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금 횡령보다 악랄하다, 세계 정상들이 보낸 조전 횡령 [박은주의 돌발]
입력 2021.11.02 15:55
지난 10월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 부인 김옥숙 여사, 장녀 노소영씨, 장남 노재헌씨 등 유족들 모습이 보인다.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것은 지난 10월 26일이다. 정부는 지난 27일 ‘고(故) 노태우 전(前) 대통령 국가장’을 26~30일 5일장으로 치른다고 알렸다. 행안부 브리핑 내용은 이렇다. “27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국가장이 심의를 거쳐 의결됐다” “12·12사태와 5·18 민주화운동 등과 관련해 역사적 과오가 있으나 직선제 선출 이후 남북기본합의서 등 북방정책으로 공헌했고, 형 선고 이후 추징금 납부 노력 등이 고려됐다.” ‘개전의 정’이 있어 감형 한다는 법원 판결문과도 비슷한 어조였다.
‘국가장’ 결정문을 보면서, ‘당연한 것’을 논란으로 만든 후 ‘그래도 내가 봐줬다’고 생색 내는 이 정부의 ‘공치사 전략’에 감탄했다. 더불어 대한민국 대통령은 ‘숨 끊어지는 시간’마저도 잘 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때’를 잘못 만나면 살아서는 물론, 세상을 떠서도 모욕을 피하기 어렵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자녀들이 ‘부친 사후’를 걱정해 백방으로 뛰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게 다 이유가 있어 보였다.
‘과오있는 전직 대통령’을 용서할 권리는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최우선 권리는 80년 광주에서 희생한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있다. 그러면 후순위는 누구일까. 그 때 나머지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가해자 편이었을까. 이걸 특정한 정치적 지향을 가진 ‘권력’이 ‘개전의 정’을 감안해 임의로 정하는 게 맞는 건가.
아직 그에 대한 답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정확히 알게 됐다. 당대 정권에게는 망자에 대한 예우를 ‘훔칠 권리’ ‘횡령의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가장이 결정된 후인 29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를 비롯, 베트남·태국·쿠웨이트·바레인·헝가리·과테말라·몰디브·세이셸·가봉 등의 국가 정상이 노 전 대통령 별세 후 조전(弔電)을 보냈다고 한다. 외교부는 사흘간 유가족과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유가족이 중국대사관과 접촉해 알고 항의하자 31일에야 알려줬다고 한다. 조전의 구체적 내용은 쏙 뺐다. 언론은 이런 사실을 1일에야 알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우리 정부에 보낸 조전 관련 이미지. 정부는 구체적 조전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TV조선
상가집에서 부의 봉투를 훔치는 행위, 결혼식장에서 축의금 훔치는 일은 질이 나쁜 행위다. 유족이나 가족들이 감사 인사나 답례할 기회까지 빼앗기 때문이다. 정부의 ‘조전 은폐’ ‘조전 횡령’은 부의금 절취보다 더 악랄하다. 다른 나라에서도 ‘대통령 노태우’를 예의를 갖춰 대우한다는 걸 은폐한 셈이기 때문이다. 유족에 대한 예우, 국민에 대한 예의 차원이 아니라, ‘여론 조작’에 해당한다.
이 뉴스를 보면서, 막다른 골목에 사람을 몰아넣고 “그나마 나니까 너 봐주는 거야”라고 속삭이는 악당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전 횡령’은 ‘협박 정치’ ‘겁박 정치’와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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