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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권영길, 민주당 이인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19일 ‘대선 완주’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소수정당 후보로서의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대권 3수(修)에 나선 권 후보, 재도전에 나선 이 후보는 각각 진보와 중도개혁의 깃발을 내걸었으나 거대정당 후보들의 경쟁에 가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문 후보는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냈으나 세부족을 절감해야 했다.
◇권영길 = 세 번째 대권도전에 나선 권 후보는 이번에도 대권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대권 3수(修)에 나선 권 후보, 재도전에 나선 이 후보는 각각 진보와 중도개혁의 깃발을 내걸었으나 거대정당 후보들의 경쟁에 가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문 후보는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냈으나 세부족을 절감해야 했다.
◇권영길 = 세 번째 대권도전에 나선 권 후보는 이번에도 대권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권 후보는 지난 9월 민노당 경선에서 심상정 의원과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세 번째 대권도전의 길을 열었다.
여론의 관심을 끌었던 경선의 후광효과로 권 후보 지지율은 경선 직후 5%대를 기록하며 선전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선거전략 부재 속에 지지율은 대선 직전까지 내리막길을 걸어 급기야 3% 안팎의 부진 끝에 선거를 마쳤다.
권 후보는 선거 막판 “내년 총선을 위해서라도 민노당에 ‘종자돈’을 달라. 미래를 위해 한 표를 달라”고 호소하며 전통적인 민노당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또 진보적 경제 정책을 발표하는 등 정책 이슈를 통해 차별화를 꾀하려 했으나 “어떤 것도 BBK 주가조작 사건의 논란을 넘어서지 못했다”며 사실상 한계를 인정했다.
권 후보는 이날 주소지인 창원에서 투표를 하고, 태안 기름유출사고 현장을 찾아 자원봉사활동을 펼친 뒤 문래동 당사 상황실에서 묵묵히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인제 = 97년 대선 3위, 2002년 민주당 후보경선 탈락에 이어 두번째 대권본선 도전에 나선 이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도 쓴 잔을 마시게 됐다.
이 후보는 지난 5월 민주당에 복당한 뒤 두 차례 패배의 교훈을 바탕으로 절치부심해 대선후보 티켓을 거머쥐었다. 경선 과정에서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경쟁자였던 조순형 의원을 물리치는 저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서 이 후보는 자신의 표현대로 ‘외롭고 힘겨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통합 및 후보단일화 합의, 파기 논란을 거치면서 이 후보의 지지율은 1%대 안팎으로 추락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의원 및 원외위원장들은 신당, 한나라당, 무소속 이회창 캠프로 흩어졌다.
이에 그는 “단 한표가 나와도 끝까지 국민을 향해 달려가겠다”며 독자 대선완주 의지를 밝혔지만 선거운동 마지막날까지 단일화 및 후보사퇴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 후보측은 “선거혁명을 통해 신당과 한나라당이 아닌 대안후보로 이인제 후보를 선택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민심을 얻지 못했다”며 “앞으로 민주당 재건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국현 = 대선을 불과 4개월 앞두고 ‘필마단기’로 도전했던 문 후보는 정치초년생 답지 않게 선전했으나 당선권에 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 후보는 1995년부터 12년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로 재직하면서 사람중심, 반부패 윤리경영 등 혁신적 경영 마인드를 선보였고,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등 시민운동과 적극적인 기부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런 문 후보의 저력 때문에 범여권 안팎에서는 그를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잠재력 있는 대항마로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대선 레이스에 들어선 뒤 문 후보는 범여권과 재야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후보 단일화 압박에 저항하며 갈등을 빚었고 단일화 무산논란, 개혁진영 대선패배의 책임을 두고 신당 정동영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문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청와대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내년 총선에서 창조한국당을 원내 10석대 정당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다. 문 후보는 수도권 20-30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내년 총선에서 정책중심 정당을 표방하며 새로운 돌풍을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여론의 관심을 끌었던 경선의 후광효과로 권 후보 지지율은 경선 직후 5%대를 기록하며 선전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선거전략 부재 속에 지지율은 대선 직전까지 내리막길을 걸어 급기야 3% 안팎의 부진 끝에 선거를 마쳤다.
권 후보는 선거 막판 “내년 총선을 위해서라도 민노당에 ‘종자돈’을 달라. 미래를 위해 한 표를 달라”고 호소하며 전통적인 민노당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또 진보적 경제 정책을 발표하는 등 정책 이슈를 통해 차별화를 꾀하려 했으나 “어떤 것도 BBK 주가조작 사건의 논란을 넘어서지 못했다”며 사실상 한계를 인정했다.
권 후보는 이날 주소지인 창원에서 투표를 하고, 태안 기름유출사고 현장을 찾아 자원봉사활동을 펼친 뒤 문래동 당사 상황실에서 묵묵히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인제 = 97년 대선 3위, 2002년 민주당 후보경선 탈락에 이어 두번째 대권본선 도전에 나선 이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도 쓴 잔을 마시게 됐다.
이 후보는 지난 5월 민주당에 복당한 뒤 두 차례 패배의 교훈을 바탕으로 절치부심해 대선후보 티켓을 거머쥐었다. 경선 과정에서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경쟁자였던 조순형 의원을 물리치는 저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서 이 후보는 자신의 표현대로 ‘외롭고 힘겨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통합 및 후보단일화 합의, 파기 논란을 거치면서 이 후보의 지지율은 1%대 안팎으로 추락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의원 및 원외위원장들은 신당, 한나라당, 무소속 이회창 캠프로 흩어졌다.
이에 그는 “단 한표가 나와도 끝까지 국민을 향해 달려가겠다”며 독자 대선완주 의지를 밝혔지만 선거운동 마지막날까지 단일화 및 후보사퇴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 후보측은 “선거혁명을 통해 신당과 한나라당이 아닌 대안후보로 이인제 후보를 선택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민심을 얻지 못했다”며 “앞으로 민주당 재건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국현 = 대선을 불과 4개월 앞두고 ‘필마단기’로 도전했던 문 후보는 정치초년생 답지 않게 선전했으나 당선권에 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 후보는 1995년부터 12년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로 재직하면서 사람중심, 반부패 윤리경영 등 혁신적 경영 마인드를 선보였고,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등 시민운동과 적극적인 기부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런 문 후보의 저력 때문에 범여권 안팎에서는 그를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잠재력 있는 대항마로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대선 레이스에 들어선 뒤 문 후보는 범여권과 재야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후보 단일화 압박에 저항하며 갈등을 빚었고 단일화 무산논란, 개혁진영 대선패배의 책임을 두고 신당 정동영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문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청와대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내년 총선에서 창조한국당을 원내 10석대 정당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다. 문 후보는 수도권 20-30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내년 총선에서 정책중심 정당을 표방하며 새로운 돌풍을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입력 : 2007.12.19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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