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공무원이 겁 없이’ 발언은
장기판 卒로 순치하려는 의도
줄 세우고 눈치 보게 만들면
국민만 피해 보는 세상 돼
입력 2020.12.03 03:00
“어느 부처 공무원들이 겁 없이 집단행동을 감행하느냐”는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의 발언은 단지 추미애 법무장관에게 반기를 든 검사들만을 겨냥한 말이 아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어디다 대고 고개를 쳐드느냐는 식의 이 말은 대한민국 공무원들을 향한 경고이자, 문재인 정부에 공무원은 어떤 존재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불법·부당한 상관의 지시에도 찍소리 말라는 뜻으로, 권력에 맞서는 검찰 공무원들을 겁주고 모든 공직자를 순치하려는 것이다.
사실 공무원들을 장기판의 졸(卒) 정도로 보는 문 정부의 속내는 지난해 김수현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이인영 당시 원내대표가 나눈 대화에서 이미 드러났다. 김 실장이 “집권 4년 차 같다”며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공무원들에게 강한 불만을 나타내자, 이 원내대표는 공무원들을 “장관 없는 사이에 자기들끼리 이상한 짓을 많이 하고” “잠깐만 틈을 주면 엉뚱한 짓을 하는” 집단으로 묘사한다. 그땐 방송 마이크가 꺼진 줄 모르고 한 실수였다.
2019년 5월 10일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인영(오른쪽)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당·정·청 을지로 민생현안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젠 자신들의 정책 실패조차 대놓고 공무원 탓으로 떠넘긴다. 얼마 전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국토부 공무원들한테 설득당해 임대사업자에게 인센티브를 준 게 뼈아픈 실수라며 부동산 가격 급등과 전세난 책임을 공무원 탓으로 넘겼다. 민주당 중진 출신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전셋값 불안이 저금리 탓이라며, 금리를 내린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공무원 길들이기는 점점 노골화하고 있다. 최근엔 나랏일에 몸 사리지 않으면 징계하지 않는다는 공무원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복지부동 공무원방지법’으로 포장된 이 법안은 현 정부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 실수하면 문제 삼지 않겠으니, 충성 맹세 하라는 뜻으로 공무원들은 해석하고 있다. 실제 정세균 총리는 국무회의 다음 날에 월성 원전 1호기 관련 자료 은폐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산업부 직원들을 찾아가 “소신 있게 해달라” “수고 많았다”고 격려하고 상까지 줬다. 어르고 달래며 공무원들을 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눈치만 보던 공무원들의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든 건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 장관의 갈등에 침묵하던 문 대통령의 한마디였다. 공직자들에게 공동체의 이익을 받들라며 선공후사(先公後私) 자세를 요구한 그의 말은 현 정부 편에 서는 게 공익을 위한 올바른 자세요, 반대편에 서는 건 사익이나 챙기는 것이니 확실하게 노선을 정하라는 강요나 다름없다. 문 정부가 흔히 쓰는 편 가르기 프레임을 공무원들에게 건 것이다.
공직자들을 권력 집단의 홍위병으로 전락시킬 참이다. 이미 공무원 사회는 문 정권 3년 반 사이에 무력감에 빠져 버렸다. 노무현 정부 때 똑똑한 관료들한테 창피당한 경험 때문에 문 정부는 3류 공무원을 장관에 기용하고 있다는 전직 경제 장관 말처럼, 지금 공직 사회는 믿고 따를 만한 공무원 출신 장관도 딱히 없다. 능력이 떨어지는 ‘늘공' 장관들은 청와대와 여당 입만 쳐다보고 있다. 제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후배 공무원들의 조언조차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여당이 재난지원금 필요하다며 돈 내놓으라면 뚝딱 빚내어 현찰 만들어주는 ATM처럼 쉬운 길만 찾아갈 뿐이다.
문 정부가 원하는 공무원의 표상은 하명(下命)이나 떠받드는 로봇 충신이다. 눈치 100단 공무원들을 겁주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도 저도 싫은 공무원은 바닥에 딱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 ‘낙지부동'이 될 것이다. 민심을 돌보는 게 아니라 권력 표정이나 살피는 관료들만 남으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결국 국민만 피해보는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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