
글=이만훈 인터뷰 전문기자
뉴스와 매거진을 한번에! 중앙일보 모바일 Highⓙ <905+NATE/magicⓝ/show/ez-i>
2008.03.10 00:57 입력
'난초 및 식물 재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각종 수목 재배 관리 방법 (0) | 2008.05.16 |
---|---|
호피반의 발색법 (0) | 2008.05.06 |
[현진오의 野, 야생화다!]토종 원예자원 (0) | 2008.02.17 |
[스크랩] 꽃대올리기 및 꽃피우기 (0) | 2008.02.12 |
[스크랩] 채란품 주황화의 판별과 발색 (0) | 2008.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