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한철 기자
- 입력 : 2020.12.02 16:52:23 수정 :2020.12.02 17:5
사진1.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 발굴 모습. 일제강점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963년 대구 현풍읍 유가면의 속칭 `팔장군묘`를 불법으로 파헤친 도굴꾼 일당이 경찰에 일망타진된다. `현풍 도굴사건`으로 알려진 희대의 도굴사건이었다. 범행은 대구의 유명 골동상 세 명이 주도했고 이들은 고분 유물 400여 점을 2년 동안이나 곶감 빼가듯 도둑질해 갔다.
고령, 성주의 고분도 무차별적으로 도굴됐다. 검찰에 송치된 범인들은 검찰 심문에서 "1961년 10월 고령에서 대가야의 순금관을 파냈다"고 자백했다. 고령 지산동은 대가야의 중심지였고, 대규모 고분군이 있다. 이어, "서울의 장물업자를 통해 이를 110만 원에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팔았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현재 삼성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38호 고령 금관(대가야 금관)이다.
이 금관은 해방 이후 우리 땅에서 나온 최초의 금관이어서 도굴사건이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주범들은 검거된 후 유죄 판결을 받고 처벌됐지만 유물을 사들인 이 전 회장은 선의에 의한 취득으로 판결받아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 전 회장은 세인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듯 금관을 공개하지 않다가 1971년 4월 국립박물관에서 호암컬렉션을 전시할 때 첫선을 보였고 금관은 그해 말 국보로 정식 지정됐다.
사진2. 대가야의 앞선 문화수준을 엿볼수 있는 고령금관(국보 제138호). 소장 리움. 임나는 백제가 가야지역을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식민기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가야는 후기 가야시대의 임나였을 것이다.
이 전 회장은 그의 소장품 중 대가야 금관을 가장 애지중지했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금관이 밤새 안녕했는지 물었다. 종종 금관을 꺼내 부속 유물을 붙여보며 망중한도 즐겼다.
대가야 금관은 높이 11.5㎝, 밑지름 20.7㎝로 머리에 두르는 넓은 띠 위에 네 개의 풀꽃 장식이 꽂혀 있다. 띠에는 아래위로 점을 찍었으며, 원형 금판을 달아 장식했다. 드문드문 굽은 옥이 달려 있지만 이는 출토된 이후에 부착한 것이다. 원형, 은행형, 꽃형 금판, 곡옥, 금고리, 금제 드리개(수식) 등 부속 금제품도 함께 보관중인데 금관의 어느 부분에 붙어 있었는지 파악되지 않는다.
금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나라에 강력한 지배체제가 확립됐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에서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통치자의 시대가 열렸던 5세기 초의 무덤에서 금관이 무더기로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대가야도 왕권을 강화하면서 금관을 제작하게 됐던 것이다. 신라가 나뭇가지와 사슴뿔 형상으로 금관을 장식했다면, 가야에서는 금관을 풀잎이나 꽃잎 모양으로 꾸몄다. 신라의 금관보다 가야의 금관이 소형인 것은 가야가 연맹 체제로 유지돼 왕의 세력이 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맛은 가야 문화만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가야 금관은 일본에 한 점 더 있다. 도굴 문화재 수집자로 악명 높았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불법 반출해 도쿄 국립박물관관에 기증한 창녕 금관이다.
리움의 대가야 금관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중심에 있는 44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44호분은 높이 7m, 지름 32m 규모다. 수혈식(竪穴式·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는 묘제) 석실 구조의 전형적인 대가야 왕릉급 무덤이다. 이 고분 주변으로 크고 작은 고분들이 1만기에 달한다. 이 지역은 대가야 통치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1977년에 진행된 발굴에서 주실을 둘러싸고 있는 순장곽 32기가 드러났다. 우리나라 최대의 다곽 순장묘다. 따라서44호분은 왕릉이 분명하며 금관의 출처도 44호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덤의 조성과 금관의 제작 시기는 대가야 전성기인 5세기 후반으로 본다. 이미 오래전 도굴돼 사람 뼈·말뼈와 함께 토기 30여점, 환두대도(자루에 고리가 달린 칼), 화살촉 정도만이 수습됐다. 45호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왔다. 장식은 금관과 비슷하지만, 재료가 금동이어서 피장자의 신분은 44호분 피장자보다 한 등급 아래였을 것이다.
사진3. 금관가야의 무덤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 사진 문화재청. 금관가야는 전기 가야시대의 임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금관가야는 400년 고구려의 침입이후 급격히 쇠퇴한다. 일각에서 금관가야의 지배층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야는 여전히 미스터리의 국가다. 일제강점기 가야 고고학은 <일본서기>의 가야 관련 기록(4~6세기 야마토(大和) 시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확인하려는 연구 일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광복 후 가야사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일본서기>의 내용을 인정하는 것으로 인식해 국내에서는 가야사를 홀대해 왔다.
가야는 서기 42년(<삼국유사> 가락국기 기록) 한반도 남쪽 해안에서 시작돼 562년(<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 내륙에서 마감하기까지 무려 520년간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독자적 정치체제를 유지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성산가야(성주), 고령가야(진주) 등 6가야를 단정하지만, <삼국지(三國志)>,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가야 관련 문헌과 지금까지 출토된 고고 자료를 종합할 때 최소 12개 이상의 나라가 존재했다.
가야의 명칭도 가야는 물론 가라, 가량, 가락, 구야, 임나 등 다양하다. 가야국은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주변국에서 칭한 국명도 따로 있었다. 이에 더해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후대에 붙여진 이름들까지 뒤섞여 혼란을 가중시킨다. <삼국지>와 <일본서기>에 언급되는 12개의 가야국 이름에는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와 같은 용어는 없다. `○○가야`도 가야 이후 신라·고려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가야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국명인 것이다.
가야 각국은 가락국(금관가야), 가라국(대가야), 아라국(아라가야)처럼 쓰는 것이 맞는다. 임나(任那)는 <일본서기>가 고대 일본의 가야지배를 꾸미기 위해 사용한 명칭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임나는 존재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한 왜를 추격해 임나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러 항복시켰다"고 나온다.
임나는 외국이 가야를 간접 통치하는 일종의 식민기구는 분명해 보인다. 임나라는 한자의 뜻도 그런 내용이 내포돼 있다. 다만, 통치 주체는 왜가 아니라 백제인 것이 확실하다. 백제는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남정(南征) 이후로 가야를 간접 지배했다. 고구려와 대치했던 백제는 왜의 군사력을 빌려와 가야를 다스리는 방법을 병행하기도 했다.
가야사는 광개토왕 비문에도 보여지듯 서기 400년 고구려가 가야·왜 연합군에 의해 공격당하던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만 보기를 파병해 금관가야를 정벌한 사건을 계기로 전·후기가 나뉜다. 전기 가야는 김해의 가락국이, 후기는 고령의 가라국이 중심국이었다. 함안의 아라국은 전·후기 모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다. 광개토왕의 임나정벌로 김해의 금관가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따라서 전기 임나는 한반도 남쪽 끝의 금관가야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본서기> 숭신 65년 기록에 "임나는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신라)의 서남에 있다"고 나타나 있다. 실제 지도를 보면 김해 북쪽엔 낙동강 하구의 큰 물길이 가로로 흐르고 있다. 바다 같이 넓은 하류의 낙동강이 김해를 마치 섬처럼 내륙과 분리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 `임나 대마도설`을 거론하지만 대마도는 척박해 버려진 땅이었다. 어쨌든 광개토왕의 종발성 정복으로 금관가야는 급격히 쇠퇴하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해의 지배층이 일본으로 집단 이주한 때문으로 분석한다.
후기의 패자 대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까지 16대가 존속했다고 <삼국사기> 지리지는 전한다. 변한의 소국인 반로국(半路國)으로 시작해 가라국를 거쳐, 479년 가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의 남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후기에는 백제가 이러한 대가야에 임나를 두고 영향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대가야의 세력권은 고령을 중심으로 합천, 거창, 함양, 산청, 의령, 하동과 전남 동부의 광양, 순천지역, 전북 동부의 남원, 진안, 장수 지역까지 포괄한다. 제철 기술이 번성했으며 고유의 음악을 가야금 곡으로 정리하는 등 높은 문화 수준도 보유했다. 554년 대가야는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한다. 결국 562년 신라 정복군주 진흥왕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고 만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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