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21.02.09 00:29 |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계급 투쟁’이라는 말이 현재 세계와 들어맞는다 생각할 사람은 사라진 듯하지만, 이따금 예외도 있다. 자본가의 자본가라 할 워런 버핏 같은 사람이다.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있고, 내가 속한 계급이 이기고 있다. 사실 내가 속한 계급은 그냥 이기고 있는 수준이 아니다. 다른 계급을 죽이고 있다. 궤멸시키고 있는 수준이다.” 버핏에 따르면, 계급 투쟁이 현재 세계와 들어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계급 투쟁이 사라져서도 우리가 더는 계급 사회에 살고 있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한 계급의 일방적 승리 상태가 만들어내는 착시다.
보이지 않는 손에서 보이는 손으로
1 : 99이자 20 : 80인 절망의 사회
상위 20%의 희한한 진보의식
정치는 사회 성원의 일반적 반영
다만 버핏이 말한 ‘내가 속한 계급’이 자본가 전체는 아니다. 상위 1% 자본가에 해당한다. 노동자 계급 전체가 ‘죽고, 궤멸당하고’ 있지도 않다. 상위 20%는 매우 다른 처지에 있다. 한국의 경우 300대 기업 정규직 연봉 평균은 8천만 원가량이고, 그 30개는 1억 원이 넘는다. 공기업 정규직도 비슷한 수준이다. 이들의 고임금은 나머지 노동자의 저임금, 고용 불안정과 짝을 이룬다. 우리는 자본가라고 다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라고 다 노동자가 아닌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다.
두 세기 넘게 진행된 ‘자본의 사회화’의 결과다. 애덤 스미스가 “교환하고 교역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 설파한 이래, 경제학은 늘 자유시장을 찬미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초기에 한껏 펼쳐진 자유시장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시장의 무서움을 깨닫게 했다. 시장의 위험과 불안정성에 대응하는 자본의 사회화가 시작된다. 오늘 기업의 일반적 형태인 주식회사는 그 첫 결실이다. 주식회사는 개인 기업보다 더 많은 자본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일 수 있지만, 시장의 위험은 분산시켰다.
19세기 말 자본의 사회화는 ‘독점’ 단계에 이른다.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며 독점자본은 국가와 결합한 형태로 발전한다. 국가가 금융, 통화, 경제정책 등을 관리하며 독점자본의 활동을 지원하는,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본주의는 국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 흔히 반대의 것으로 여기는 케인스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이 형태의 두 변형이다. 작은 정부를 외치는 신자유주의 국가가 위기에 빠진 독점 자본에 대한 지원에선 더 적극적이었다.
오늘 순수한 의미에서 자유시장은 영세자영업자, 자신과 가족을 착취하며 경쟁을 치르는 치킨집 주인들에게나 남았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챈들러의 말마따나 ‘보이는 손’이다. 한국에서 국가와 결합한 독점 자본(재벌)은 나머지 중소자본을 하청 계열화하고, 상당 수준의 ‘자본의 계획경제’를 실행한다. 이런 사회에서 주요한 독점자본과 대기업 정규직 그리고 그 파트너로서 국가·공공 부문의 정규직 노동자와 나머지 대다수 노동자가 임금과 생활 수준에서 전혀 다른 처지에 있는 건 당연하다.
한국 노동자 계급의 분리는, 80년대 말 이후 노동자 투쟁의 주력이 된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을 고리로 진행했다. 조직노동자들과 손실을 감수하며 정면충돌을 반복하던 독점자본과 국가는 전략을 바꾼다. 조직노동자들을 체제 내 중산층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들의 ‘묵인 혹은 협조 아래’ 신규 및 여타 노동자들을 불안정 비정규직으로 채워간다. 총 노동비용을 유지하면서 노동자 계급 전체를 무력화하는 전략이다. 파견이나 비정규직 관련 법제를 관철하여 그 작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다. 1:99이자 20:80인 절망의 사회는 그렇게 완성된다.
사무직 생산직을 불문한 상위 20%가 현재 민주당 지지의 주력이다. 그 상당수는 진보정당 지지자였지만, 관심이 계급에서 주식과 부동산으로 바뀌면서 진보정치는 불필요하거나 부담스러워졌다. 그들이 빠져나가면서 진보정치도 거의 궤멸했다. 옛 습관은 남아 국민의힘을 지지하진 않으니 민주당이 최선이다. 그게 그들의 희한한 ‘진보 의식’이다. 조국 지지파와 반대파의 윤리 수준은 다르겠지만, 그 점에선 다르지 않다.
영세자영업자를 포함한 80% 노동자는 생존에 매달리느라 계급이나 진보정치 따위에 관심 둘 여력조차 없다. 노동자 계급의 분리는 고스란히 교육의 분리로 나타난다. 대부분 아이는 노동자로 살아갈 터이지만, 입시 경쟁을 결정하는 건 부모의 경제력이다.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서민 부모의 의지는 해봐야 안 된다는 체념으로 바뀐 지 오래다. 여전히 학원을 보내지만, 다들 보내니까 보낼 뿐이고 형편 좋은 집 아이가 다니는 학원과 같지도 않다.
사정은 이러한데,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니 80%에겐 죽어라 죽어라 하는 세상이다. 여력이 있는 20%는 인터넷과 SNS 세계에서도 과잉 대표된다. 그들은 여전히 민주당과 국민의힘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놓고 정치 평론을 즐긴다. 정치는 사회 성원의 일반적 반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는데 정치가 저 꼴이라는 생각은 버리자. 내가 현실의 본질과 구조를 못 보거나 눈 감기 때문에 정치가 저 꼴이다.
김규항 작가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정치가 저 꼴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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