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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국방

[카페 2030] 민주화 정신이 이런 것이었을까

[카페 2030] 민주화 정신이 이런 것이었을까

입력 2022.02.18 03:00
 

“정권의 횡포에 맞서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죽인 안기부! 공안 정국 만들려고 죄 없는 동포들의 인생을 짓밟아온 정권의 개, 그게 안기부잖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이런 대사가 나와 나도 모르게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 드라마가 ‘안기부 미화’ ‘민주화 운동 폄훼’ 의혹을 받은 문제의 드라마 ‘설강화’라는 걸 알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종영 후 논란이 잦아들 무렵 정주행을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궁금해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첫 회 이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작년 12월 29일 서울 마포구 일대에서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JTBC 드라마 '설강화' 방영 중단을 촉구하는 트럭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화 폄훼’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은 방영 첫날부터 “민주화 운동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역사 왜곡 드라마의 방송을 중지해달라”는 국민청원을 올렸다. 36만5000명이 이 청원에 서명했다. 방심위엔 800건 넘는 민원이 접수됐다.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실은 종영 17일 만인 지난 16일 뒤늦게 이 드라마에 대한 입장을 냈다. “정부는 국민 정서에 반하는 창작물의 내용에 대해 민간에서 이뤄지는 자정 노력 및 자율적 선택을 존중한다.”

정부가 해줄 일 없다는데, 36만5000명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던 시민단체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 “운동권에 잠입한 간첩, 정의로운 안기부,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이 등장하는 드라마에 문제의식을 느껴야 한다”던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좀 머쓱할 것이다. 종영한 지금 돌아보니 ‘민주화 폄훼’는 드라마 시놉시스와 등장인물 소개 등을 종합해 만들어낸 ‘허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1987년 대선 정국. 남한 정권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북 정권은 돈을 받기 위해 서로 합의하에 야당 측 인사에 대한 납치 공작을 벌인다. 일이 틀어져 호수여대 기숙사로 숨어든 간첩이 안기부장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민주화 운동’은 주인공의 배경으로 단 한 번 등장할 뿐이고, 간첩이 운동권에 잠입한 일도 없었다.

드라마는 오히려 안기부와 북한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주를 이룬다. 권력자들의 대의와 폭력에 무력하게 희생당하는 개인들의 이야기가 주로 그려진다. 이런 묘사에 집중하느라 로맨스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논란을 키운 데는 주인공의 이름인 ‘영초’가 한몫했다. 민주화 운동가 ‘천영초’씨를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이 나와 결국 이름을 ‘영로’로 바꿨다. 제작진은 아마도 잘 몰랐을 것이지만, 실존 인물 이름을 사용해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드라마에 후원한 기업들을 불매운동으로 압박해 광고를 끊고, 방영 중지를 요청할 정도의 잘못인지는 의문이다.

심 후보는 드라마를 비판하며 “엄혹한 시대에 빛을 비추겠다면, 그 주인공은 안기부와 남파 간첩이 아니라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돼야 한다”고 했다. 운동권 학생이나 민주화 운동가가 아니라면 1980년대를 묘사한 작품에 등장할 자격이 없다는 선민의식에 공감할 수 없다. 진보를 말하면서 ‘내 맘에 안 들면 방영 중지’라며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고 검열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 민주화 정신이 이런 것이었을까.