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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소리

시시각각] 세금 잘 내는 당신이 ‘기부천사’

시시각각] 세금 잘 내는 당신이 ‘기부천사’ [중앙일보]

 

2009.12.21 18:52 입력 / 2009.12.22 01:19 수정

 

내 주머니에서 돈 나가기는 기부나 세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분은 영 다르다. 안 내도 되는 건데 내고 나면 뿌듯한 게 기부라면, 할 수 없이 내는데 빼앗긴 것처럼 억울한 게 세금이다. 적게 낸다고 기쁨이 작으란 법 없는 게 기부라면, 액수가 적을수록 아까움이 덜한 게 세금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더 내려는 게 기부지만, 그래서 가능하면 덜 내려는 게 세금이다. 내가 내도 즐겁고 남들 내는 것 봐도 기분 좋은 게 기부라면, 내가 안 내면 짜릿하고 남이 안 낸 거 알면 정말 열 받는 게 세금이다. 그러다 보니 남 몰래 더 내다 큰 감동 주는 게 기부고, 남 속여 덜 내다 쇠고랑 차는 게 세금이다.

며칠 전 국세청의 새 기법(?)에 적발된 ‘탈세 선수’들을 보며 열 받은 사람들 많았을 터다. 특히 평소 세금 더 내다 연말정산으로 돌려받으며 횡재한 것처럼 좋아라 하는 유리지갑 샐러리맨들은 잦은 연말 모임에 지친 속이 더욱 쓰렸을 일이다. 공연히 손해 본 것 같아 나도 김장훈이나 션-정혜영 부부 같은 기부천사들을 닮아보겠다던 모처럼의 다짐이 담배 연기처럼 흩어진 사람도 많았을 성싶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담배 연기야 빨리 사라질수록 좋은 거지만 그깟 염치 없는 인간들의 볼품 없는 행동에 당신의 결심이 깨졌다면 그것은 국가·사회를 위해서나 당신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니 말이다.

말로 옮기기에도 참 용렬(庸劣)하고 구차한 짓들이다. 변호사라는 어떤 사람은 5년 동안 3700만원을 벌었다면서 5억6000만원을 썼다. 자녀 2명을 미국 유학 보내고 해외여행을 32번 다녀왔다. 빌라를 13채나 사들여 재산을 17억원이나 늘리는 재주는 꼭꼭 숨겼다. 모텔과 음식점을 경영하는 자영업자도 5년 동안 4000만원을 벌었다는데 30억원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 3채를 더 사 모아 20억원이 넘는 재산을 불렸다. 이런 자영업자들이 4만 명이나 된다는 걸 보면 그다지 특출한 재주도 아니다. 그저 내가 냄으로써 공공을 위해 쓰일 국가 재산을 사취해 자신과 자기 가족 배 불리는 데만 쓴 것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평소 사회정의를 위해 변론하고 소비자들의 건강한 먹을거리를 찾는 데 노력했을 거라 믿을 수 있겠나. 안된 말이지만 그런 돈으로 효도 받는 부모는 무에 그리 기쁠 것이며 그런 돈으로 호강하는 자식들이 배우는 게 무엇이겠나 말이다. 이런 불행한 가정 때문에 당신의 행복한 결심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부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당신이라도 마찬가지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 당신은 이미 기부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까닭이다. 세금은 내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국가에 치르는 대가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보다 더 가난한 이웃을 돕는 데 쓰인다는 의미에서 기부나 마찬가지다. 노르웨이 갑부 올라브 톤 회장이 자서전에서 말한 게 바로 그거다. “내가 돈을 버는 가장 큰 목적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다. 국세청에 가능한 한 많은 세금을 주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세금을 많이 냄으로써 더 큰 기부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146억원을 벌어 133억원의 세금을 냈다. 어쩌면 평생 모은 재산을 임종 직전에 내놓는 것보다 매달 열심히 일하고 번 만큼 세금을 내는 게 더 의미 있는 기부일 수도 있다. “건강할 때 하는 희사는 금이요, 병 났을 때의 희사는 은이며, 죽은 뒤의 희사는 납”이라는 유대인 격언도 그래서 있다.

기부든 세금이든 당신처럼 정직한 사람의 의욕이 꺾이지 않으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탈세는 끝까지 추적돼 대가를 치르고 만다는 것과 내가 낸 세금이 누수 없이 적재적소에 쓰인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이 심판해야 한다. 납세자인 당신은 기부자인 동시에 유권자인 까닭이다. 정직한 사람의 내 주머니 지키기가 그토록 쉽지 않은 일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