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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에 도전장… 세월호와 이태원 사이, 시민의식 자랐다

[주간조선]

곽승한 기자
입력 2022.11.06 05:40
 
지난 11월 2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에서 한 종교인이 절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30일 오후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는 큰 고무통에 국화꽃을 가득 담아와 시민들에게 나눠 주는 이들이 있었다. 전날인 29일 밤 156명이 사망한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12시간을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직접 사온 국화꽃을 나눠 주는 이들은 스스로를 “이태원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라고만 소개했다. 이 상인들은 추모를 원하는 시민들에게 말없이 국화꽃 한 송이씩을 건넸다. 폴리스라인이 쳐져 사고 현장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시민들이 한두 명씩 이 상인들에게 국화꽃을 받아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놓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추모공간 앞에서 시민들은 “극락왕생하소서”라고 읊조리거나, 손을 모아 한참을 기도하기도 했다.

평소 이태원 해밀톤호텔 앞거리는 술병을 손에 들고 마시며 걷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을 만큼 ‘자유분방’한 거리다. 하지만 이날 이태원 거리에서 술병은 추모객들이 흠향을 위해 가져다 놓은 것들만 볼 수 있었다. 이날 오세훈 서울시장이 해외 출장에서 귀국한 직후 사고 현장을 방문하자 한 시민이 “오세훈 물러나라!”고 외쳤지만, 동요하는 시민들은 없었다.

2030의 ‘세월호’ 학습 효과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직후 윤석열 대통령은 11월 5일까지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전국 곳곳에 시민분향소가 마련됐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찾아 고인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지난 11월 1일 서울 신촌역 앞에 마련된 시민분향소에서 만난 이한준(25)씨는 “내 또래들 수십 명이, 내가 친구들과 자주 놀러가던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게 너무 황망하다”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인 것 같다”고 했다. 인근 대학교에 다니는 이씨는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학생들(1997년생)과 나이가 같았다.

이태원 참사 직후 시민들의 태도를 두고 여러 평가가 나왔다. 온라인상에선 사망자들에 대한 비난이나 ‘테러설’ 같은 가짜뉴스가 떠돌기도 했다. 사고 직후 참사의 원인을 정치적으로 선동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메시지가 나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다만 상당수 시민들은 ‘지금은 애도가 먼저’라는 입장이었다. 온라인상에 떠도는 가짜뉴스 등을 직접 조목조목 팩트체크하거나, 사안을 정쟁화하려는 정치인들에게는 비판을 쏟아냈다.

전문가들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국내외 참사 등을 겪은 시민들의 의식은 한층 성숙해진 면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 당시 정치권의 정쟁으로 번지는 현상과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 등에 대해 시민들이 상당한 피로감을 가졌다”면서 “다만 이번 이태원 참사의 경우 국가애도기간을 일주일로 정해놓음으로써 정치적 공방이 적어졌고, 시민들도 소셜미디어에 떠다니는 가짜뉴스에 대해 변별력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이태원 참사가 이전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들이 직접 구조활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압사 사고가 일어난 현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어깨를 밟고 난간 위로 올라설 수 있게 한 ‘청재킷 의인’의 사연이 전해지기도 했다. 인근 상인들은 사고를 목격한 뒤 장사를 제쳐두고 사상자 구조활동에 나섰다. 당시 거리에 있던 시민들은 내 지인이 아니더라도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심폐소생술(CPR)을 도왔다. 서울의 한 대학 커뮤니티에는 의대생과 간호대생이 이태원에 놀러갔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밤새 CPR을 하고 왔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심리학과 교수는 “위협이 닥쳤을 때 서로 협력해 위기를 탈출하려는 모습이 나타난 장면”이라면서 “특히 현장에 있던 2030세대는 세월호 참사 등을 겪으며 학습된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고 이후 CPR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이번 참사를 대하는 시민들의 자세를 보여준다. 질병관리청 유튜브 채널의 ‘올바른 심폐소생술과 제세동기 사용법’ 영상은 3년 전에 올라왔지만 최근 들어 조회수가 급증했다. 한 시민은 댓글에 “어제 일어난 이태원 사고를 보고 CPR 강의 들으러 왔다. 많은 분들이 심폐소생술을 배워 생명을 살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썼다. 실제로 대한적십자사 등에는 심폐소생술 교육을 요청하는 문의가 참사 이후 2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이태원 참사 다음날 대한심폐소생협회 홈페이지 접속량은 평소보다 4배 이상 증가했다. 곽금주 교수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고 애쓴 의인들의 사연이 많이 알려질수록, ‘나도 언젠가 저런 현장에 있을 때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가담해야겠다’는 심리가 확산하게 된다”고 했다.

지난 11월 2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에서 시민들이 추모글을 남기고 있다. photo 뉴시스

재발방지책에 쏠리는 여론

참사 이후 재발 방지에 큰 관심을 갖는 여론도 늘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상상해보지 못한 압사 사고가 일어난 충격만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갖는 시민들이 많아졌다. 신촌역 시민분향소에서 만난 20대 대학생 일행은 “이런 사고가 일어난 직후에만 반짝 관심을 갖고, 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 되돌아갈까봐 그게 가장 우려된다”면서 “한국에서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끔 정책이 만들어지고 시민들도 질서의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1월 1일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 공간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태원 참사 재발 방지 대책으로 이른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군중관리)’ 체제 보완을 강조하면서 “이번 대형 참사가 발생한 이면도로뿐 아니라 군중이 운집하는 경기장, 공연장 등에 대해서도 확실한 인파관리 안전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유족들에 대한 ‘2차 가해’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기사 댓글 등에 ‘놀러갔다가 죽은 건데 왜 애도해야 하나’ ‘그러게 왜 우리나라에서 핼로윈을 즐기나’ 같은 비방이다. 이번 참사로 10대 아들을 잃은 한 유가족은 “대부분 안타까워하는 댓글이지만, 유가족 입장에선 고인을 비방하는 댓글 한두 개가 더 눈에 들어온다”며 “댓글 때문에 상주들이 상처를 너무 많이 입고 있다”고 했다. 구정우 교수는 “시민으로서 기본적인 공동체의식을 망각하고 온라인 공간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는 사례들도 분명 늘고 있다”고 했다. 경찰은 피해자들에 대한 비방이나 성희롱, 신상 정보 유출 등 2차 가해와 관련한 사건 6건을 내사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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