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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고구려의 건국지, 흘승골성

고구려의 건국지, 흘승골성

  • 임기환
  • 입력 : 2022.02.17 15:42

 

고구려사 명장면-143] 고구려 역사 현장을 소개할 때 첫째로 손꼽게 되는 현장의 하나가 바로 오녀산성일 것이다. 그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모습의 산세는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인상적이기 때문에, 아마도 고구려하면 광개토왕비와 더불어 오녀산성 이미지부터 떠올리시는 분이 많을 게다. 오녀산성은 중국 랴오닝성 환런시(桓仁市)에 위치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어 우리들 입에 붙다시피한 이름인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하늘에서 내려온 다섯 선녀(仙女)의 설화를 배경으로 하는 현지 이름이다. 언제부터 그런 지명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관이 좋은 산봉우리를 오녀산(五女山)이라고 이름 지은 사례를 만주 지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지안시(集安市)에서 퉁화시(通化市)로 넘는 노령 고개에서도 오녀봉(五女峰)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오녀산성은 역사성을 전혀 갖지 못한 이름이다. 따라서 고구려 당시에 불리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겠다.

먼저 고구려 당대 기록인 '광개토왕비문'에 주몽의 건국지를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의 서성산(西城山)"이라고 하였다. 홀본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졸본(卒本)'과 같은 말이다. 성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홀본 땅 서쪽에 있는 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역사서에 전하는 오녀산성을 가리키는 옛 이름은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다. 홀승골성은 중국 역사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서 고구려 건국 설화를 소개하면서 주몽의 건국지로 기록하고 있다. '흘승골성(紇升骨城)' 중 '흘승(紇升)'은 '홀본(忽本)'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흘(紇)'은 발음상 '홀(忽)'과 통하고, '승(升)'은 글자 형태로 보아 아마도 '본(本)'자가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흘승(紇升)'은 곧 '홀본(忽本)'이다. 다만 흘승의 '승(升)'이 오자라는 근거가 다소 불분명하므로, 일단 '흘승골성'을 고구려 당시 이름으로 해두자.

▲ 오녀산성으로 알려진 흘승골성 /사진=심완근

'흘승골성(紇升骨城)' 중 '골(骨)'이라는 글자도 성이 위치한 지명과 관련된 말이다. 따라서 흘승골성은 '홀본'에 있는 '골성'이란 뜻이 되겠다. 아마 고구려인들은 '골성'이라고 불렀던 듯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몽이 졸본천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한 직후에 궁궐을 축조하는 대목을 인용해보자.

(주몽왕) 3년(서기전 35) 봄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주몽왕) 4년(서기전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주몽은 나라를 세운 직후에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위 기사대로 재위 4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마련하였는데, 그에 앞서 신이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전해에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나기도 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궁궐을 짓기 바로 전인 4월에도 7일 동안이나 구름이 안개가 사방에 가득한 현상이 나타났다. 위 기록상으로는 골령에 나타난 이런 신이한 현상과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은 사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에는 이와 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를 인용해보자.

7월에 검은 구름(玄雲)이 골령에서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을 볼 수 없었다. (그 속에서) 수천 명 사람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토목 공사를 하는 듯했다. (주몽)왕이 "하늘이 나를 위해 성을 쌓는다"고 말하였다. 7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흩어지고 나니 성곽과 궁실과 누대가 저절로 완성되어 있었다. 왕이 하늘(皇天)에 절하고 그곳에서 지냈다

'동명왕편'의 이 기록은 이규보가 '구삼국사'라고 부른 고려시대 역사서의 동명왕본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앞서 고구려본기에서 인용한 주몽왕 4년조 기사와 이 '구삼국사'의 기사는 내용상 거의 일치한다. '구삼국사' 기사는 하늘이 주몽왕을 위해 골령에다 운무 속에서 7일 만에 궁궐과 성곽을 만들어주는 글자 그대로 신화다운 신이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서는 이런 신이한 내용을 4월과 7월 기사로 나누고, 4월 기사에는 7일 동안이나 구름과 안개가 일어난 일을, 7월에는 성곽과 궁실을 지은 사실을 따로따로 기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골령에 7일 동안 운무가 가득한 사실이 궁궐을 짓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지 신비로운 자연 현상으로만 기록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고구려본기 기록을 보면 골령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다소 허구 같은 내용을 담고는 있지만, 그 외에 신비스러운 운무가 나타나는 현상은 특별하게 신이하다고 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따라서 유교적인 합리성의 기준에서 보아도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신비한 운무 현상과 현실의 궁궐 축조를 직접 연관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두 기사 중에서 어느 기록이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인들이 받아들였던 이야기일까? 고구려인들도 처음에는 하늘이 골령에다 궁궐을 축조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성곽을 직접 축조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몽이 하늘의 자손이며, 또 고구려 국가를 세우는 것도 하늘의 뜻이라는 정통성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구삼국사'에서 전하는 그런 이야기를 건국신화에 담아 후세에 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후일 '논어'에 나오는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 경구를 신봉하는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구삼국사'에 실린 이런 괴이한 이야기를 그대로 역사책에 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 이야기를 해체해 기년을 나누어 붙이고 나름 합리적인 맥락의 이야기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것이 고구려본기의 기사다.

위 고구려본기나 '구삼국사' 기사에 전하는 '골령'이 바로 흘승골성이 위치한 곳이다. 사실 성곽이 위치한 높고 깎아지른 절벽이 구름과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노라면, 아마도 그 운무 속에서 무언가 신비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상상도 절로 하게 될 듯하다. 하지만 그런 신이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고대인들의 관념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고대인들의 정신세계는 신화의 세계이기도 했다.

유교도 나름 합리성을 추구했지만, 역시 합리적 사유는 근대의 소산이다. 오늘 우리는 과학과 논리성을 갖추어 합리적 사유를 추구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반드시 합리적이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터무니없는 생각들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따지고 보면 '구삼국사'의 골령 이야기에서 고구려본기의 골령 이야기로 바뀌는 것도 나름 합리적인 생각의 결과였다.

그런데 요즘 뉴스라고 나오는 이야기 중에는 위 '구삼국사'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한 내용들이 버젓하게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7일 만에 골령에 검은 구름 속에서 하늘이 궁궐과 성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운운했던 건국기 고구려인들보다 우리가 얼마나 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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